몇 주 전, 우리 회사가 주최하는 데모데이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적이 있다. 약 세 시간 정도의 심사를 마치고 행사에 참여했던 투자사 대표님과 이야기할 시간이 있었는데 가장 내 뇌리에 꽂혔던 말은 '그냥 궁금한 거 물어보는 건 안됩니다. 생각의 프레임워크가 있어야 합니다'라는 말이었다. 심사역으로서의 프레임워크란 투자 결정을 내리는 판단 기준이다. 최근 들어 주니어 심사역으로서 투자하고 싶은 스타트업에 대한 판단 기준이 명확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었는데 그분의 말에 정곡을 제대로 찔려버린 것 같았다.
대표님은 본인의 프레임워크 역시 공유해 주셨는데, 투자업을 10년 넘게 한 분 답게 역시나 본인의 프레임워크가 명확하게 있었다. 정리해 보자면 아래와 같다.
1. 시장과 문제점
- 규모가 충분히 큰 시장에서(국내 3천억 원, 글로벌 3조 원 이상) 고객이 느끼는 문제를 명확히 정의했나.
2. 제품 혹은 서비스
- 제품과 서비스가 위에서 정의한 문제점을 해결하고 있나 혹은 해결할 수 있나.
3. 팀(사람)
- 위 두 가지가 만족된 상황에서 그것을 뛰어나게 수행할 수 있는 팀인가.
그분의 프레임워크에 따르면 아무리 팀이 좋고 좋은 제품을 가지고 있더라도 충분히 큰 규모의 시장에 속하지 않는 제품이라면 투자할 수 없다. 또 반대로 제품과 팀이 약하더라도 큰 시장에서 확실한 문제점을 명확히 정의하고 있으면 투자할 수 있다.
누군가는 팀이 가장 중요하다 하고, 누군가는 제품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는데 사실 정답은 없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뭐가 더 낫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다만 프레임워크 자체를 가지고 있냐 없냐는 엄청나게 큰 차이를 가져온다. 나는 아직까지 뭐가 더 중요한 것인지는 정하지 못했지만 몇 가지 중요하게 보는 점들은 이런 것들이 있다.
0. 대표자의 논리적 사고와 수용도
- 논리적 사고와 수용도는 얼핏 관련이 없어 보일 수 있지만, '초기 투자'와 '피벗'이라는 키워드를 놓고 보면 이해할 수 있다.
- 우리 회사가 주로 투자하는 초기 단계 스타트업에서는 사업 모델을 변경하는 피벗이 많이 일어난다. 나는 초기 스타트업에서 피벗은 필연적인 것으로 보고 옳은 방향으로 피벗하는 것이 성공의 중요한 요소라고 본다.
- 피벗에서 성공 확률을 높이는 것은 대표자의 논리적인 사고와 수용도다. 기존 사업 모델이 왜 실패했고, 변경한 사업 모델로는 어떻게 성공할 수 있는지를 판단하는 사고력과 유연하게 피벗을 수행하는 수용도가 장기적으로 스타트업의 성공률을 높일 수 있다고 본다.
- 이것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대표자를 직접 만나서 수차례 이야기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단점이 있지만 어쩌면 가장 중요한 요소가 아닐까 생각한다.
0. 시장
- 대부분의 IR Deck에 들어가 있는 시장에 대한 추정은 이런 식이다.
- 채용 시장에서 0~8년 차 개발자를 타겟으로 하는 서비스라면, '전체 채용 시장에서 개발자 수를 발라내고, 그중에서 0~8년 차 개발자 수를 발라내고, 그 수에 1인당 평균 연봉을 곱하고, 그 수에 채용 수수료율을 곱한다. 이게 우리의 타겟 시장이다.‘
- 여기에는 문제점이 있다. 해당 서비스의 특징이 들어가 있지 않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시니어 개발자가 시험을 통해 부여하는 인증 마크가 핵심인 채용 서비스라면 이렇게 계산해야 한다. '우리가 모을 수 있는 시니어 개발자 수 x 시니어 개발자 한 명이 1년에 인증할 수 있는 최대 횟수 x 해당 인증을 받은 사람들의 채용률 x 1인당 평균 연봉 x 채용 수수료율'
- 위와 같이 서비스 자체의 특징이 녹아있는 계산 방식으로 시장 규모를 측정하고, 그 예상 규모가 연 매출액 기준 최소 400억 원을 넘길 때 투자할만한 스타트업이 아닐까 생각한다. (업종에 따른 중견기업 연 매출액 기준 중 가장 낮은 기준이 400억 원이다)
0. 프로덕트
- 내 창업 경험을 비추어 보면 정말 시장이 원하는 프로덕트는 마케팅을 하지 않아도 고객을 끌어당긴다. 마치 마른 스펀지를 물에 담글 때와 같이 제품 자체가 고객을 흡수한다.
- 이를 판단하기 위해서 나는 ROAS나 CAC 같은 광고에 관련된 수치보다 리퍼럴 등을 통한 오가닉한 성장 지표를 본다.
- 또한 그 프로덕트의 실제 사용자를 인터뷰하거나 제품이 타겟하는 사용자에게 이용하게 해보고 피드백을 받는다.
프레임워크, 즉 판단 기준을 만드는 일은 정말 어려운 일 같다. 특히나 스타트업이라는 변화무쌍한 존재를 판단하기에는 다른 대상들보다 훨씬 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는 공부를 통해 스스로의 판단 기준을 세우고 그것을 검증해 나가는 것, 심사역들에게 꼭 필요한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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