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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창 Oct 04. 2020

엄마는 항상 미안하다고 했다


추석이라 통영에 있는 엄마를 보러 내려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엄마의 폭풍질문이 이어진다. "이불은 있나?", "반찬은 있나?" 온갖 질문과 걱정을 늘어놓으며, 벌써부터 이것저것 챙기기 시작한다. 물론 내가 내일 아침 일찍 갈 것이라 그런 것도 있지만, 엄마는 늘 양손 가득히 챙겨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반찬을 내 손에 가득 쥐어 줬다. 다 못 먹어서 버린 적도 있고 무거워서 안 가져가고 싶은 날도 많았지만, 뭘 더 챙겨줄건  없는지 초조해하는 엄마의 얼굴을 볼 때면 안 가져간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온 집안을 진동하는 그리운 밥 냄새에 엄마 집에 온 것을 실감했다. 우리 엄마는 요리를 참 잘한다. 엄마가 담은 김치 하나만 가지고도 그 자리에서 밥 두 그릇은 먹어치울 정도로 반찬 하나하나가 맛있다. 하지만 정말 신기하게도 그걸 싸서 가지고 가면, 맛이 없어졌다. 꼭 엄마가 생명을 불어넣은 음식이었던 것처럼, 엄마를 떠나서는 그 맛이 나지 않았다.


서울에선 먹어볼 수 없는 한상 가득한 반찬들과 국, 찰기 넘치는 밥, 그리고 찌개를 같이 나르고 앉았다. 난 그 자리에서 평소 먹던 양의 3배를 먹어치운다. 밥이 정말 맛있기도 했지만, 엄마는 아직도 나를 먹성 좋았던 어린 애로 보는지 내 밥만 국그릇에 꾹꾹 담아서 퍼준다. 매번 많다고 해도 양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어릴 적 통통했고 먹성도 좋았었기에 정말 밥을 많이 먹었었지만, 지금은 양이 줄어 그때의 반도 잘 못 먹는다. 하지만 배가 불러 숨이 차도 밥그릇을 끝까지 비워내며 어릴 적 더 이상 못 먹을 때까지 먹으며 느꼈던 포만감과, 만족감을 떠올린다. 지금의 일상에서는 느낄 수 없는 순수한 포만감, 잡생각이나 걱정이 스며들 공간마저 밥으로 채워버린 듯한 완전한 포만감......, 엄마가 해준 밥을 먹을 때면 그때처럼 모조리 채워버릴 수 있었다.


그렇게 밥을 먹고는 대화가 이어진다. 요즘 어떻게 사는지부터, 손주가 보고 싶다는 말까지......, 그러다 자연스레 힘들었었던 시절의 이야기가 나왔다. 티비에서는 의미 없는 홈쇼핑 보험광고가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둘 다 채널을 돌릴 생각조차 하지 않고, 힘들었던 시절의 이야기를 신나서 하고 있었다. 그땐 절대 웃지 못했던 이야기들, 다신 겪고 싶지 않을 시간들.........


그러다 엄마는 툭 말했다. 내일 안 바쁘면 하루만 더 자고 가라.






처음으로 간절히 원했던 꿈을 접어야 했던 그날......., 난 세상에 배신당한 기분이었고, 내가 사라져도 세상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 같았다. ‘길거리에서 거지가 되어볼까?’, ‘스님이 되어볼까?’ 아니면 ‘저 멀리 외국의 뒷골목으로 사라져 볼까?’ 그런 생각이 들던 차에 전화벨이 울렸다. 엄마였다. "응 엄마", "밥은 뭇나?", ".........." 대답이 안 나왔다. 그러다 이내 감정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엄마가 무심한 듯 뱉었던, 밥은 먹었냐는 말 한마디에는 미안함과 안쓰러움이 가득 담겨 있었기에......., 그렇게 엄마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막상 떨어지고 나니 슬프기보단 허무함만 가득했던 내가, 밥은 먹었냐는 엄마의 한마디에 갑자기 서럽고 억울함이 복받쳐서 눈물까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급기야 어린아이처럼 꺼억꺼억 소리까지 내며 울어댔고, 이내 엄마는 연신 괜찮다고 했다. “개 안타” “개 안타” “진짜 개 안타……”



내가 서울에 혼자 있었을 때는 나 혼자였다. 내가 잘 사는 것, 내가 즐거운 것이 먼저였고, 내가 훌륭한 사람이 되고 난 다음에야 엄마에게 효도하려 했었다. 그런데 우리 엄마는 그게 아니었다. 엄마는 혼자 있었을 때도, 힘들게 홀로 식당에서 일을 할 때도, 나와 누나를 마음에 품고 있었다. 한시도 잊지 않았고, 그 힘들고 무거운 삶에 우리까지 업고 있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내려놓지 않았다.






엄마가 집을 뛰쳐나왔다


아빠는 도박을 했었고, 경제활동도 제대로 하지 않았기에, 돈을 달라며 엄마와 실랑이를 벌이는 일이 잦았다. 하지만, 내가 대학에 붙어 서울로 가버리고, 누나도 편입에 성공해서 서울로 가버린 후 홀로 남은 엄마는 아빠를 힘겹게 대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아빠의 집착이 너무 심해졌고 급기야 폭력성까지 보이자, 엄마는 결국 짐을 싸서 집을 나와버렸다. 그리고는 연고 하나 없는 부산에서 작은 원룸을 얻고, 식당에서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당시 아빠의 성격을 생각하면, 이혼이란 말을 꺼내 볼 수도 없었을 것이고, 이성적인 대화도 할 수 없었기에,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었다.


엄마는 농협에서 계약직으로 한평생을 근무했다. 하지만 아빠를 피하기 위해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부산에서, 생전 처음 해보는 궂은 식당일을 아침 8시부터 저녁 8시까지, 꼬박 12시간 동안이나 해야 했다.


엄마는 12시간씩 주 6일을 일하고 200만 원 남짓의 돈을 받았다. 그것으로 엄마가 사는 원룸 월세, 생활비, 누나와 나의 보험료 등을 내고, 서울에 있는 누나와 나의 생활비를 하라며 50만 원을 붙였다. ‘50만 원…….’ 그때 난 못난 놈처럼 그걸 받고야 말았다. 그 돈은 그냥 50만 원이 아니었다. 엄마가 아침 일찍 일어나, 12시간 동안 불 앞에서 팔에 화상까지 입어가며 음식을 만들고, 젊은 사람들 눈치까지 보면서 번 돈이었다. 그 50만 원의 가치를 아는 놈이, 고작 나 하나 잘돼 보겠다며 그 돈을 받은 것이다. 그러면서 ‘이번 한 번만 받을게요’, ‘이번 한 번만 외면할게요’ 라며 연신 합리화를 해댔다.......


아직도 똑똑히 기억한다. 어른이라 떠들고 다니며 다신 부모에게 도움하나 안 받을 것처럼 굴던 내가, 그 돈을 받은 날,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 미안…… 내가 어른만 되면 다 해주고 싶었는데 내가 욕심이 많아 가지고, 마지막에 변호사 한번 해볼라고 엄마가 그리 힘들게 번 돈을 받아삣다…… 엄마 내가 잘못했다 내가 미안 ……내가 진짜 미안………”



엄마는 그런 못난 아들한테 말했다.



“아이다 절대 그런 생각하지 마라 ~, 내가 못해줘서 얼마나 미안한데, 너거 누나랑 니가 돈만 있었으면, 니도 그래 힘들게 안살았을 끼고, 너거 누나한테도 내가 참 미안하데이...... 진아 절대 그런 생각하지 말고, 실컷 해봐라 엄마가 열심히 벌어볼게…….”


그렇게 난 엄마가 새벽부터 힘들게 번 돈 50만 원을 받았다.





20대 초반 군대를 전역한 이후로 난, 부모님께 돈을 받지 않았다. 집이 가난하다는 인식이 있기도 했고, 엄마 혼자 힘들게 번 돈인 것을 알기에 더 이상 짐을 지우기 싫었다. 그렇게 서울에서 일하고 공부하며 아등바등 살아내고 있으니, 혼자 어른이라도 된 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난 내가 잘나서, 부모 도움 없이도 잘살고 있다고, 난 대단한 놈이라고 떠들고 다녔다. 그렇게 홀로 잘 살아내고 있는 것이, 당시 나의 최고 자랑거리였다.



그렇게 열심히 살던 중 인권변호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좇아 공부를 하면서, 나에게 몇 번의 기회가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돈과 시간 때문이었다. 그래서 더욱 돈이 간절했고, 평소 같았으면, 받자마자 다시 붙여줬을 그 50만 원을 받아버렸다. 그 50만 원은 그날따라 너무 간절했고, 하루만 철없는 애처럼 굴고 싶었다.






엄마가 집을 나온 후 부산에 있는 엄마를 보러 내려간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보게 된 화장기 하나 없는 엄마의 얼굴은 1년 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수척한 얼굴에, 몸무게가 10kg나 빠졌다고 했다. 그리고 팔뚝에는 처음 보는 화상 자국들이 있었다......., 몇 번을 다시 써봐도 그 순간을 표현할 단어를 못 찾겠다. 그냥 가슴이 조여왔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아프고 미안하고 우린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하늘에 묻고 싶었다.



엄마는 아빠를 만나기 전에는 공주처럼 살았다고 했다. 6남매의 막내로 태어나, 그 당시 대학까지 졸업했으며, 농협에 정직원으로 취업을 했고, 아빠를 만나서 결혼을 했다. 그때는 아빠의 도박 이력에 대해 몰랐다고 했다. 그렇게 결혼 후 누나와 나를 낳고, 농협을 그만뒀다.(이때 정직원이었으나 그만둔 것을 가장 후회했다) 그리고 아빠가 돈을 벌지 않고 도박을 하기 시작하면서 엄마는 급하게 계약직으로 다시 농협에 들어가서 우리를 키운 것이다.



그런 엄마가 내 앞에서 화상 자국을 자랑스레 보여주며 엄마는 열심히 잘 살고 있으니, 너도 열심히 해볼만큼 해보라며 괜찮은 척했다. 그러면서 부모가 돼서, 너희를 제대로 밀어주지 못한 것이 너무 미안하다고 했다. 미안하다고....... 연신 미안하다고 했다. 정작 미안함만 가득한 나에게 계속 말했다. "미안하다. 내가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해"



다시 올라가려 할 때 엄마는 나에게 용돈 10만 원과 김치, 반찬 등 온갖 먹을 것들을 바리바리 싸서 주기 시작했다. "댓다. 이거 다 못 먹는다 말라고 이래 많이 주노......" 냉장고를 털어주듯 내가 맛있다고 한 반찬을 싹싹 긁어서 봉지에 욱여넣었다. 서울에서 눈칫밥만 먹고살았던 내가, 오랜만에 엄마가 해주는 뜨거운 밥을 먹어서인지 너무 행복하게, 너무 맛있게 먹었다. 엄마는 그것마저 안쓰러워했다. 나에게 서울의 밥은 늘 싱거웠고 이처럼 뜨거웠던 적이 없었다. 그걸 알아서 엄마는 옆에 있어주지 못함을 대신해, 음식으로라도 엄마의 온기를 주려하는 걸까......


양손 가득 반찬을 들고 버스에 올라탔다. 얼른 가라고 손짓했지만, 역시나 엄마는 내가 눈에서 안 보일 때까지 그곳에 서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엄마는 항상 그랬다. 늘 많이 먹이려 했었고, 냉장고에 있는 반찬을 모조리 긁어 봉지에 담아줬다. 그리고 내가 떠날 때 엄마는 한 번도 먼저 가는 법이 없었다. 항상 내가 눈에서 사라질 때까지 늘 그곳에서 서있었다.



엄마를 만나고 서울로 올라오는 버스에서 많이 흐느꼈다. 저렇게 덤덤한 척 팔뚝에 화상 자국을 내밀어 보여주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렇게 로스쿨에 두 번째 떨어졌을 때, 나는 단번에 마음을 접을 수 있었다.



다행히 몇 년 전 엄마와 아빠는 합의하에 이혼을 했고, 엄마는 여전히 일을 하지만, 괜찮은 곳에 계신다. 아빠 또한 늦었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내가 취업을 하면서 엄마에게 가끔 용돈도 드리며, 평생 갚을 수 없을 것 같은 빚을 조금씩 갚는 시늉을 하고 있다.







에필로그




“구운몽”



취업을 해서 바쁜 일상을 보내며, 각자 바쁘게 살고 있다는 명목 하에 엄마 아빠와 연락도 자주 하지 않았다. 사회에서 자리를 잡은 느낌도 들고, '이렇게 나도 어른이 되고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고 또 한 세대를 만들어 가겠지?' 하는 생각이 들던 무렵, 그러면 '이제 부모님이 없어도 나 혼자 잘 살 수 있지 않을까?'라는 의문마저 들었다.



어느 날 밤이었다.


꿈속에서 나는 사방이 흰색으로 둘러 쌓인 공간에 있었다. 그곳엔 'ㄱ'자로 된 책장이 하나 덩그러니 있었는데 돈다발 같은 것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난 그걸 한 묶음 씩 뽑아서 엄마에게 주고 있었다. 그러면서 알았다.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것을......., 그 돈은 엄마가 내게 준 사랑과 추억 같은 것들이었다. 책장에 있는 그 돈다발을 다 빼서 엄마에게 주고 나면 엄마는 정말 영영 떠나버릴 것 같았다. 그 순간 우리 엄마로서 내 곁에 머물렀었던 순간들이 영화처럼 스쳐 지나갔다.


어릴 적 거짓말을 해서 엄마가 옷걸이로 심하게 혼낸 적이 있었는데, 서럽게 울어대던 나를 지긋이 바라보다...... 끝내 엄마도 못 참고 나를 껴안고 같이 울었었는데, 그때 우리 엄마가 지금 내 나이보다 조금 많았겠구나........, 밤늦게 공부하고 집에 들어오면 다들 잠들어 있어도, 엄마는 매번 일어나서 "응~ 왔나" 그 말 한마디 하고 다시 주무셨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엄마는 예민해서 자다 깨면 한참을 뒤척이는 사람이었는데 어떻게 그랬을까 싶네......., 수능 전날 잠이 안 와서 어쩔 줄 몰라하고 있을 때 그렇게 열심히 해놓고 지금 못 자면 어쩌냐며 걱정해주고 옆에 있어줬는데........, 입대 날 훈련소에 들어가며 다들 무덤덤해했지만, 엄마 혼자 불안해하다, 끝내 나를 보고 펑펑 우셨는데.......,


우리 엄마가 내 곁에 있었던 순간들이 떠오르며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아픔이 밀려왔다. 그런 엄마를 잊은 채, 없어도 될 거라 생각했던 내가 너무 싫었다. 엄마가 세상에 없다는 것이 느껴지는 순간, 내 안에 큰 무언가가 뚝 떨어져 나가 버린 듯했다.


엄마가 너무 보고 싶을 때 난 어디로 가? 엄마 목소리 듣고 싶을 땐 난 어디에 전화해? 엄마라고 부르고 싶을 땐 난 어떡해야 돼? 언제나 옆에 있을 거라 생각했기에 몰랐던 것일까? 엄마란 어른에게도 꼭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엄마는 알게 모르게 나에게 세상을 살아갈 용기를 주었었다. 포기하고 싶을 때 일어설 수 있었던 것, 보란 듯이 잘해 냈던 모든 것들, 내가 잘나서 한 줄 알았던 모든 것들이 엄마가 내 안에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었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엄마는 내 삶에 항상 있었기에 멍청하게도 모르고 지냈다. 내 삶의 일부였고, 그 일부가 없어진 세상을 꿈에서 나마 보게 되었다.


심리학 책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많이 했었다. ‘나는 내가 지닌 가정환경에 비해 너무 멀쩡한 사람 같아’ 연애를 했던 친구들도, 오랫동안 나를 알고 지낸 친구들도 다들 내 가정사를 들으면 많이 놀라 했다. 생각보다 긍정적이고 밝았기 때문에....... 난 그 꿈을 꾸고 알았다. '엄마가 준 사랑이 내 안에 빼곡히 있었구나, 엄마는 내가 이 세상에서 좋은 것만 보고, 행복과 기쁨만을 누리며 살았으면 했고, 난 그런 엄마의 바람을 온전히 받았구나.'


엄마의 인생을 통한 바람이 내 몸 곳곳에 있음을 확인했다.


구운몽처럼 난 그 꿈을 통해 엄마가 살아 계실 때, 나에게 준 깊은 사랑을 깨달을 수 있었다. 눈을 뜬 아침부터 허겁지겁 엄마에게 전화를 했고, 엄마가 살아있음에 더없는 감사함을 느끼며 절대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평소 오글거려 절대 하지 못했던 사랑한다는 말을 엄마에게 할 수 있게 되었다.



가수 인순이도 말했다. "사랑한다는 말을 절대 과거형으로 하지 마십시오."




소중한 사람을 잊으려 할 때 구운몽이 깃드는 행운이 있길 바라면서 이만 글을 줄인다.







사진출처

http://egloos.zum.com/yuuns/v/5758730

https://gramho.com/media/1094881709723421536

http://woodrecipe.co.kr/product/%E3%84%B1%EC%9E%90%ED%98%95-%EC%B1%85%EC%9E%A5-%EC%84%B8%ED%8A%B8/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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