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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weetWillow Jul 23. 2018

‘별', 그 무한함이 주는 위안

홋카이도의 별에 대한 추억


홋카이도의 별을 동경하다

내가 인생에서 처음으로 본 일본 드라마는 ‘별의 금화(星の金貨, 1995)’이다. 대학원을 입학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전공이 일본지역학이니 일본에 대해서 많이 알아야겠고, 특히 좀처럼 안 들리는 일본어 실력을 어떻게 늘려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하던 때였다. 일본 드라마를 보기로 결심한건 그러니까 일본어 공부의 일환이었다.

당시만 해도 영화나 드라마는 대부분 비디오 가게에서 VHS 방식의 테이프를 빌려보던 시절. 특히 일본 드라마나 영화 등 일본 문화 컨텐츠는 아직 공식적으로 개방되기 전이라 대부분 해적판 테이프를 서로 돌려보곤 했던 때였다.

친구가 건네준 비디오테이프는 화질도 소리도 참으로 형편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화면이 아예 까맣게 되면서 소리만 겨우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지금 같으면 상상할 수 없는 퀄리티이지만 당시에는 이것만도 감지덕지였다.


일본 드라마 '별의 금화'


그렇게 처음으로 접한 일본 드라마 ‘별의 금화'는 홋카이도에 사는 말 못 하지만 아름답고 착한 고아 소녀와 의사인 두 남자의 삼각관계를 뼈대로 하고 있다. 세 사람이 홋카이도와 동경을 오가며 사랑의 숨바꼭질을 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던 것 같다. 지금 돌이켜보면 상당히 유치한 내용이지만, 당시 연애의 쓴맛을 경험하던 스물셋의 어린 여자에게는 꽤나 흥미로운 주제였을 터이다. 밤을 새워가며 모르는 단어는 사전을 찾아가며 며칠을 푹 빠져서 봤던 기억이 난다. 덕분에 짧은 기간에 일본어가 순식간에 늘었던 경험도 하게 된다. 나는 이후로 일본어 공부의 조언을 구하는 이들에게는 꼭 일본 드라마를 보라고 추천하곤 한다.


상세한 내용은 이제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내 마음을 온통 빼앗겼던 장면의 선명함은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셀 수없이 많은 별들. 그 아래에서 주인공 여자와 남자가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홋카이도의 어느 시골마을 그네에 앉아 도란도란 얘기를 나눈다. 도쿄로 가게 된 남자가 혼자 남겨질 여자를 위로하며 수화로 그림형제의 어여쁜 동화 ‘별의 금화'를 들려주는 장면이다. 아름답고 서정적인 동화의 묘사, 주인공들의 섬세한 표정 연기, 감성을 자극하는 배경음악. 이 모든 것을 내려다보고 있는 ‘홋카이도의 별'. 은하수가 흩뿌려져 있고 별똥별들이 간혹 날아가는 짙은 밤하늘. 질 나쁜 화질과 끊어지는 화면 속에 보이던 그 홋카이도의 밤하늘이 얼마나 아름답고 감동적이었는지, 나는 그때 다짐했다. 언젠가 꼭 홋카이도로 가서 그 별들을 봐야겠다고. 이후로 수많은 일본 드라마를 섭렵하였지만 내 기억 속에 가장 강렬하게 남아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별의 금화였다.


그로부터 세월이 흘러 취직을 하고 사회초년생의 바쁜 시기를 거치면서 인생의 동반자를 만났다. 두 명의 아이들이 태어났고 어찌어찌하여 일본에 정착하게 되었다. 어린아이들을 키우며 그렇게 삶은 조금씩 빠른 템포로 흘러갔다. ‘별의 금화'의 강렬한 홋카이도의 별에 대한 기억과 동경은 잠시 책갈피에 접혀 어딘가에 잠자고 있었다.

 

몇 년이 더 흐르고 아이들이 자라자 우리는 본격적으로 홋카이도의 가족여행을 시작하였다. 내 마음속에 잠자고 있던 홋카이도의 별들도 다시 빛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스물셋 어린 여자가 가졌던 홋카이도에 대한 동경은 이제 가족이 함께 공유하는 여행 프로젝트로 성장하게 되었다.  홋카이도의 이곳저곳을 누비며 북녘의 광활한 대자연과 대지의 생명력에 감탄하고 그 혜택에 감사한지도 어언 5년이 흘렀다.


내가 그토록 동경해 마지않던 홋카이도의 밤하늘의 별, 과연 만났을까?


홋카이도 캠핑여행을 준비하던 중에 인터넷에서 이름을 보자마자 당장 가야겠다고 생각한 곳은, 후라노富良野에 있는 ‘별에 손이 닿는 캠핑장星に手の届く キャンプ場'이다. 홋카이도의 별을 동경하는 내게 이보다도 더 매혹적인 이름의 장소가 있을까. 일곱 살 네 살 아이들을 데리고 홋카이도 전역 캠핑여행을 떠난 지 1주일쯤 되었을 때 우리는 드디어 이 캠핑장에 도착했다. 후라노의 평야와 민가들이 아름다운 산맥 아래 그림처럼 펼쳐지는 전경을 눈앞에 두고 있는 곳. 수많은 캠핑장을 다녀보았지만 이처럼 서정적인 전경을 가진 캠핑장은 드물 것이다.  

별에 손이 닿는 캠핑장


가족들이 모두 잠든 새벽, 화장실을 가려고 홀로 조용히 텐트 밖을 나섰다. 칠흑처럼 까만 밤. 캠퍼들은 물론 그 캠핑장에서 키우는 토끼와 양들도 모두 곤히 잠든 너무나도 고요한 밤이었다. 풀벌레 소리와 개구리 소리만 간간이 들려오고 있었다. 손전등을 켜려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바로 그때, 내가 오랜 세월 동경하던 홋카이도의 밤하늘을 처음으로 만났다.  


끝없이 펼쳐진 밤하늘 안에 숱하게 많은 별들이 어찌나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는지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이 문장이 얼마나 진부한 표현인지 안다. 내가 봤던 감동을 있는 그대로 전할 수 없는 나의 보잘것없는 문장력이 아쉬울 뿐이다. 그 반짝임이라는 것이 일상적으로 보던  별의 반짝임과는 확연히 달랐다. 별빛 이외에는 어떠한 인공적인 빛도 존재하지 않는 세상. 오직 별들과 나만이 이 넓은 우주 안에  존재하는 느낌이랄까.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이쪽으로 날아갔다 저쪽으로 도망치며 별들이 마치 내게 말을 거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별들이 무리를 지어 만들어내는 은하수, 은하수, 은하수….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표현할 수 없는 벅찬 감동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내가 살아있음이, 이 별들을 바라볼 수 있음이 감사했다.


별이 손에 닿는 캠핑장 해질 무렵 전경




유성이 쏟아지던 밤하늘

그 후로 다시 한번 나를 감동시켰던 홋카이도의 별은 몇 해 전 히다카日高라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만났다. 유성들이 유난히도 많았던 여름. 그중에서도 유성을 가장 많이 볼 수 있다고 천문학자들이 예상하던 날 밤이었다. 별똥별을 보는데 홋카이도만 한 곳이 있을까. 우리는 어둠이 내리기를 기다렸다가 아이들을 데리고 마을 뒷산을 올랐다. 겨울에는 스키장으로 변신하는 자그마한 산이다. 길 폭이 넓은 산등성이까지 차로 가서 적당한 곳에 주차를 한 후, 손전등을 들고 가파른 산길을 올랐다. 이 마을은 사슴과 여우, 너구리 등의 야생동물이 빈번히 출몰하는 지역이다. 보이지 않지만 이 산을 터전으로 삼아 살고 있는 동물들이 어딘가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을 것만 같았다. 심지어 약 50킬로미터 근방 터줏대감인 곰도 한 마리 살고 있는 곳이라 좀 긴장이 되었다. 만약을 위해 곰에게 경고 신호로 박수를 치면서 산을 올랐다. 워낙 작은 산이라서 금세 정상에 도착. 하늘을 올려다보니 역시 기대했던 대로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밤하늘과 무수한 별들이 우리들을 반겨주었다. 가져간 피크닉 매트를 깔고 다 함께 어깨를 맞대고 누웠다. 홋카이도 여름밤의 서늘한 밤공기가 느껴졌다. 혹여 추울까봐 아이들 몸 위에 가져온 담요를 덮어 주었다. 이윽고 가지고 온 손전등까지 모두 껐다.


아.. 우리 앞에 펼쳐진 저 끝을 알 수 없는 우주의 광경. 무수한 별들과 별들의 무리가 우리들을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다. 곧 시작된 별똥별 쇼. 별 하나가 날아가고 또 다른 별이 날아가고… 하나, 둘, 셋… 열,  나중에는 세는 것을 포기해야 할 정도로 많은 유성들이 하늘의 구석구석에서 쏟아졌다. 유성을 발견할 때마다 아이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마치 하늘에서 불꽃축제가 펼쳐진 것 같았다. 이전부터 별을 좋아해서 천문대도 다니고 과학관에서 천체투영관도 아이들과 자주 다녀 보았지만, 그런 것과는 결코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았다. 떨어지는 별을 가리키며 재잘거리는 아이의 손을 가만히 잡고 우리 앞에 펼쳐진 끝없는 우주를 바라보았다. 이 무한한 우주 안에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우리. 도대체 얼마나 많은 우연 끝에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삶을, 아이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지 않냐고 떨어지는 별들이 끝없이 속삭이고 있었다.


인공의 빛이 사라진 밤 별들의 속삭임에 귀 기울여 본 적이 있는 사람은, 그들의 이야기가 주는 감동과 위로가 얼마나 큰 것인지 알 것이다. 이 세상에 이처럼 아름다운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내가 기쁠  때든 슬플 때든, 벅찬 행복감, 혹은 깊은 상실감을 느낄 때에도 한결같이 그 자리에서 반짝이고 있을 무한한 존재. 그 ‘무한함’ 혹은 ‘영원함’이 주는 위안은 참으로 큰 것이다. 삶이 때로 나를 지치게 할 때 나는 그때 보았던 홋카이도의 별들을 떠올린다.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조금은 위로받은 듯 편안해짐을 느낀다. 누군가의 위로에 목말라하던 스물셋의 나에게도 이 별들의 감동과 위로를 전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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