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시간 비행 끝에 만난 보스턴
8월 말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표는 빨리 끊을 수록 좋다. 많은 유학생들이 미국으로 돌아가는 시기여서 비행기 티켓이 비싼시기이기 때문이다. 유학 서류 준비에만 정신이 없다가 입학이 확정된 6월쯤에 보스턴행 비행기표를 구하려고 하니 비행기 구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요즘은 한국 항공사에서 비행기 티켓을 구매한 경우 30일 이전에 취소하면 무료로 취소가 가능하니, 미리 티켓을 끊어놓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티케팅을 하면서 1년 오픈티켓을 끊느냐 편도 티켓을 끊느냐 하는 것이 고민스러웠다.
1. 편도와 왕복 티켓의 가격 차이가 크지 않다. (편도 티켓이 왕복 티켓의 거의 70~80% 가격)
2. 졸업을 위한 수업 수료에는 일 년이면 충분하지만, 졸업 후 미국에 더 머물고자 하면 일 년은 다소 빠듯하다.
공동학위제 프로그램 덕분에 면제되는 학점도 있고, 국내에서 미리 들을 수 있는 수업도 있었다. 총 18학점을 이수하면 졸업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다소 빠듯하긴 하지만 가을, 봄, 여름 학기까지 이수하면 12개월 안에 졸업이 가능했다. 그런데 떠나기 전의 마음으로는 졸업 후에 미국을 좀 더 여행해보고 싶기도 하고, 가능하다면 미국에서 일도 해보고 싶었다.
미국에서 석사를 졸업할 경우, 미국에서 합법적으로 구직활동을 할 기회가 생긴다. OPT (Optional Practical Training)인데, 관련 분야로 취업이 제한되지만 F-1 비자일 경우 12개월 정도 일할 기회가 주어진다.
고민 끝에 어차피 한국에 돌아와서 논문을 써야 한국의 대학원을 졸업할 수 있는 상황이어서, 결국 1년 오픈티켓을 끊었다. 떠나기도 전부터 내가 가진 다른 가능성을 내려놓는 느낌이 아쉬웠다.
이렇게 끊은 보스턴행 비행기는 LA 공항을 경유하는 비행기로 6시간을 대기해야 하는 일정이었다. 한국에서 보스턴으로 가는 직항이 없기 때문에 LA, 샌프란시스코, 시카고, 뉴욕 등 국내에서 많이 취항하는 도시에 내려서 미국 국내선으로 환승해야 한다. 뉴욕은 인기 취항지여서 환승티켓이 없었고, 시카고를 경유하는 티켓도 많지 않았다. 시카고행 경유 비행기는 대기시간이 2시간 내외로 샌프란시스코나 LA 경유 편에 비해 경유 시간이 짧은 것이 장점이었지만, 일정과 맞지 않아 나는 LA를 경유해 가기로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입국 심사를 해야 하기 때문에 2시간은 다소 빠듯한 환승시간이었다. 게다가 시카고 공항은 안개로 인해 연착이 잦은 공항이다. 시카고 공항을 경유하는 사람들은 최악의 경우 공항에서 잠을 자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시카고에서 환승하지 않기를 잘 한 셈이다.
나는 과거에 LA를 여행한 적이 있기 때문에 미국도 LA공항도 처음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묘한 구석이 있다. 같은 미국을 방문하는 것인데, 한달정도 사촌언니네 집에서 놀다와야지 하는 마음과 일년동안 살기 위해 마음이 참 달랐다. 과거에는 마냥 좋고 신기했는데 이번에는 어쩐지 막막한 기분뿐이었다.
학생 비자와 i-20를 발급받았으니 입국심사가 거부될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도 입국심사관이 입국 거부를 하면 난 어떻게 해야하지 이런 쓸데없는 상상을 하며 입국심사를 기다렸다. 나의 헛되고 불길한 상상과는 달리 입국 심사는 허무할만큼 간단히 끝났다.
인천공항이 너무 복잡했더래서 그런지 LA의 공항은 상대적으로 다소 한적하고 조용한 느낌마저 들었다. 해외로 가면서 환승 대기를 해 본 것도 처음이었다. 비행기 탑승까지는 아직도 4시간이나 남았다. 평소라면 그 긴 시간 동안 뭐하지? 뭘해야하지? 하며 당황할만큼 긴 시간 동안 그냥 멍하니 앉아서 비행기를 기다렸다.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목적지를 다들 잘 아는데, 나만 혼자 시장에서 길 잃은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걱정한다고 해결되지 않을 것을 알지만, 당장 가서 집은 어떻게 구할지, 처음 해보는 독립생활을 잘 꾸려나갈 수 있을 지, 하다못해 보스턴에서 찾으면 되는 수화물은 제대로 도착할까 하는 생각까지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마침내 밤늦은 시간이 되어서 보스턴 공항에 도착했다. 한국에서 출발한 지 24시간만에 긴 여정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보스턴의 로건 인터내셔널은 아주 큰 공항은 아니지만 그 주변 도시 지역 모두 이용하는 꽤 큰 국제 공항이다. 그럼에도 새벽이라 인적이 거의 없는 공항은 짐 찾는 곳도 뭔가 허술한 느낌이고, 공항이라기보다는 휑한 새벽 시간의 지방 소도시의 버스터미널 같은 느낌이었다.
커다란 이민가방 짐까지 찾고 나자, 막막함이 밀려들었다. 늦은 시간이라 한인 게스트하우스 주인분에게 공항 픽업을 부탁드렸었는데, 공항에 도착하고 나니 어떻게 연락해서 만날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지금이라면 유심만 바꾸면 되지만, 그때에는 휴대 전화가 호환이 되지 않을 때라, 아예 해지하고 간 탓에 당장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공중전화 앞에 서서 미리 전달받은 전화번호를 눌러보았다. 사무적인 미국인의 목소리가 그 번호는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멘트를 뱉어냈다. 불안한 마음에 공포가 더해질 때 즈음, 때마침 공항을 순찰하는 경찰이 나타났다. 경찰이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미국 전화번호는 3자리-3자리-4자리로 구성되어있었는데, 앞자리가 지역번호고, 같은 지역에서는 뒤의 7자리만 걸면 된단다. 지금이라면 카톡도 있고, 이메일도 실시간을 주고 받을 수 있으니, 어떻게든 연락이 될 것이다. 스마트폰이 없는 세계에는 이런 불확실성이 가득했다.
사실 공항을 나오면 바로 만날 수 있을만큼, 공항에 사람이 없었다. 민박집 주인을 만나자 처음 만난 사람임에도 오래 알고 지낸 지인이라도 만난 양 마음이 놓이기 시작했다. 내내 불안해하다가 만난 한국사람이 참 반가웠다. 차는 주황빛이 가득한 넓은 터널을 지나 어두컴컴한 보스턴을 달렸다. 사람이라고는 그림자도 없는 어두컴컴한 길거리를 보면서 괜히 웃음이 나왔다. 짐과 함께 부사히 보스턴에 도착했다! 한국을 떠나온지 24시간 밖에 안됐지만, 일주일은 된 거 같은 기분이었다.
일 년간 잘 부탁해, Bost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