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스레터 #21
바야흐로 9년 전, 독일에서 교환학생을 하며 친해진 친구들이 있다. 타국에서의 외로운 생활 속에서 같은 한국인의 존재는 큰 힘이 되었다. 우리는 주말마다 독일 맥주와 와인, 치즈, 젤리, 초콜릿 등을 종류별로 사서 음미하며 "우리 우정 뽀에버!"를 외쳤다. 그렇지만 막상 한국에 돌아오니 서로 바빠 연락의 빈도가 차츰 줄었다. 가끔 연락이 닿을 때면 "이제 누가 결혼해야 다 모일 수 있겠다"는 말을 우스갯소리처럼 하곤 했다.
그리고 그 일이 정말 실제로 일어났다. 20대 때 만나 우정을 쌓은 우리가 어느덧 다들 서른을 넘기고, 심지어 한 명은 결혼까지 앞뒀다. 청첩장 모임을 핑계 아닌 핑계로 다섯 명이 한자리에 모이기로 했다. 오랜만에 만나는 만큼 서울이 아닌 부산에서 1박 2일을 함께 보내기로 결정했다. 완전체 모임은 너무 오랜만이라 어색하면 어쩌나 걱정이 되는 한편, 다들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고 설렜다.
아, 한 가지 더 설레고 걱정되는 부분이 있었다. 부산에 가면서 웨이브락을 그냥 지나친다는 건 클라이머에게 있을 수 없는 일. 하지만 이 모임에는 클라이머가 없어 혼자 가야 했다. 혼클은 처음인데…! 걱정에 눈앞이 캄캄했지만 캐리어에 암벽화와 초크백을 알차게 챙겼다.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다. 나의 마음가짐만 빼고.
혼자서도 잘하는 '스스로 어른이'라도 혼클은 무서워
혼자 하는 일에는 저마다 난이도가 정해져 있다. 예를 들어 '혼밥'은 Lv. 1인 편의점 간편식부터 시작해서 햄버거, 분식 순으로 레벨이 높아지고 만렙인 고깃집, 뷔페까지 이어진다. '혼자 놀기'에는 쇼핑, 영화 보기와 같은 간단한 일부터 놀이공원 가기까지 단계적인 레벨이 있다.
그렇다면 혼자 하는 클라이밍은 레벨 몇 정도 될까? 단언컨대 분명 만렙일 거다. 인싸들이 모인 암장에서 혼자 하는 클라이밍은 왜인지 타인의 시선이 신경 쓰인다.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겠지만 일반적으로는 허들이 높은 게 현실이다. 그런 탓에 웬만하면 혼클을 안 하려고 몸부림치다 보니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웨락은 가고 싶고, 혼클은 하기 싫어서 친구들에게 함께 가자고 해볼까 싶기도 했다. 그러나 이 여행의 주인공인 예비 신부는 몇 년 전, 나와 함께 원데이 클래스를 들은 이후로 다시는 클라이밍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어떻게 클라이밍 입덕에 실패할 수 있는지 의문이지만 개인의 취향을 존중해야지 달리 방법이 없었다. 주인공을 빼고 일정을 잡을 수는 없으니까.
평일 오전 암장의 고요함에 반하다
친구들은 모두 서울로 떠나고 혼자 부산에 남은 다음 날, 캐리어를 끌고 관광객들이 줄 선 맛집에서 아점을 먹고 웨락으로 향했다. 혼밥도 잘하고, 혼자 여행도 잘하는데 혼클은 왜 이렇게 어렵게만 느껴지는지. 나조차 내 마음을 도통 알 수 없었다.
월요일 오전에 방문한 서면점은 한산했다. 캐리어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유독 크게 느껴질 만큼 조용했다. 사람이 북적북적해서 파이팅 넘치는 암장도 좋지만, 조용한 암장의 차분한 분위기를 더 좋아하는 나로서는 이 고요함이 마음에 들었다.
차분하게 접수하고 들어간 탈의실은 꽤 넓었다. 탈의실이 넓은 만큼 주말 같은 피크타임에는 많은 사람이 찾겠구나 싶었다. 부산에 사는 클라이머와 멀리서 찾아온 여행객들까지 더하면 무척 붐빌 것 같았다.
문제를 풀 때도 사람이 별로 없어서 1인 1벽을 즐기는 진귀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당연히 매트 위에 발을 올려두고 순서를 기다리거나, 동시에 올라가서 뻘쭘하게 한 명이 양보해야 하는 상황이 일어날 턱이 없었다. 살짝 어려운 문제를 만나도 얼마든지 여유롭게 풀 수 있었다.
종종 비수도권에 있는 암장으로 원정을 가면 문제가 너무 어려워서 힘들 때가 있는데, 웨락은 난이도 조절도 적절하게 느껴졌다. 아마 부산은 대도시인 만큼 더욱 다양한 클라이머들이 즐길 수 있도록 구성되는 게 아닐까 싶었다.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클라이밍 인구가 적은 지역의 암장일수록 자주 찾는 클라이머의 수준에 맞게 난이도가 상향 조정되는 듯하다. (a.k.a. 재야의 고수 또는 고인물)
어쩌면 이런 복잡한 이유가 아니라, 그냥 내 마음에 여유가 넘쳐서 더 잘 풀린 것일 수도 있다. 아무튼 붐비는 시간에 왔으면 웨락의 참맛을 느끼기 어려웠을 수도 있을 텐데 월요일 오전에 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웨락으로 원정을 떠날 계획이 있는 클라이머라면 조심스레 월요일 오전 방문을 추천해 본다.
오래된 퀘스트를 깼지만 아쉬워
오후 두 시쯤 지나자 슬슬 사람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고요했던 암장에도 적당히 활기가 돌았다. 다른 사람들이 문제 푸는 모습을 보기도 하고, 내 순서를 기다리기도 하자 시간이 금방 흘렀다. 해보기 전에는 어렵게 느껴졌던 혼클. 막상 정리해야 할 때가 되자 아쉬웠다. 내 앞에 놓인 문제에만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였는데! 조금 더 일찍 이 맛을 알았으면 좋았을걸.
그리고 한 가지 더 아쉬운 점이 있었다.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혼클 하면 새로운 친구들을 한 무더기 만들어서 돌아갈 줄 알았는데 대단히 큰 착각이었다. 내가 먼저 말을 걸어볼 걸 그랬나? 혹여 모르는 사람과의 대화를 싫어하는 클라이머도 있을 수 있으니, 새로운 친구를 기다리는 혼클족을 위한 무언의 약속이라도 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허무맹랑한 생각을 하면서 서울행 KTX에 몸을 실었다.
굳이 혼클을 가서 왜 친구를 만드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까 봐 사족을 덧붙이자면, 그 이유는 순전히 내가 쫄보 클라이머라서 그렇다. 친구들의 응원 없이는 용기가 나지 않아… 그런 의미에서 옒, 시느, 노새야, 꼬부랑 할머니 될 때까지 나랑 클라이밍 해 줄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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