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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진이 Nov 08. 2019

10년 후 우리의 삶은 행복할까?

내 경험에 의한, 내 생각에 의한, 아주 지극히 개인적인 관점의 이야기

10년 후 우리의 모습은 행복할까?


내 이십 대에는 군대, 시베리아 횡단 열차, 까미노 순례길 등 크게 몇 가지 터닝 포인트가 있었는데 그중 압권은 부르키나 파소와 캐나다 체류 경험이 아니었을까 싶다. 거의 1년 반 정도의 기간 동안 보고 들었던 것들은 기존의 시각과 사상과 편견의 틀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물론 100% 확신하고 장담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나름의 통찰력이 생겼다. 


최근에는 '10년 후 우리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해본다. 해외 경험뿐만 아니라 디자인 베이스에 불어를 공부했으며 사회복지사 2급 자격증도 있는 20대 끝물의 시각으로서, 아주 지극히 사적인, 그러나 또 아주 허무맹랑한 헛소리는 아닌 관점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부와 기회의 양극화 그리고 세대 간의 이질감


지난 11월 2일 재레드 다이아몬드라는 아저씨가 MBC 뉴스에 출연해 "(불평등은) 국가의 잠재력을 손상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매우 큰 악영향을 준다"라고 언급했다. 


"하나님이 하늘나라에서 인간을 찍어낼 때는 크게 두 부류의 공장에서 생산하는데 한 부류는 시간에 쫓겨서 대충 빨리빨리 대량 생산해서 찍어내는 공정과 온갖 정성과 사랑을 쏟아부으며 스페셜 리스트들을 만드는 공정이 있다" 한 교회 목사님이 설교시간에 하신 이 비유가 그렇게 마음에 와 닿더라.


'어떤 환경에 태어나서 어떤 부모를 만나느냐?'가 출세가도를 결정짓는다는 말은 시대와 사회 체제를 초월하는 불변의 법칙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은 참 불공평하다. 세상에서 가장 불공평한 것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그 자체다. 부르키나 파소의 대부분 가정이 그렇듯이, 가난한 집안에서 여자로 태어나, 여자라는 이유로 제대로 된 교육조차 받지 못하고 고속도로에서 평생 망고만 팔 수밖에 없는, 살면서 다른 옵션은 단 한 번도 생각해볼 수 없었던 그들의 삶과 캐나다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그냥 정부에서 미취업자들에게 주는 보조금으로 대마초나 사서 피면서 삶에 대한 별 고민이나 노력도 없이 머릿속에는 클럽과 댄스파티와 페스티벌과 카니발 밖에 없는 캐네디언들의 삶이 평등하다고 할 수 있을까? 

 

와가두구 중심가 모습. 사진 | 픽사베이

부르키나 파소 구석구석에서 그 깡촌 출신들이 사돈에 팔촌까지 전재산 다 끌어모아서 현지 최고인 와가두구 종합 대학에서 법학과를 졸업했어도 외국인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게 베스트 초이스일 수밖에 없는 그들의 스트레스와 고달픔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반면 캐나다 퀘벡에서 태어나서 학생이라는 이유로 정부 보조금 받으면서, 아기가 있다는 이유로 또 정부 보조금을 받아가며 살아가는 이들도 있다.


부르키나 파소나 퀘벡이나 같은 언어를 쓰고 훨씬 많은 스트레스를 받으며 남들보다 몇십 배의 노력을 해도 신분증에 찍혀있는 내 나라 때문에 기회 자체가 닫혀있다는 현실이 참으로 아이러닉 하다. 애초에 태어날 때부터 내가 부모를 선택할 수도 없는 노릇인데 말이다.


물론 한국 내에서는 복지 예산을 두고 높으신 분들끼리 서로가 박 터지게 싸우지만 내 기준으로는 대졸에 애플 워치 끼고 다니면서 직장생활을 하든지 단기 아르바이트를 하든지 월 $1000 이상 벌 수 있는 환경이면 70억 인구 중에 거의 상위 10%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인 경험상, 그만큼 대부분의 외국에서는 대학교 진학 비율이 한국처럼 높지가 않다. 부모 형편에 따라서 느껴지는 사회적인 불합리성이 우리끼리는 엄청난 간극으로 느낄 수 있어도 글로벌 스탠드에서 보면 적은 간극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나도 흙수저고 한국 사회 시스템 곳곳에서 불합리성을 느끼지만 말이다...)


퓰리처상을 받았다는 그 똑똑한 아저씨와 그냥 평범한 파주 청년인 내가 느끼는 것이 비슷하다는 소리는 분명 누군가가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또한 불행하게도 이 간극이 쉽게 좁혀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부와 기회의 양극화는 갈수록 더욱 심해질 것이다. 이건 파이 싸움 문제이기 때문이다. 


피부에 와 닿을 수 있는 극단적인 비유를 하자면 부르키나 파소만 해도 수많은 국민들이 각종 질병에 고통을 받고 있다. 적시적 때에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해 세상을 떠나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들이 불쌍하다고 해서 어느 날 갑자기 관광비자로 한국에 있는 외국인들에게도 내국인과 똑같은 건강보험료 혜택을 제공하겠다고 정부가 발표를 한다면 이게 얼마나 황당한 일이겠는가? 세상이 보다 평등해지려면 내 살점을 때어서 이웃에게 나누어 줘야 하는데 누가 그걸 좋아하겠냐는 말이다. 


캐나다나 북유럽 같은 복지 선진국들이 이러한 맹점들을 보완하기 위해 무료 의료 혜택과 각종 정부 보조금 지원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특히 캐나다 퀘벡의 경우, 무료라는 이유로 하염없이 긴 대기 시간과 저급한 의료 서비스는 과연 90%의 서민을 위한 서비스가 맞나 싶을 정도로 방치되고 있다. 마약 중독인 부모가 퀘벡 정부로부터 육아 양육 지원 보조금을 받아 그 돈으로 대마를 구매하며 아이는 방치하는 일은 그곳에서 더 이상 스페셜 케이스가 아니라고 본다.


사진 | 픽사베이

(청년 수당 등 여러 싸인들을 봤을 때, 이미 그 길로 접어든 듯 하지만...) 만약 한국이 캐나다나 북유럽 같은 복지 선진국들의 모델을 따라간다면 우리는 과연 어떠한 사회적 현상을 겪게 될까?


부의 양극화보다 더 큰 문제는 세대 간의 이질감이 더 깊어질 것이라는 점이다. 2019년인 현시점도 20대와 50대의 견해 차이에서 오는 간극이 분명히 있고 이에 따른 사회적인 문제가 있다. 머지않은 미래, 그냥 가만히 앉아있으면 정부에서 젊으니깐 돈 주고, 학생이니깐 돈 주고, 아기 낳았다고 돈 주는데 누가 고생하면서 노동을 하고 싶겠는가? 열심히 노동을 해도 어차피 정부한테 텍스로 다 빼앗길 것이라면 그냥 정부에서 용돈 받으면서 근근이 살아가는 게 나을 것이다. 다시 한번 주관적인 관점임을 강조하지만 정부의 복지 예산 확대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만약 우리의 다음 세대가 지금의 캐네디언 마인드로 살아간다면 우리 앞 세대가 그 꼴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까? 싶기도 하다. 사실 이 부분이 내가 가장 염려스러운 부분이다. 부르키나 파소와 비슷한 환경에서 청춘을 보냈던 우리 부모 세대와 지금 캐네디언들이 누리고 있는 복지혜택을 누릴 우리 다음 세대에게 하모니를 바라는 것 가체가 맞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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