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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장국

by 오롯한 미애

하루가 끝을 향해 가는 자정즈음 둘째 딸이 현관문 번호키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학교수업을 마친 후 저녁 무렵 시작하는 알바까지 끝내고서 시름시름 앓는 소리를 내며 현관문을 열고 들어 왔다.

딸은 내가 있던 안방으로 들어와서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로 침대에 몸을 던졌다. 나는 널브러지듯 누워있는 딸을 보며 여느 때 같았다면 얼른 옷부터 갈아입고 씻고 오라고 했을 것을 오늘은 유난히 지쳐 보이는 딸의 모습을 보니 재촉하고 싶지가 않았다. 침대 위에서 한참 전부터 자고 있던 쵸코의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딸은 '초코야, 누나 너무 피곤해' 하며 나에게 하고 싶었던 넋두리를 알아들을 리 없는 초코에게 에둘러 투정하듯 얘기했다. 초코는 듣는 둥 마는 둥 연신 딸아이에 얼굴에 침 범벅을 하며 핥아 댔다. 나는 안 쓰러운 마음에 조용히 주방으로 가서 여느 때처럼 저녁을 안 먹었을 것 같아서 서둘러서 미리 끓여놓은 시금치된장국을 작은 냄비에 덜어 끓이기 시작했다. 오징어젓도 좋아하니 내놓고, 떡갈비도 혹시나 해서 미리 구워놓았는데 잘한듯했다. 냉동실 문을 열고 아침에 얼려둔 밥 한 공기를 꺼내서 전자레인지에 넣고 데웠다.

깍두기도 덜어서 접시에 담고 아몬드를 넣고 볶은 멸치볶음도 꺼내놓았다. 사실 멸치볶음은 딸아이가 그리 좋아하지는 않지만, 너무 단출한 것 같아 가짓수를 채우려고 내놓은 것이다. 밑반찬들은 여러 종류가 있지만, 냄새에 예민하고 입맛이 까다로워 편식이 있는 둘째 딸은 먹는 것이 한정되어 있다.

한 날은 점심상차림으로 배추김치와 무생채, 깻잎나물, 오이지무침, 미역냉국, 시금치나물, 그리고 불고기를 내놓았는데 둘째 딸은 오로지 불고기만 먹었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이런 딸에 편식이 걱정되어서 부추와 깻잎을 종종 산다. 이것들을 깨끗이 다듬어서 청양고추와 함께 오징어나 건새우를 넣어 바삭하게 부추전을 부쳐 내곤 한다. 그러면, 이 메뉴는 고기 못지않게 잘 먹는다. 웬만하면 무던히 잘 먹는 큰딸은 말할 것도 없이 좋아한다. 나는 이렇게 해서라도 둘째의 유별난 입맛을 평범하게 바꾸려고 다양한 방법을 썼다. 야채를 좋아하지 않아서 먹일 방법을 찾다 보니 이렇게 전으로 하면 그나마 바삭한 기름에 어우러진 야채와 양념장 맛에 잘 먹는다는 것을 다양한 시도 끝에 알아냈다. 하지만, 24살 성인이 된 지금, 이러한 여러 가지 나의 노력이 무색하게 입맛이 어릴 때와 비교해서 크게 바뀌지 않아서 안타깝다.

냄비에서 뜨거운 김을 내며 보글보글 끓고 있는 된장국을 식탁에 옮기고 전자레인지에서 데워진 밥을 꺼내며 딸아이를 불렀다.

아무런 대답이 없는 것을 보니 그새 잠이 든 모양이다. 나는 한번 더 부르며 '뜨끈한 된장국에 밥 한 공기 훌훌 말아먹으면 배도 부르고 피곤도 확 풀릴 거야'하며 재촉했다.

그제야, 흐물한 몸을 이끌고 식탁의자에 앉아서 김이 나고 있는 된장국에 코를 대며 맛있는 냄새 라며 기운을 차린다. 행여나 민감한 입맛에 배가 고파도 안 먹겠다고 숟가락을 내려놓으면 어쩌나 내심 걱정을 했는데 걱정이 무색해졌다.

피곤한 몸을 된장국 냄새가 이겼는지, 숟가락질이 빨라졌다.

앞에 앉아서 지켜보는 나도 순간 한 숟가락 먹어볼까 싶었다. 이미 양치까지 해서 그냥 내일 먹어야지 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옆방에서 퇴근하고 와서 잘 준비를 하던 큰딸도 '아, 나도 먹고 싶다. 냄새가 너무 좋아'한다. 그래서, 와서 먹으라고 하며 얼른 네 것도 준비해 준다고 하며 일어나니, 크게 말리며 저녁도 회사에서 먹었고, 이제 잠자리에 들려고 한다며 큰딸 역시 내일 먹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동생에게 얼른 먹어보라며, 된장국 한 그릇 먹으면 피곤이 싹 풀릴 거라는 의사의 약처방과 같은 확신에 찬 한 마디를 건넸다.

코를 자극하는 구수한 냄새에 잠시 소란을 피웠지만 나와 큰딸은 다시 둘째 딸의 식사에 집중했다.

딸은 된장국을 크게 한 숟가락 퍼 뜨거운 김을 불고 나서 한 입 먹더니, '아, 엄마 된장국이 최고야'하며 나지막이 독백 같은 말을 했다.

순간 큰딸이 그 모습을 보더니 '그지, 엄마 된장국을 먹으니 피곤이 싹 풀리지? 하하'하며 자기가 먹은 듯, 흡족해했다.

그러고는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먹고 싶은 음식을 고르라 하면 '엄마밥'이라며 생각도 못한

가슴이 꽉 차오르는 말을 했다. 순간 말을 잇지 못하고 짧은 찰나이지만 나 자신을 되돌아봤다.

딸에게 내가 그런 생각이 들 만큼에 자격이 되었던가, 부족했다면 앞으로 채워나가리라.

반면, 표현 못 할 뿌듯함이 풍랑처럼 몰려와서 나를 휘둘렀다.

둘째 딸도 함께 호응하며 한 치의 의심도 없다는 듯 바로 다음 숟가락을 국으로 향했다.

그런데, 서너 숟가락 뜨던 딸아이가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거짓말처럼 구슬 같은 눈물방울을 뚝뚝 흘리는 것이다. 나는 순간 당황해서 오늘 밖에서 내가 알지 못했던 큰일이 있었나 싶어서 이유를 물었다. 딸은 순식간에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미소를 머금으며 웃다가 또 울다가 이렇게 말했다.

'오늘 수업도 힘들고 알바도 손님이 무지 많아서 바쁘고 지쳤는데 집 와서 엄마 밥 먹으니까 갑자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어.'

순간 내 가슴에 따뜻한 파장이 번졌다. 그 마음 나도 알 수가 있어서 공감이 갔다. 나도 어릴 적 낯선 곳을 다녀오거나 유난히 힘든 하루를 보내고 나면 부랴부랴 집으로 가고 싶었다. 허겁지겁 도착해서 엄마를 보면 힘이 났고 더불어 따뜻한 밥상 앞에 앉으면 비로소 평안을 돼 찾았음을 느꼈다.

나에게 엄마와 집은 산소 같은 존재였다.

평소에는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내 옆에 늘 당연히 있고 나도 그 안에 속해 있어서, 그 소중함과 가치조차도 잊고 지내고, 흔해서 귀함을 모르는 망각의 대상.

그러나, 일탈을 하여 존재의 부재를 느끼는 순간 지구를 떠나 우주 어딘가에서 헤매는 느낌, 나 자신이 드 넓은 우주 한가운데 어두운 곳에서 둥둥 떠다니는 두려움과 상실감을 맛보게 된다.

진작에 이런 기분들을 미리 알고 있었다고 해도 막상 맞닥트려져야만 와닿는 감정일 것 같다.

딸아이의 지금 이 감정들을 나도 알기에 작은 위로에 말을 건넬 수 있었다.

'그래, 맞아. 엄마도 옛날에 그랬었어. 그 마음 엄마도 잘 알아. 그러니 많이 먹고 쉬고 다시 힘내. 엄마 밥이 이렇게 큰 역할을 하네. 기뻐'

하며 울어서 엉망이 된 딸의 눈물을 닦아줬다.

그리고는, 뜨거운 국을 먹으며 울기까지 하여 후끈해진 등을 말없이 쓰다듬어 주었다.

여느 때보다 유난히 길고 무거웠던 하루를 지내고 비로소 잠자리에 누운 딸은 어떤 생각을 하며 잠을 청했을지 생각해 보았다.

딸들이 세상의 빛을 볼 때부터 나는 항상 그 곁에 함께했고 때론 눈에 보이지 않아도 느껴지는 불멸의 존재가 되었다. 항상 곁에 있기에 나의 존재감조차 딸들이 잊고 지낸다 해도 나 역시 진심은 언제나 딸들을 향해 있고 딸들도 가슴으로는 느끼고 살아갈 것이다.

다만 바람이 있다면 딸들이 오늘처럼 지친 하루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몸과 마음을 풀어주는, 도드라지지 않고 묵묵하게 위로해 주는 된장국 같은 엄마로 기억되고 싶다. 세상에게 상처받은 속을 따뜻하게 쓸어내려주는 그런 슴슴하고 뜨끈한 된장국 같은 엄마.

세상에 수많은 다채롭고 화려하고 유별난 음식들을 찾아 먹어 보고 돌고 돌아서 마지막에 생각나서 꼭 찾게 되는 소박하지만 깊이가 느껴지는 묵직한 맛의 된장국. 흔해서 끌리지 않던 그 맛이 화려한 맛에 이끄리다 본능에 이끌리듯 끝내 돼 찾게 되는 그 맛, 엄마의 따뜻한 품속.

오늘 둘째 딸에게 나의 된장국이 그런 존재가 되었고, 나의 따뜻한 품이 위로가 되어주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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