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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콜릿상자 Mar 17. 2023

교과서 비닐 포장의 추억

5살 둘째의 책을 싸 주며, 추억 한 스푼



얼마 전, 5살 둘째가 입학한 유치원으로부터 메모 한 장이 왔다.


          

이름 : 000

책 제목 :
<난 토마토 절대 안 먹어>  (지은이 : 로렌 차일드 / 출판사 : 국민서관)   
           
 <초록똥을 뿌지직>  (지은이 : 윤아해, 보린, 유다정 / 출판사 : 사파리)


도서에 반명과 이름을 '꼭' 적어주시고 비닐로 겉표지를 튼튼하게 포장하신 후 3월 17일(금요일)까지 보내주세요. 도서는 같은 반 아이들과 도서대여 활동을 한 후 수료 시에 돌려보내드립니다.



5살 한 반에 20명의 아이들이 있는데 아이들마다 2권의 책을 구매해오게 해 1년 동안 서로 빌려 읽게 하는 제도란다. 그것만 해도 벌써 40권이니, 참 괜찮은 아이디어다. 내 책을 친구들이 소중히 읽어주는 기쁨을 누리면서 책과 조금 더 친해질 수 있는 기회를 선사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내 눈을 사로잡았던 건 다름 아닌 이 문구였다.


'비닐로 겉표지를 튼튼하게 포장하신 후'



비닐로 포장?!




맞다, 옛날에 나도 맨날 책 쌌었지!


실로 오랜만의 기억이다.






초등학교 고학년 무렵부터이던가, 새 학기가 되어 교과서를 받은 후 제일 먼저 하던 일은 항상 똑같았다. 바로 학교 앞 문방구에 뛰어들어가 책 포장 비닐 사기! 그걸 그때 정확히 뭐라고 불렀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여하튼 나는 '책 싼다'는 표현을 썼다.



00야~ 우리 집 가서 같이 책 싸자!!


신나게 우리 집에 도착한 나와 친구는 마치 재단사가 된 듯 신중하게 포장 비닐 길이를 재어냈다. 그다음 우리 집에서 제일 잘 드는 가위를 가져와서는, 정확한 위치에 가위를 가져다 댔다. 이때 가위 담당자가 아닌 비닐 담당자는 반드시 비닐을 팽팽하게 잡아당기고 있어야 한다. 까딱 잘못해서 방향이 조금이라도 틀어지면 대략 낭패이므로 엄청나게 집중해야 한다. 윗변은 길고 아랫변은 짧게 자른다던지 아예 짤뚱하게 잘라버리면 그 비닐은 생짜로 버리고 다시 재단해야 하는 일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면 가위 담당자는 심호흡을 한 후 '쉬익~' 하고 일자로 비닐을 그어 나갔다. 그 작업은 마치 신학기 첫날 '책아, 한 학기를 잘 부탁해!' 하고 고사를 지내는 것 마냥 나로서는 참으로 중요한 일이었다. 평범하던 국어, 수학, 도덕 교과서가 빤딱빤딱하는 비닐 옷을 입고 나면 뭔가 특별해져서 애정과 애착이 마구 생기는 것이었다. 아! 그리고 그 안에 내가 좋아했던 서태지와 아이들 사진, 손지창, 이현우 사진까지 끼워 넣어야 책 싸기의 진정한 완성이다. 이 세상에 둘도 없는 나만의 교과서가 탄생한 것이다. 이 소중한 나만의 교과서를 반듯하게 펼치며 시작되는 나의 새 학기는 지금 생각해 봐도 설렘 그 자체였다.





비닐을 구하는 것도 쉽지 않더라. 마트에도 다이소에도 원하는 비닐이 없어 알파문구에 가서 한 마를 겨우 구했다.



어느 날 갑자기 유치원에서 날아온 메모 한 장 덕에 그동안은 까맣게 잊고 살아온 추억 한 장면이 떠오르다니. 역시 아이를 키운다는 건 한참이나 잊고 있었던 그 시절의 나를, 그때의 추억을 한번 더 되새길 수 있는 기회를 얻는 일인가 보다. 그러고 보니 첫째가 3학년이 되도록 교과서를 한 번도 싸 준 적이 없다. 아니, 그럴 생각도 못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해 받아온 교과서들을 보니 우리 때랑 다르게 표지도 너무 예쁘고, 뭔가 책을 건드리는 것보다 안 건드리는 것이 훨씬 낫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몇 권이라도 싸 줄 걸 그랬나 싶다. 어? 시계를 보니 벌써 자정이다. 어서 내일 둘째가 가져가야 할 책들을 싸야겠다. 빤딱빤딱하게, 학창 시절 내 교과서를 쌌을 때처럼 예쁘게 반듯하게 기분 좋게 싸야겠다. 오늘 꿈에는 어쩌면 설렘 가득했던 나의 새 학기, 새 교실의 풍경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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