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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진철 Oct 19. 2019

체온을 기억하는 일

우리가 바꿀 수 있는 운명에 대해서

테드 창의 단편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은 시간여행을 소재로 한다. 바샤라트는 과거 혹은 미래로 이동할 수 있는 문의 관리인이다. 그는 손님들에게 말한다. 당신이 과거를 방문할 수는 있지만 과거를 바꿀 수는 없을 거라고. 결국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압바스는 자수성가한 상인이다. 그는 부유하지만 돌이키고 싶은 과거를 가지고 있다. 과거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실낱같은 희망을 찾아 그는 시간의 문으로 들어간다.


영화 <어라이벌>은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원작으로 한다. 지구에 갑자기 등장한 우주선에 세계는 당혹스럽다. 그들의 의도는 무엇인가. 전쟁인가 친교인가. 루이스는 외계 생명체와의 소통을 위해 소환된 언어학자다. 그는 외계의 언어를 배우고, 이를 통해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둘 모두 운명에 대한 이야기다. 주인공들은 각각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문을 발견하거나, 미래를 읽는 능력을 갖게 된다. 미래를 알 수 있다면 우리는 운명을 바꿀 수 있을까. 압바스가 과거로 돌아간 이유는 아내의 죽음을 되돌리고 싶기 때문이다. 어쩌면 사고 현장으로부터 그녀를 떨어뜨려 놓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녀는 죽은 게 아니라 다른 곳에 있을지도 모른다.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아내를 구하기 위한 그의 시도는 실패로 끝난다. 운명은 바꿀 수 없는 것일까.

바샤라트는 말한다. 과거나 미래를 바꿀 수는 없지만, 그것들을 더 잘 알게 될 수는 있다고. 언어학자 루이스는 자신의 딸이 불치병으로 죽게 될 것임을 알게 된다. 남편이 자신을 떠나게 될 것도. 하나하나가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다. 그렇다면 애초에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것이 낫지 않을까. 루이스는 미래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를 알면서도 그 모두를 받아들인다. 이것은 체념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인간은 어리석어서 상실에 대한 두려움 없이는 무언가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 영원히 그 자리에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소중한 것들을 함부로 다룬다. 그들의 예상치 못한 상실과 후회가 우리의 예정된 운명이다.


미래를 본다는 것은 무엇과 이별할 지 알게 되는 것이다. 다가올 이별을 피하는 대신, 루이스는 지금 최선을 다해 그를 사랑하는 것을 선택한다. 다가올 운명을 아는 사람만이 지금 이 순간에서 눈을 떼지 않고 사랑하는 이의 웃음을 새길 수 있다. 마치 슬로모션처럼 소중한 순간들을 꾹꾹 눌러 담을 수 있다. 한 움큼의 사랑이나마 손에 더 쥐어줄 수 있다. 우리는 상실을 피할 수는 없지만, 후회는 피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운명이다.


먼 훗날 남편이 될 동료 과학자 이안을 처음 안으며 루이스는 말한다. 당신 품이 이렇게 따뜻한 줄 잊고 있었어. 당신이 누군가의 체온을 기억한다면 당신의 운명은 이미 바뀌어 있는 것이다.



<Arrival>,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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