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화로운 저녁시간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는 아이들의 영어문제집 채점을 하고 있었으며 아이들은 사회 수행평가 준비라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역사를 서로 읽어주며 문제를 내고 있었다.
아테네의 직접 민주주의에서부터 현대의 민주주의까지 도달하기 위한 역사적 과정들을 암기해서 발표하는 방식으로 평가를 치른다기에 그 공부를 하는 모양이었다.
사실 민주주의의 역사는 세계사 속에서 꽤 큰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인류의 발전과 그 궤를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대의 민주주의는 기원전 500년경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시작되었으며 시민들이 법률에 직접 투표했다. 바로 처음이자 마지막 직접 민주주의였다.
이후 고대 로마에서는 국민을 대표하는 지도자를 선출하는 방식의 공화제가 도입된다. 로마가 멸망한 뒤에 도래한 중세 시대는 왕과 봉건 체제가 확립되면서 민주주의는 오히려 암흑기를 맞는다. 다만 1215년 영국의 대헌장과 같이 왕권을 제한하는 제도가 시행되며 일부 사상의 명맥만 유지될 뿐이었다.
그러다가 근대에 이르러서는 1770년대부터는 격변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미국 독립혁명으로 세계 최초의 대통령제가 탄생했으며 그와 더불어 유럽에서는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 왕권이 무너지는 일도 생겼다. 이 혁명들로 인해 시민들은 분연히 일어나 자신들의 권리와 자유, 투표권을 요구했다.
산업혁명이 시작되고 산업이 발전해 나갈 때 영국에서는 보통 참정권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차티스트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런 격동의 시기가 지나 현대인 1900년대가 되어서는 세계 대전으로 인해 많은 부분들이 바뀌었고 일부 독재국가를 제외하고는 성인 남자뿐만 아니라 여성들에게까지 투표권이 확대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민주주의가 정치제도로 채택되었고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었다. 그렇게 민주주의는 발전되어 왔다.
그 밖에도 삼권 분립, 지방 자치, 연방제, 내각제 등 다양한 용어에 대해서도 의견을 나누는데 제법 어려워 보였다. 그러면서 외우기 쉽지 않겠다며 아이들에게격려를 해줬다. 그렇게 아이들은 할 일을 마무리한 뒤자러 들어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평화로운 일상의 한 조각이 채워지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상상도 하지 못했던 충격적인 소식을 인터넷으로 접했다. 사실 영화에서나 볼 법한 일들이었던지라 현실감은 솔직히 전혀 느끼지 못했다. 21세기 우리나라에서 생기리라고는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일이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뉴스를 보면서 각본이 잘 짜인 드라마를 보는 느낌이 잠시 들었다. 1981년 생인지라 이런 상황은 역사와 영화, 책으로만 이 단어에 대해 경험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런 생생한 현장들을 눈으로 보니 만감이 교차한다. 당연히 황당하며 두렵고 심란하다. 특히 포고령이라고 내놓은 자료를 읽어 보니 국민의 기본권을 아무렇지도 제한하려고 했던 예전 그 시절에 살던 분들은 어떤 기분이었을지에 대해 조금이나마 공감할 수 있었다.
계엄사령부 포고령(제1호)
자유대한민국 내부에 암약하고 있는 반국가세력의 대한민국 체제전복 위협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고, 국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2024년 12월 3일 23:00부로 대한민국 전역에 다음 사항을 포고합니다.
1. 국회와 지방의회, 정당의 활동과 정치적 결사, 집회, 시위 등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한다.
2.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거나, 전복을 기도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하고, 가짜뉴스, 여론조작, 허위선동을 금한다.
3.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
4. 사회혼란을 조장하는 파업, 태업, 집회행위를 금한다.
5. 전공의를 비롯하여 파업 중이거나 의료현장을 이탈한 모든 의료인은 48시간 내 본업에 복귀하여 충실히 근무하고 위반 시는 계엄법에 의해 처단한다.
6. 반국가세력 등 체제전복세력을 제외한 선량한 일반 국민들은 일상생활에 불편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조치한다.
이상의 포고령 위반자에 대해서는 대한민국 계엄법 제9조(계엄사령관 특별조치권)에 의하여 영장 없이 체포, 구금, 압수수색을 할 수 있으며, 계엄법 제14조(벌칙)에 의하여 처단한다.
2024.12.3.(화) 계엄사령관 육군대장 박안수
앞으로 역사책 속에 영원히 박제되어 남을 이 충격적인 사건은 일단락된 듯하지만 아직도 진행 중이다. 이 서스펜스 영화가 어떤 식의 결말로 마무리될지 관객들은 정말 궁금하다. 그 누구도 예측가능한 범위의 일이 아니었으니까. 현재 시점에서 가장 다행스러운 점을 꼽자면 내 자유가 무자비한 권력에 의해 탄압받지 않게 되었으며 영장도 없이 잡혀가서 구금되어 처!단!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아닐까?
그동안 너무나도 당연하게 느껴져서 중요한지도 몰랐던 자유에 대해 그 소중함을 잠시나마 뼈저리게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음에는 분명하다. 오늘 하루 자유의 공기가 너무도 달콤하다는 사실에 감사하게 되는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