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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시코기 Feb 19. 2021

사랑의 불가항력적 회귀(回歸)

<콜드 워> 2018, 파벨 파블리코브스키 감독




민속 예술단의 음악 감독 '빅토르'는 오디션을 보던 중 한 지원자 가수 '줄라'에게 강렬한 인상을 받는다. 곧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지지만 시대는 두 사람의 사랑을 내버려 두지 않는다.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두 개의 심장, 네 개의 눈이
낮에도 밤에도 눈물을 흘리네
검은 눈동자들이
눈물을 흘리네
두 사람이 함께할 수 없기에

곡 <심장> 중


당연한 말이겠지만 이 영화는 사랑 영화다. 지독하고 애틋하게 불타오르다가도 일순간 사그라드는, 그리고 다시 타오르고야 마는 사랑에 대한 영화다. 영화는 직접적인 제목 "콜드 워(Cold War)", '냉전'의 개념을 단순히 영화의 시간적 배경으로만 두지 않고 그것을 빅토르와 줄라 두 사람의 사랑으로 확장시켰다. 리뷰에 앞서 먼저 냉전이라는 개념을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냉전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생겨난 개념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두 진영으로 나뉘어 경제, 외교, 정보 등을 수단이자 무기로 국제적 대립을 이어갔다. 냉전의 '냉-(Cold)'은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 전쟁이라는 의미에서 붙은 글자다. 당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두 진영은 상대의 존재를 통해 자기 집단의 정체성을 더욱 확립하고 고취시켰다. 비록 적진이나, 상대 진영이 존재함으로써 역으로 자기 진영의 위치와 의의가 더욱더 견고해지는 메커니즘인 것이다. 이 아이러니한 대비 개념은 영화 속 빅토르와 줄라 두 사람의 사랑으로 환원된다.


1949년 폴란드, 빅토르는 민속 예술단의 단원을 모집하러 다니던 중에 줄라를 만나게 된다. 동료의 말대로 노래를 특출나게 잘하는 것 같진 않지만 그녀의 매력을 한눈에 캐치한 그는 그녀에게 호감을 표하고, 급속도로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1952년, 국가의 간섭과 억압을 참을 수 없던 그는 이를 피해 파리로의 도피를 계획한다. 그는 사랑하는 줄라에게 함께 도피할 것을 제안하지만 망설이던 줄라는 끝내 만나기로 한 장소에 오지 않는다. 결국 빅토르는 혼자 망명길에 나서고 파리에 자신의 새 터전을 만든다. 그렇게 헤어지는 것 같던 둘은 2년 뒤인 1954년 파리에서 재회한다. 영화는 이런 식으로 1949년부터 1964년까지, 15년의 긴 세월 중 두 사람이 이별과 재회를 하는 일부 순간들을 연속적으로 담아낸다. 영화 전체를 볼 때 이 영화는 비교적 긴 시간을 다루지만, 우리가 이 영화에서 볼 수 있는 건 이들이 함께 보내는 찰나의 시간들이다. 운명이, 시대가 함께할 수 없도록 만들어 두 사람은 이별과 만남을 반복하게 되지만 이들은 그 모든 순간에, 함께 있지 못하는 순간까지도 서로를 열렬히 사랑하고 또 사랑한다.




시계추가 시간을 죽였네


두 사람의 사랑은 폴란드에서 시작해 여러 경유지를 거친다. 베를린, 파리, 유고슬라비아를 거쳐 다시 끝은 폴란드다. 첫 번째 재회, 줄라가 빅토르를 찾아간다. 줄라는 자신이 왜 그와 떠날 수 없었는지 그 이유를 그에게 털어놓는다. 두려웠다는, 자신과 당신은 처지가 다를 수밖에 없다는 말. 둘은 아쉬운 이별의 말미에 뜨거운 키스를 나누지만 헤어질 수밖에 없다.  다시 재회, 빅토르는 위험을 무릅쓰고 유고슬라비아로 순회공연 온 줄라를 보러 간다. 그는 줄라가 자신을 알아볼 수 있도록 관중석의 정가운데에 앉지만, 1부가 끝나고 끌려가 크로아티아로 쫓겨난다. 줄라는 2부 공연 중에 빅토르가 없는 빈 관중석을 쓸쓸하게 쳐다본다.


그리고 또다시 재회, 이탈리아인과 결혼한 그녀는 더이상 폴란드에 갇혀있지 않아도 되고, 빅토르는 그런 그녀가 프랑스에서 데뷔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러나 줄라는 이 과정에서 빅토르의 이면을 보고 그에게 거리감을 느낀다.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자신의 과거를 왜곡해 말하고 다니는 그에게 폴란드에선 남자답던 당신이 이전과 달라졌다고 말한다. 그러고는 줄라는 클럽에서 빅토르에게 보라는 듯이 흥겹고도 경쾌하게 춤을 추는데, 춤사위는 신나기 그지없지만 그녀의 몸짓에서는 그에 대한 실망감과 씁쓸함이 묻어난다. 빅토르까지도 그 의미를 알 수 없지만 이야기를 계속해서 지켜봐 온 관객은 그것을 느낄 수 있다. 결국 이들은 같이 있어도 같이 있지 않은, 같이 있을 수 없는 사이인 것이다.




결국 프랑스 망명을 택했던 빅토르는 줄라와 더 가까이 있기 위해 폴란드로 되돌아가기로 결정한다. 그는 프랑스로 망명한 동료들의 명단을 넘기고 폴란드로 돌아갈 수 있게 되지만, 모진 고문을 피하지 못하고 종국에는 수용소에 갇힌다. 줄라는 그렇게 자신에게로 찾아온 그를 외면할 수 없다. 그녀는 공산당 간부와 두 번째로 결혼해 그를 빼낸다. 그리고 1964년 폴란드, 그녀는 공연을 끝내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자신의 남편도, 아이도 아닌 빅토르에게로 가 안긴다. "너를 사랑하지만 토해야겠어", 이렇게 말하고 곧장 화장실로 달려간다. 이 대사는 그녀의 상황 자체를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빅토르를 사랑하지만, 그가 이제는 곁에 있을 수 있지만 당장의 상황이 그녀를 옥죄어온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찾아 화장실로 온 빅토르에게 그녀는 말한다. 여기서 자신을 빼내달라고.

그리고 두 사람은 영화 가장 초반, 빅토르가 예술단원을 찾기 위해 들렀던 곳을 찾는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공간이다. 줄라는 이미 두 번의 결혼을 했지만 “성당에서 하지 않은 결혼은 무효”라며 그와 폐허된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자살한다. 이별과 재회를 반복하던 두 주인공의 마지막 선택은, 그 선택까지의 과정은 어쩌면 동의하지 못할 종류의 것들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 해도 이 사실은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그 모든 행위들을 해내서라도 두 사람이 죽고 못살며 서로를 찾고자 한 것이 ‘사랑’이라는 것의 지독한 본성 자체라는 것. 결국 이 영화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두 사람의 사랑 자체다.


극 중 쥘리에트가 "시계추가 시간을 죽였네"라는 가사에 대해 설명하는 것처럼 사랑에 빠지면 시간은 상관없다. 두 사람의 사랑에 십여 년의 치고받던 세월의 길이는 상관이 없다. 마지막 선택을 통해 두 사람의 사랑은 그렇게 해서라도 서로에게 영속된다. 사랑으로 회귀한다. 관객의 시선을 인물들과 그 감정으로 꽉 차도록 만든 4:3의 화면비와 정교하고도 깔끔한 촬영, 아름답기 그지없는 음악은 이런 둘의 사랑을 함축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방식이 된다. 영화에서 다루지 않는 이들 이야기의 공백 또한 이들의 감정으로 꽉 차있다. 영화 속 <심장>의 가사가 결국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전부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함께할 수 없어 눈물 흘리는 두 개의 심장, 네 개의 눈. 두 사람. 두 사람의 사랑. 두 사람만의 사랑. <콜드 워>는 무척이나 씁쓸하지만 아름답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눅진하고도 농밀한 사랑 그 자체에 대한 영화다.




*이 글은 아래 링크의 글과 동일합니다.


https://cafe.naver.com/minitheaterartnine/8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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