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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대초록 Mar 02. 2023

계획 없는 여행이 만드는 것

아일랜드 골웨이에서 2


새해 아침, 아침을 먹으러 나가 자리를 찾고 있는데 전날 밤에 들어와 ‘해피 뉴 이어’라 인사한 사람이 혼자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아침 먹으면서 하려던 게 있어 모른 척하고 혼자 먹을까 하다가, 어젯밤 올해는 사람들한테  먼저 적극적으로 다가가겠다고 다짐한 게 생각나 그 사람 앞으로 다가갔다.



"같이 앉아도 돼요?"

"당연하죠!"



그의 이름은 카렌, 덴마크에서 왔고 나이는 대략 40대 중후반 정도로 보였다. 음악 선생님이고 아일랜드를 다섯 번 정도 여행했다고 한다. 어제 더블린에서 묵을 계획이었으나 숙소를 못 구해서 방이 있는 골웨이까지 즉흥적으로 오게 됐단다. 보통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여행을 다녀서 호스텔 도미토리에서 묵는 건 처음인데 꽤 괜찮은 경험이라며 싱긋 웃었다.


카렌은 여행할 때 계획 없이 그 순간의 결정에 맡기는 편이고 그게 예상치 못한 무엇인가를 불러내고 만들어가는 게 좋다 했다. 혼자면 몰라도 아이들과 여행하면서 그렇게 하기가 말처럼 쉽지는 않을 텐데, 그 말을 하는 카렌의 표정이 정말로 즐거워 보였다. 


밥을 먹으며 여행 이야기, 일 이야기 등 여러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 카렌의 나직하고 차분한 말투를 듣고 있으니 어제까지 호르몬 때문에 요동치던 기분이 평정심을 찾는 듯했다. 탁한 마음이 점점 맑아지는 기분이랄까. 동시에 저런 분위기를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카렌을 못 본 체하고 혼자 밥 먹었다면 계획대로 하려던 걸 했겠지만 좋은 대화를 할 기회를 놓쳤겠지. 카렌의 말처럼 순간의 결정에 맡기고 계획으로는 만들 수 없는 무언가 생겼다. 새해 아침을 맑은 대화로 시작했으니 산뜻하게 한 해를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침을 먹고  산책에 나섰다. 첫날은 밤에 도착했고 둘째 날 은 아침부터 투어하러 나가 저녁에 돌아왔으니 이곳에 도착한지 3일 만에 낮의 골웨이를 본다. 밝을 때 보는 골웨이는 알록달록하고 생기가 넘쳤다.



<비긴 어게인>에서 윤도현이 이 앞에서 버스킹을 했다


카페와 편집숍을 같이 하는 예쁜 카페 Coffeewerk + Press에서 커피 한 잔 마시고, 






바다를 따라 난 긴 산책로를 따라서 솔트힐(Salthill)이라는 곳까지 걸었다. 새파란 하늘과 바다, 초록 잔디와 알록달록한 건물의 조화가 얼마나 예쁜지! 첫날 골웨이에 온 걸 살짝 후회한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이 작은 도시에 대한 애정이 한껏 부풀어 올랐다. 대중교통 이용 안 해도 되는 이 정도의 규모와 활기, 딱 좋다. 골웨이 잘 왔네!




점점 사람 많고 시끄러운 곳을 견디기 힘들어진다. 이것도 나이 드는 과정일까?







한 시간 넘는 산책을 마치고 다시 시내로 돌아와 교회를 개조해서 만들었다는 펍에 들어갔다. 낮에는 밤처럼 사람이 많아 첫날처럼 용기를 내서 들어갈 필요는 없었다. 



드디어 기네스


기네스를 한 잔 시키고 창가에 앉아서 일기를 쓰고 있는데 옆 테이블에 있던 잔뜩 취한 젊은 남녀가 내 테이블로 들이닥쳐와 혀가 꼬인 목소리로 말을 건다.




”너 어디서 왔어?

“한국”

“(물개 박수를 치며) 어머, 나도!”

“……”

“나 여기 앉아도 돼?”

“아니^^”




AI처럼 대답했지만 나는 분명 하회탈 미소를 짓고 있었다.^^ 두 취객은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숨이 멎을 듯 웃고는 지들 자리로 돌아갔다. 



저녁에 카우치 서핑으로 연락이 닿은 스페인 커플 라우라와 알베르토를 만나기로 했다. 이것 역시 새로운 사람을 적극적으로 많이 만나겠다는 올해 다짐의 실천이다. 



전날 밤 일찍 침대에 누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지금껏 연말에 혼자 여행하면서도 정작 혼자 새해를 맞은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늘 길 위에서 누군가 만나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 과정을 돌이켜 보면 먼저 말 걸어주고 다가와 준 사람들이 있었다. 그럼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들이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겠지? 



지난 여행을 추억하며 특정 장소를 떠올릴 때 제일 먼저 생각나는 건 거기에서 본 것도 먹은 것도 아닌 만난 사람들이었다.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는 많이 있지만 그중 제일 결정적인 건 결국 사람이었다. 여행에서 모든 만남이 다 유쾌한 건 아니지만, 그 수를 늘린다면 좋은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더 많아지지 않을까? 






두 사람의 카우치 서핑 숙박 호스트 프랑스인 카시아도 함께 나왔고 드디어 첫날에 가려다 실패한 펍에 드디어 들어갔다. 




펍 안은 여전히 사람이 많았고 시끄러웠다. 이 난리통에서도 골웨이에 10년째 살고 있는 카시아는 능숙하게 주문을 마쳤다. 공연은 보이기만 할 뿐 음악 소리는 사람들 말소리에 묻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나를 보자마자 대뜸 한국어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한 카시아는 몇 년 전 6주 동안 한국을 여행했다고 한다. 설악산,  한라산을 비롯해 목포와 여수까지 온갖 곳을 누비고 다녔고 한국어도 꽤 알았다. 서양 여행자들이 한국만 단독으로 6주 동안 여행하는 경우가 흔치는 않아 신기하다고 생각했는데, 카우치 서핑으로 만난 한국 여행자들과 좋은 기억이 많아서 한국이라는 나라가 궁금해졌단다.




스페인어 선생님이고 한국 학생들도 많이 가르쳤다는 라우라는 제일 처음 하는 질문이




"너 화장품 뭐 써? 한국 사람들은 왜 이렇게 다 피부가 좋아?"




당장 받아 적을 기세로 휴대폰 메모장을 여는 라우라에게 쭈뼛거리며 대답했다.




"나 프랑스 화장품 써...."




비책의 한국 화장품이라도 알려주길 바랐던 걸까. 라우라는 아, 하더니 조용히 메모장을 닫았다 ㅋㅋ 



소리를 지르지 않고는 서로의 이야기를 알아들을 수 없던 첫 번째 펍에서 나와 카시아의 단골 펍으로 옮겨 12시까지 놀았다. 



다음날 아침 버스로 더블린으로 갈 거라는 내 말을 듣고 라우라, 알베르토가 자기들도 내일 더블린으로 간다며 자기들 렌터카로 같이 가자고 한다. 어이쿠, 어쩌지? 이미 버스를 예약해 놓은 걸, 아쉬워라, 라고 대답했지만 사실은 예약 안 했지.  




사람들과 적극적으로 어울리자는 새해 다짐을 첫날부터 온 힘을 다해 실천했으니 내일은 혼자 있고 싶거든요. 밤 12시까지 이야기했는데 내일 차 안에서 또 두 시간을 어떻게 이야기한담? 못 해... 난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다음 날,  버스 안에서 올해 첫 일출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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