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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대초록 Feb 25. 2024

스페인 살며 제주가 그리울 때

그럴 때는 테네리페 섬으로 갑니다

한국에 살 때 짧은 방학이 생길 때마다 제주도로 갔다. 지금은 없어진 섬 서쪽 대평리의 한 게스트하우스에서 묵곤 했다. 근사한 마루, 커다란 창으로 초록이 넘실거리는 도미토리룸, 누우면 바로 잠이 드는 나무 침대가 있는 곳이었다.


일어나면 식빵 두 장 구워 사장님이 만든 귤잼 발라 마루에서 천천히 먹은 후, 슬슬 동네 마실 한번 다녀오고, 마음 맞는 손님들끼리 곶자왈이나 바닷가를 걷기도 하고, 낮잠도 좀 자면 하루가 훌쩍 지나갔다.


저녁에는 다들 기다란 나무 테이블 앞에 둘러앉아 막걸리 한잔 하며 그날 어디에 갔는지, 어디가 좋았는지 등 소소한 이야기들을 나눴다. 그럼 어느샌가 스탭이 기타를 잡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아는 노래가 나오면 같이 따라 부르고, 모르는 노래가 나오면 가만히 노래를 감상했다. 몇 곡 정도 노래를 부른 스탭이 손님들에게 기타를 넘기면, 돌고 돌아 기타를 칠 줄 아는 손님에게 넘어가고 또 다 같이 노래를 불렀다.



잠이 솔솔 잘 오던 2층 침대. 이젠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다.



그렇게 그곳 문을 여러 번 드나들자, 지난번에 본 손님들과 또 마주치기도 하고, 손님으로 왔다가 제주에 정착한 사람들이 생기며 제주에 조금씩 인연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냥 가도 아는 얼굴이 꼭 한 명은 있었고, 뭔가 재미있는 일들이 생겼다. 그곳에선 편안하게 잘 먹고 잘 자고 잘 쉴 수 있었다.


몸과 마음의 방전 위험 신호가 깜빡일 때면 고민 없이 제주행 티켓을 샀다. 서울 생활 팍팍할 때 급속 충전할 수 있는 장소가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한국이 어느 정도 살 만하게 느껴졌다.


스페인에서도 사는 곳 밖에 그런 장소를 갖고 싶었다. 틈이 생겼을 때 어디 갈까 고민 없이 그냥 갈 수 있는 곳. 낯익은 얼굴이 있고 왔냐며 맞아주는 사람이 있는 곳. 지금껏 스페인에서 여행한 곳들 하나같이 다 좋았지만, 제주만큼 반복해서 가고 싶은 장소는 찾지 못했다.






아프리카 북서쪽에 위치한 스페인령 카나리아 제도의 존재에 대해서 처음으로 알게 된 건, 라스 팔마스 섬에 있는 세종 학당 때문이다. 스페인에 있다고 해서 위치를 확인해 봤더니 스페인 본토에서 한참 떨어져 있네? 이런 데 스페인 땅이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고, 그런 작은 섬에 세종 학당이 있다는 것에 두 번째로 놀랐다, 원양 어업 때문에 한때 한국인들이 많이 살았다 하고, 무려  말라가에도 없는 대한민국 분관이 있다. (옛날에는 총영사관이었다 함)


그 후 인기를 끌었던 프로그램 윤식당이 카나리아 제도의 테네리페 섬에서  촬영하며 한국인들에게도 카나리에 제도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여전히 한국인들이 많이 찾는 장소는 아니지만, 연중 날씨가 온화해서 겨울이 길고 흐린 날씨가 잦은 영국이나 독일, 북유럽 사람들에게 인기 여행지이고, 이민 와서 사는 사람들도 많다.


너무 관광지가 아닐까 싶기도 하고, 좋다는 거에 비해서 본 사진들이 그렇게 매력적이지는 않아, 스페인 여행 중 우선순위로 뒀던 곳은 아니었다. 테네리페에 서서히 관심이 가기 시작한 건, 친구 월터가 테네리페에서 오래 지내는 걸 보고서다.  좋아하고 존경하는 친구가 테네리페에 자꾸 가는 걸 보니까, 그 섬 뭔가 있나 싶은 거다.


1월에 드디어 테네리페에 다녀왔다. 첫날 해안 도로를 달리는 버스에서 창밖을 내다보며 느꼈다. 제주의 기운을. 이곳이 나의 스페인 속 제주도가 되어 줄 거라는 걸 직감했다.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산 크리스토발 데 라 라구나(San Cristóbal de La Laguna)에는 남미 느낌이 나는 알록달록한 건물들이 유독 많다.




여기에 올드카만 한 대 놓여 있으면 딱 쿠바 아바나인데.



카나리아 전통 건물에 있는 스타벅스, 메르카도나 슈퍼마켓, 은행 다 너무 이국적인 풍경이다.


2층은 멕시코 영사관




쿠바처럼 카나리아 제도에서는 버스를 과과(Guagua)라고 부른다. 이 과과를 타고 섬 여기저기를 여행할 때 버스 바깥으로 보이는 해안선을 보며 계속해서 제주가 생각났다. 화산섬이라서 제주도처럼 검은 현무암 바위들도 자주 보인다.





카나리아의 명물  삶은 감자인 파파스 아루가다스(Papas Arrugadas)와 모호 피콘(Mojo Picón) 소스.  테네리페 시장에 가면 온갖 종류의 감자들을 볼 수 있다.





숙소 창문에서 바라본 밤 풍경. 멀리 스페인에서 가장 높은 테이데(Teide) 산이 슬쩍 보인다.




어딜 가도 보이는 바나나 나무들. 카나리아는 바나나 생산지로 유명하다.




나무로 만든 창문과 테라스가 인상적인 카나리아 전통 가옥들.

La Orotava


16세기에 지어진 어느 부잣집. 뭔가 태국 같은 느낌도 나고.





1000년 된 드래곤 트리 아래서 소원도 빌어 보았다.



 머무는 내내 사하라 사막에서 날아온 미세 먼지 때문에 공기가 좋지 않았다. 때문에 찍은 사진이 다 흐릿하다. 바다의 경계도 제대로 안 보이고 테이데 산도 또렷이 안 보여서 아쉬웠다. 테네리페 참 좋은데, 뭔가 사진발이 안 받는 느낌. 실물을 못 담아낸다. 그래서 내가 본 사진들도 그랬나.


여기서도 월터는 주기적으로 비건 피크닉을 열고 있다. 비건 타불레, 베트남 롤, 비건 바나나 아이스크림, 그리고 농장에서 일하는 사람이 직접 따 온 카나리아 바나나.  




 월터가 친구와 함께 테네리페 북쪽에 비건 요리 워크숍, 요가, 명상, 숙박을 함께 하는 공간을 준비 중이다. 장소 사진을 보니까 주변이 완전히 초록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곳이 오픈하면 이제 진짜 스페인 속 제주도 게하 같은 곳이 생긴다. 월터가 한다면 아름답고 편안하고 좋은 기운을 주는 장소가 될 게 분명하다. 말라가에서 2시간 반이 걸리니 가까운 곳은 아니지만, 만날 때마다 고민이 하나씩 해결되는 친구를 만날 수 있고, 온전히 쉴 수 있는 곳이 생긴다 생각하니 스페인 생활에 든든한 지원군이 하나 생긴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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