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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Mar 14. 2024

토드 헤인즈, <메이 디셈버>

여자가 따라하고 싶은 가부장제

토드 헤인즈(Todd Haynes), <메이 디셈버>(May December) 

- 여자가 따라하고 싶은 가부장제     

1. A May–December romance: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커플을 지칭하는 영미권의 은어다. 가부장제에선 권력을 행사하는 늙은 남성(=sugar daddy)과 경제적으로 취약한 젊은 여성(=sugar baby)의 메이 디셈버 로맨스(=sugar dating)가 일반적이다.

2. 메리 케이 르투어노-빌리 푸알라우: 미국의 교사였던 메리 케이 르투어노는 자신의 제자인 13세의 소년 빌리 푸알라우와 1996년에 성관계를 맺었다. 둘의 관계는 수면 위로 드러나 미성년자 그루밍 성폭행으로 판결이 났고 르투어노는 징역형을 받았지만, 그녀가 출소하고 푸알라우도 성인이 된 이후 둘은 재회하여 결혼하였다. 과연 이들의 관계는 법의 판단처럼 그루밍 성범죄였을까, 아니면 조숙했던 소년이 주체적으로 판단한 사랑이었을까?

토드 헤인즈는 메리 케이 르투어노-빌리 푸알라우 사건에서 영감을 받은, 나이 많은 여성과 어린 소년이 교제하는 <메이 디셈버>를 선보인다. 이는 '슈가 대디'에 의한 가부장제의 일반적인 메이 디셈버 로맨스와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1961년 로스앤젤레스 태생의 토드 헤인즈는 미국의 영화감독이다. 그는 이성애자 백인 남성들이 주도해온 상업 영화와 다소 거리가 있는, 커밍아웃을 한 게이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솔직하게 반영한 작가주의 영화를 연출해왔다. 그의 작품 세계는 크게 세 갈래로 나뉜다. 첫 번째로 '음악가 전기 영화'다. 여기서 일반적인 전기 영화를 헤인즈에게 기대한다면 크게 데일 것이다. 그의 전기 영화는 음악가의 일생을 선형적으로 따라가지 아니하고, 음악가가 작품 속에 산발적으로 위치시켜놓은 인생을 추적하기 때문이다. 현실 속 음악가는 하나의 육체와 객관적인 사실로서 굳어져 있다면, 음악 속에서 이들의 자아는 물리적인 한계를 뛰어넘어 자유롭다. 이에 따른 분방한 전개와 초현실적인 여정이 <벨벳 골드마인>과 <아임 낫 데어>에서 펼쳐진다.

두 번째 경향은 '심리 스릴러'다. 헤인즈는 인류에게 닥쳐온 전례 없는 위협을 영화로써 탐구하는데, 여기에 게이로서 그의 정체성이 간접적으로 반영된다. <세이프>와 <포이즌>의 주인공들은 신종 전염병으로 고통 받는데, 이는 20세기 후반 서구 사회의 동성애자들을 위협했던 에이즈의 알레고리다. 질병에 따른 공포는 국가적 재난을 방관하는 ‘정치’에 의해서 증폭된다. 백인 이성애자 남성이 주류인 사회에서 껄끄럽게 바라봐지는 동성애자나 여성이 신종 전염병의 가장 큰 피해자이기에 팬데믹은 적극적으로 수습되지 않는다. 좀 더 보편적인 심리 스릴러이자 법정물인 <다크 워터스>에선 제도가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 만인에게 닥쳐오는 위협을 방관한다고 진단한다.

그의 자전성과 성 지향성은 세 번째 색채인 '퀴어 멜로'에 더 짙게 투영된다. 헤인즈는 지극히 가부장적인 시선에서 '누구나 다 해야 하는 사랑'과 달리, 제 감정에 솔직하고 서로를 절절히 이해하는 교류가 진정한 사랑이라고 논한다. 이러한 관계는 멜로극과는 거리가 먼 <원더스트럭>에도 일련 이어져서 ‘시대’를 뛰어넘어 생각지도 못한 ‘타자’에게서 진실을 찾는다. <원더스트럭>의 만남처럼 헤인즈가 그리는 사랑 역시 제도에 의해 불법화되고 금기시된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비슷한 시대를 다루더라도, 영화를 연출하는 시점에 따라서, 작품의 결말을 이리저리 뒤바꾸기도 한다. 2002년 작품 <파 프롬 헤븐>은 영화의 배경으로부터 조금도 나아지지 않은 제작 당시 세간의 퀴어 인식을 새드 엔딩에 반영한다면, 2015년 작품 <캐롤>에선 역사적인 한걸음에 영화 역시 화답한다. 이 중 그의 신작은 세 번째 동향의 연장선에 해당한다. 과연 어떤 금기가 스크린에 펼쳐지고 있는가.     


도입부, 헤인즈는 정원의 화초와 모나크 나비를 촬영한다. 그 풍경은 아주 감미로운데, 원인을 세 가지 정도로 추측할 수 있다. 첫 번째로는 본 작품이 택한 35mm 필름의 아스라한 빛깔이 안 그래도 아름다운 자연을 더욱 신비롭게 휘감고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론 카메라가 우아한 나비의 날갯짓을 ‘따라하며’ 워킹하고 있기 때문이요, 마지막으로는 화초와 나비를 ‘클로즈업’하여 만져질 듯 부드러운 촉감을 부각하기 때문이다. 형식에 더해 내용 역시 좋은 감각이나 그 결과를 가리킨다. 나비는 화초가 뿜는 향을 따라가서 달콤한 꿀을 빨고, 그 쾌락의 결과인 알을 나뭇잎에 살포시 산란한다. 즉 자연은 쾌감에 있어 미끄러지듯 유연하고 자유롭다. 이 아름다운 풍광엔 어떤 한계도, 장애도 없어 보인다. 

그 직후 그레이시-조 커플이 사는 동네가 포착된다. 이전의 숏이 아주 감각적이어서 왠지 모를 호기심과 두근거림, 설렘을 자극했다면, 이후의 숏은 정반대로 매우 둔감하다. 카메라 워킹은 갑작스레 실종되어 프레임은 얼어붙고, 운동에서 비롯하는 감각은 거의 전무하다. 또 감상자에게 그레이시와 조는 '롱숏'으로 멀찍이 떨어져서 촉감이 연상되지 않고, 화면의 질감은 아스라하기보단 선명하다. 이전 숏에서는 가까워도 신비로워서 다가가고 싶었다면, 현 숏에선 멀어도 모든 것이 잘 보여서 궁금함이 없다. 내용도 이전 시퀀스에서는 나비가 자유롭게 미식을 즐겼다면, 현 시퀀스에선 음식을 타인에게 대접하기 위해 준비만 할뿐, 전혀 입에 대지 못하고 있다. 조의 입은 솔직하지 못하고, 대신 그레이시의 지시를 받든 손이 열심히 소시지를 굽기만 한다. 향후 그레이시 또한 이웃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케이크를 굽는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조의 입은 그레이시를 위로하기 위해 주문이 취소된 케이크를 꾸역꾸역 먹을 때나 열린다.

이 와중에 그레이시-조 커플을 모티브로 한 영화의 주연인 엘리자베스가 취재 차 그들의 파티에 도착한다. 그레이시-조에게 허용된 카메라 워킹이 기껏해야 '패닝', 곧 좌우로 움직였다가도 고정된 카메라가 위치한 장소로 되돌아오는 제한적인 움직임이었다면, 엘리자베스를 포착하는 카메라는 능동적으로 '달리 인'한다. 이는 나비를 포착하는 연출과 유사하다. 뿐만 아니라 맨 처음 포착된 엘리자베스는 ‘프레임 바깥’으로 자주 뛰쳐나간다. 그 이유는 프레임 안에는 주로 남성을 위해 성적 대상화된, 엘리자베스의 말로는 보여주기 창피한 TV 출연작들이 재생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레이시의 잔소리를 듣는 조와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로 프레임 밖으로 달아나고 싶어 안달이다. 즉 프레임은 타인을 위해서 어떻게 보여야 하는 의무나 지시의 공간이다.      


그런데 반대로 엘리자베스는 그레이시가 머무는 프레임 안으로는 진입하고 싶어 한다. 한때 그레이시가 머물던, 동물들의 야성적인 울음이 울려 퍼지는 펫샵 창고에서 엘리자베스는 제 욕구에 다가가 자위를 한다. 그렇다면 엘리자베스와 그녀가 바라본 그레이시의 ‘외양’엔 스스로의 목적을 추구하는 자연의 특질이 있을 것이고, 반면 그레이시와 조, 아이들에게는 반자연적인 요소가 개입해서 프레임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자연은 그 누구에게도 지배받지 않는다. 나비와 풀, 모두 다 스스로의 내재적 자유와 목적에 따라 움직인다. 엘리자베스도 마찬가지다. 그는 연기자다. 그렇다면 배역과 그것의 모델이 된 원형에 지배받는다고도 말할 수 있으나, 그녀는 스스로 연기해보고 싶은 배역인 그레이시를 몸소 선택하였다. 또한 배우는 현실의 제한이 일련 해제된 영화계라는 차원으로 뛰어들며, 억압된 본능을 조금이나마 풀어헤쳐볼 수 있다. 그래서 영화 초반, 엘리자베스를 포착하는 카메라는 '줌아웃'되는 반면, 그가 연기하는 그레이시는 언제나 '줌인'된다. 엘리자베스는 하루 빨리 영화에서 연기할 그녀한테 다가서며 본능을 해방시키고 싶은 것이다. 

그 욕망, 여성 역시 잘생기고 젊은 남자를 좋아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늙었지만 부나 명예가 있는 남성을 여성이 선호하게 된 이유는, 피해자 여성이 생존을 위해 가해자 남성에게 아양을 떨도록 유도하는 가부장제의 스톡홀름 증후군에 있다. 그래서 여성이 연하남과 관계를 맺으면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다들 수군거리는데, 이런 사회에서 그레이시는 심지어 미성년자와 불법적으로 교제했음에도 떳떳한 모습이니, 엘리자베스가 충분히 동경할 만하다. 이런 그레이시를 ‘밀착’ 취재하고 싶은 엘리자베스는 남자들에게 충분히 시달린 것으로 추정된다. 조를 흥분시키는 CF를 찍고, 남학생들한테 질문으로 위장된 성희롱을 당하니 말이다. 이는 엘리자베스만 겪는 문제가 아니다. ‘체중계’를 선물로 받는 딸들, 팔뚝을 가리고 애써 미소를 가꿔야지만 거울이라는 가상이 아니라 현실에 진입할 수 있는 메리도 마찬가지다. 이런 와중 엘리자베스는 영화 제작자 및 조와 불륜하고 남자를 도발·농락하길 원하니, 원하는 욕망을 쟁취하는 그레이시는 엘리자베스의 눈에 다가가고 싶은 롤모델에 다름 아니다. 즉 고루한 현실에서 제 욕망이 아니라 남성의 욕망에 잠식되는 여성 엘리자베스는, 새로운 현실을 개척한 그레이시를 연기함으로써 스스로의 감정을 되찾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래서 자유를 지향하는 엘리자베스와 자연은 유사하게 나타나지만, 문제는 엘리자베스가 따라하려는 그레이시는 오히려 연출이 경직된다는 점이다. 그 원인은 그레이시의 과거에 있다. 조지의 말을 믿는다면 그녀는 오빠들한테 친족 성폭행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일기장에나 그 사실을 적어놨을 뿐, 외부에 공론화하지 못했다. 또한 아버지의 과잉보호가 심각하여 결혼하지 않고선 살아서 그의 집에서 나갈 수 없었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레이시는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자마자 조건 상 결격 사유가 하나도 없는 톰과 첫 번째 결혼을 한다. 아마도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여 경제적으로 취약했을 그녀는 어쩔 수 없이 톰에게 귀속되었으리라. 이렇게 아버지, 오빠, 톰으로 이어지는 연속은 그레이시가 바란 것이 절대 아니다. 가부장제가 그녀에게 안긴 거대한 시련과 결여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명백하게 인식하고 어떻게든 쟁취하는, 간혹 제 계획이 불발되면 울부짖고 집착하는 편집증적인 그레이시를 만들었다. 그레이시-조 사건의 또 다른 피해자인 조지 또한 마찬가지다. 당시 제 생일파티를 망친 걸로도 모자라서 오명까지 쓰고 이후의 인생도 회복하지 못한 그는, 원하는 욕망을 쟁취하기 위해 극단적으로 행동한다. 즉 그레이시는 본성을 따르지만, 그 내재성을 강박적으로 따르게 된 원인은 외부의 인위적인 개입이 있었다. 

그레이시는 자신이 원하는 삶을 위해 조 역시 지배하며 편집증을 확장한다. 그레이시와 교제할 당시 조는 갓 중학교에 입학하였고, 그들의 관계는 펫샵 관리자와 아르바이트생으로서 위계가 엄격하고 권위적이었을 것이다. 청소년이 상사이자 어른의 말을 감히 쉽게 거스를 수 있었을까? 뿐만 아니라 그레이시는 미국 사회에서 우월적이고 지배적인 '백인'인 반면, 조는 외관상 '원주민'이라 오해하기도 쉽고, 실제론 '한국인 혼혈'로서 어떻게 인식되든 미국 내에서 ‘패싱’당하기 쉬운 소수 인종, 즉 약자다. 백인-유색인종의 위계는, 가부장제 내 성별 간 격차를 무시할 수 있는 특권을 여성 그레이시에게 제공한다. 이에 지금까지도 둘의 관계는 동등한 연인이라기보다는, 가부장제 내에서 일반적인 커플의 젠더 스왑, 내지는 모자 관계처럼 보인다. 그레이시가 아들 찰리와 남편 조를 대하는 태도는 별 차이가 없고, 또 조와 찰리의 관계는 부자라기보다는 친구와 같으니 말이다. 그래서 연출은 경직될 수밖에 없다. 남자에 의해 얼어붙은 여자의 삶, 그 여자에 의해 지배당하는 또 다른 약자의 경화된 감정을 가시화하니 말이다.     


여기서 의아한 점이 있다. 분명 그레이시는 조를 지배함으로써 욕망을 성취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그레이시한테라도 연출은 좀 더 솔직하거나 감각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목적 일부를 성취한 그레이스한테도 연출이 뻣뻣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녀는 떳떳한 척 하지만, 정작 떳떳할 수 없다. 분명 그레이시가 조를 유혹한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가 자신을 홀렸다면서 불운한척 연기한다. 이는 그녀 오빠들의 삶과 상반된다. 어린 여성을 그루밍한 남성들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애초에 그 사실 자체가 공론화되지도 않았다. 그들은 애써 숨길 필요도 없고, 무언가를 연기할 필요도 없이 지금까지도 당당하다. 그러나 가부장제에서 남성을 모방한 여성은 공론화되어 몰매 맞고, 물론 그것이 명백한 잘못이라 한들, 처벌당하지 않는 남성에 비해 온갖 수모를 당한다. 어찌나 매스컴에서 잔혹하게 굴었는지, 그레이시의 이웃은 엘리자베스에게 그녀를 ‘너그럽게’ 대해달라고 부탁한다. 

뿐만 아니라 그레이시는 조를 붙잡아두기 위해 연기한다. 숲 속에서 듬직한 사냥개들을 진두지휘하며 메추라기를 사냥하는 그녀는 ‘연약함’이라는 단어와 거리가 멀다. 뿐만 아니라 집 안에서도 남편과 자녀들은 그녀에게 반기를 들지 못한다. 찰리가 그레이시에게 반항하고자 저녁 식사를 거부하고 음악 볼륨을 높게 키워도 금세 꼬리를 내리고 독립할 날만 꿈꿀 뿐이다. 즉 그녀는 꽤 강인하다. 그런데 가부장제에서 강인한 여성은 남성에게 인기가 없다. 가부장제는 남성에게 경제력을 보장하니 그들에게 생존은 문제나 결핍도 못된다. 남성은 보호자를 욕망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실제로도 조는 청소년기에는 그레이시가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해다줬지만, 현재는 번듯한 직장이 있어 그녀에게 굳이 의존할 필요가 없다. 그레이시에게 질렸는지 TV에서 취약하고 구슬리기 쉬운 여성을 연기하는 엘리자베스를 사치스럽게 흠모하거나, 모나크 나비를 핑계 삼아 멕시코로 여행을 떠나 SNS 친구와 바람을 피우려 한다. 이는 가부장제가 만들어낸 임금 불평등과 고용 문제 때문에, 서류를 따져가며 남성을 좋아해야 하는 여성의 처지와 정 반대다. 이에 불안해진 그레이시는 지배자로서 자신을 은닉하고, 침실에서 흐느끼며 가녀린 척 연기를 한다. 나는 당신의 포옹이 필요한 존재라고, 내 곁에서 떠나가지 말라고, 이로써 두 남녀는 한 공간에 어찌저찌 놓인다. 엘리자베스는 그레이시를 간파했으나, 정작 그레이시에게 가스라이팅 당한 조는 제 인생을 챙기기는커녕 아내를 염려하고 걱정하며 외도를 꿈꾸면서도 떠나지 못한다. 이렇게 억지로 동행하게 된, 또 허구의 상대를 좋아하는 감정은 당연히 어색하고 기괴하다. 그러니 연출은 둔감해질 수밖에 없다.     


헤인즈는 그레이시의 힘을 '문'이라는 사물로 상징한다. 지배당하는 조는 항상 문 너머를 열망한다. 그가 호감이 있는 엘리자베스와 대화할 때, 항상 탁 트인 바깥에 위치한다. 거기서 가만히 멈춰있기 보다는 적은 보폭이든, 드넓은 길을 누비는 산책이든 자유롭게 발을 움직여가며 가고 싶은 곳으로 향한다. 혹 몸이 방 안에 갇혀 있는 경우에는, 폐쇄된 공간 안에서 또 다른 차원으로 뛰어넘을 수 있는 통로인 '브라운관', '스마트폰' 등을 응시한다. 지금 여기를 조는 원치 않는다. 그러기 위해선 지금 여기와 다르기에 '선'을 그어둔 세계로 초월해야 한다. 과거엔 그레이시가 그랬고, 현재엔 조와 엘리자베스가 그 선을 뛰어 넘으려 한다.

그러나 경계선 안에 조가 위치해있는 것이 그레이시에겐 좋다. 이에 그레이시는 항상 문 안쪽에 위치하며 감시한다. 자신이 위치한 문 안의 세계로 조가 늘 진입하게끔, 흡사 나비를 유혹하는 꽃처럼 연기한다. 그렇게 조를 끌어들여서 자신이 원하는 냄새를 풍기게끔, 또 원하는 모양으로 있어달라고 주문한다. 그 상태가 빠져나가는 것을 원치 않는 그레이시는 문을 닫는다. 차고 근처에서 엘리자베스와 대화하는 조가 그레이스의 예상과 달리 귀가가 늦을 때, 그녀는 자신이 위치한 침실의 조명을 희번덕하게 켠다. 자신이 조를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면서 그가 제 곁으로 오게 만들고, 그가 집 안으로 들어오자 '차고'의 셔터를 내린다. 조와 엘리자베스가 오랜 시간 산책을 한 게 불안하자, 케이크 주문 취소를 핑계 삼아 눈물을 흘리고, 엘리자베스를 향한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기도 한다. 지금껏 이 문을 통제할 수 있는 성별은 남성이었다. 그러니 그레이시를 성폭행한 오빠들의 진실도 문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은 것이다. 반면 여자들은 막연히 이 권력을 부러워만 했다. 따라할 순 없고 남성과 혼인하여 아주 간헐적으로만 그 권력을 빌릴 수 있다. 그런 와중 엘리자베스의 눈에 사랑과 가정, 심지어 서배너라는 섬 전체까지도 통제하는 그레이시의 사례가 눈에 띄니, 연기라는 목적 외로도 그녀를 따라하고 싶은 게 당연하다. 그래서 엘리자베스는 조를 제 집에 들여오고 문을 닫는다.      


그 여성의 열망을 헤인즈는 '거울'로 드러낸다. 그는 욕실, 부티크, 화장실 등 그레이시와 엘리자베스가 함께할 때마다 거울을 이용해 그녀들을 비춘다. 애초에 그레이시는 엘리자베스와 키도 유사했는데, 여기서 그치지 않고 거울 앞에서 화장과 헤어스타일 등 더 많은 요소를 동화해 간다. 거울은 원형을 고스란히, 단지 좌우만 뒤집힌 모습으로 따라한다. 즉 온전한 진실은 아니지만, 좌우반전 외의 진실을 간직한다고 말할 수 있으며, 이러한 거울의 속성과 유사한 것은 엘리자베스의 연기론이다. 연기 역시 분명 허구다. 배우는 배역을 잠시 빌려 입었을 뿐이며, 행위나 감정 역시 꾸며낸 경우가 많다. 그러나 어찌됐든 내 얼굴이 그 감정을 표현하고, 내 사지가 어떤 행동을 한 것은 사실이라서, 허위이지만 일부분 진실이다. 키아로스타미의 <사랑을 카피하다>처럼 말이다. 엘리자베스는 그레이시를 따라하는 자신이 허위이길 원치 않는 눈치다. 그녀는 실제로 '어린 조'를 통제하며, 제 욕망을 완벽하게 느끼고 싶어 한다. 엘리자베스가 깔끔하게 연기한 결과물이 조금의 '컷'도 허용하지 않는 '롱테이크'에 고스란히 보존될 때, 그 다음 숏에서 번데기를 깨고 성체가 된 나비가 날아오른다. 즉 진실에 도달할 때 존재는 완성된다. 

그런데 이 진실은 엘리자베스가 모방하는 그레이시의 것인가, 아니면 엘리자베스 본인의 것인가? 엘리자베스는 여전히 그레이시를 모른다. 거울로서 그녀는 오직 아스라하고 신비로운 ‘외양’만 따라할 뿐인데, 영화 속 희미한 외관은 온전한 앎과는 거리가 멀다. 반짝이는 윤슬로 가득한 호숫가에서 조는 제 감정에 대해서 안 다고 말하면서도 다시 잘 모르겠다고 말을 바꾸며 얼버무린다. 대마초를 흡입한 이후에야 제게 솔직해져 비참한 심정을 고백하고 이때 영화는 선명해지지만, 이 순간을 엘리자베스나 그레이시는 모른다. 오직 조와 찰리만 안다. 더욱이 ‘어둠’ 속에 숨어서 울부짖는 그레이시를 엘리자베스는 모르고, 조와 몰래 만난 엘리자베스를 그레이시는 모른다. 서로는 이런 진실이 새어나가지 않게끔 민감한 질문이나 만남을 사전에 엄격하게 차단한다. 영화 말미 졸업식에서까지 그레이시는 진실을 교란한다. 이에 혼란에 빠진 엘리자베스는 줌아웃으로, 곧 그녀가 안다고 확신했던 진실에서 멀어진다. 그래서 거울로 따라하는 것은 단지 예쁜 외양이요, 이로써 가까워지는 것은 ‘그 외양을 따라하고 싶은 행위자의 욕망’이다. 줌인되거나 클로즈업된 대상은 그레이시가 아니라, 실은 엘리자베스 자신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헤인즈가 생각하는 예술이다. 예술이 아무리 자신 바깥의 것을 객관적으로 재현하려 노력한다한들, 결국 예술가는 제 욕망을 투사한 무언가를 모방할 뿐이다. 이로써 대상에 가까워지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창작자의 욕망에 가까워진다. 결말에서 엘리자베스가 무한 반복하며 떠나길 원치 않는 진실은 그레이시인가 아니면 저 자신인가. 아마도 엘리자베스, 심지어 그 배역을 연기하는 배우 본인일 것이다. 헤인즈는 애초에 나탈리 포트만과 명확히 구분되는 엘리자베스가 아니라, '고학력자'로서 포트만이 연상되게끔 엘리자베스라는 배역을 설정했고, 이로써 아무리 포트만이 엘리자베스와 그레이시를 따라하더라도 자신을 일부 드러내게 만들어 놓았다. 이러한 자신의 내재성에 모두가 다가가기 위해 사냥, 곧 '지배'를 포기하라고 말한다. 후반부의 그레이시가 사냥을 포기하는 것처럼 말이다. 즉 헤인즈는 메리 케이 르투어노-빌리 푸알라우 사건을 느슨하게 재현함으로써 지배를 보편화하는 가부장제의 철폐를 논한다. 조가 사육장에 갇혀있던 나비를 놓아주듯, 또한 그 역시 졸업식에서 울타리 바깥에 위치하듯, 감각은 그저 자유롭게 문 안팎을 넘나들며 날아오르고, 제약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지배는 단지 또 다른 지배와 억지를 낳을 뿐이다. 다만 엘리자베스가 배우가 아니라 자신으로서 욕망을 드러낸 순간에도 지나치게 작위적으로 연기하는 포트만의 느끼함과 과잉, 다소 뻔한 음악의 사용 등 연출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그 인위성과 통속성이 감정의 해방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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