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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Mar 21. 2024

말레네 최, <조용한 이주>

존재의 조건

말레네 최(Malene Choi), <조용한 이주>(The Quiet Migration) - 존재의 조건

*짧은 글을 읽고 싶으시면 코아르 링크를, 이보다 긴 글을 읽고 싶으시면 본 글을 선택하시면 됩니다.

https://www.ccoart.com/news/articleView.html?idxno=4572

최근 한국계가 등장하거나 연출하는 영화에서 한민족의 발은 대한민국 영토를 벗어나고, 입에선 외국어가 흘러나온다. 이는 한국계 영화인들의 활발한 해외 진출을 의미함과 동시에, 한국인으로 태어났지만 모종의 이유로 한국에서 살지 않거나 못하게 된 이들의 이야기가 영화화되고 있다는 의미도 내포한다. 현재 후자에 속한 작품들이 국제 영화계에서 커다란 주목을 받고 있다. 한국에서의 삶을 포기한 동포들은 20세기 대한민국의 비극적인 근현대사에 절망하여 다른 나라로 이주한 경우가 많다. 그들의 2세들이 현재 영화감독이 되어 자신들의 유년기를 <미나리>, <라이스보이 슬립스>, <패스트 라이브즈> 등의 작품에서 자주 회고한다. 반면 한국에서 살지 못하게 된 영화인들은 대체로 이주를 직접 선택할 수 없었다. 이들은 친부모의 열악한 처지, 20세기 대한민국의 비관한 환경으로 인해 해외로 입양된 케이스가 많으며 <리턴 투 서울>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본 글에서 다룰 <조용한 이주>는 후자에 해당한다.

이를 연출하는 말레나 최는 1973년 한국 출생의 덴마크 영화감독이다. 그녀는 국제 입양되어 어느 날 눈 떠보니 덴마크에 거주하게 되었다. 말레나는 덴마크에서 인종차별을 당하며 늘 이방인과 같은 설움을 느꼈다고 유년기를 회고하는데, 그래서 국제 입양된 한국계 이방인들이 타지에서 겪는 핍박 등을 영화에 담아낸다. 그럼으로써 똑같은 처지의 입양아들을 더는 소외시키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이들이 한국으로 돌아오는 이야기 역시 연출하거나 기록하는데, 거기서도 입양아들은 한국계가 아니라 이민자로 불린다. 그 어느 곳에서도 온전히 내지인으로 정착할 수 없는, 모든 곳에서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한국계의 디아스포라가 신작 <조용한 이주>에서도 이어진다.      


말레네는 자신과 같은 한국계 입양아의 처지가 우주에서 추락한 운석, 곧 ‘외계인’이라 진단한다. 그 외지인 칼(코르넬리우스 원 리델클라우센)은 내지인 덴마크 백인과 비교했을 때 '운동'이 확연하게 다르다. 도입부, 말레네는 카메라를 '패닝'하며 덴마크인의 '영지'를 훑어본다. 좌우로 넓게 펼쳐진 영토를 담아내기에 적합함과 동시에, 카메라가 고정되어 제한적이고 정적인 느낌을 주는 촬영이 작품 전반을 지배한다. 수평적인 촬영의 당위성은 널따란 토지를 소유한 덴마크인들이 더 올라갈 곳 없는 기득권이라는 데서 비롯한다. 이들은 값싼 동유럽 노동자를 고용하여 EU 보조금을 받고, 동시에 EU로 빠져나가는 세금이 싫어서 브렉시트를 찬성할 정도다. 이런 그들에게 수직적인 이동은 추락만 의미할 테니, 오직 계급 내에서 수평적으로만 이동하는 것이 당연해 보인다. 이 수평적인 운동은 그들의 영지와 시선에 귀속된 노동자, 가축, 입양아의 이동 역시 결정한다. 왜냐하면 영화의 법칙이란 카메라 안에 담겨야지만 존재할 수 있기에, 그들은 고정된 카메라가 형성하는 회화적인 프레임, 패닝 등에 행동을 맞춰 수동적으로 존재한다. 어느 날 대뜸 덴마크에 추락, 곧 ‘수직적’으로 도착한 칼도 마찬가지다. 그에게 '핸드 헬드'와 '달리 인'이 결합한 카메라 워킹이 잠시 사용되는 중반부까지 수직적인 이동은 거의 전무하다. 한스(비아르네 헨릭센)의 가업을 물려받을 운명이 강제되고, 카렌(보딜 예르겐센)에 의해서 한국을 향한 관심이 통제되니 칼의 본성적인 운동은 제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백인들의 수평적인 세계에 수직적인 운동으로 소란스레 도착한 한국계 칼이지만, 이주 직후는 제목 그대로 조용해질 수밖에 없다.

이 수평적인 촬영은 피사체와의 거리를 좁히지 못한다. 심지어 카메라와 칼의 거리는 까마득하게 멀어서, 그는 늘 '롱숏'에 담겨 작고 모호하게 존재한다. 단순히 칼의 외관만 아스라한 것이 아니라, 그의 자아 및 정체성과도 아득히 동떨어져 있다. 칼은 제 속내를 공유할 친구가 전무하다. 이방인이라는 공통분모로 엮이는 폴란드에서 온 노동자, 안드레이(다비드 스치우피드로)가 유일한 친구라 말할 수 있다. 안드레이는 칼에게 "너의 꿈은 뭐냐?"라고 묻지만, 칼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 한스와 카렌은 칼을 유산한 딸의 대체이자 자신들의 계승자, 곧 부모의 목적으로 여기지, 독립된 주체로 존중하지 않는다. 그래서 칼 대신 카메라 앞으로 거대하게 엄습해오고, '풀숏'으로 프레임에 자명하게 담기는 존재가 있나니 바로 농기구, 집, 농장 등 칼이 계승해야 할 양부모의 유산이다. 이는 롱숏에서 칼을 짓누르고 있는 거대한 공허, 곧 ‘헤드룸’에 한가득 채워진다. 초반부까지 칼은 불가항력적으로 성큼성큼 걸어오는 운명에 저항하지 못했다. 이후 부모의 손아귀라 할 수 있는 '삼각대' 내지는 '스테디캠'에서 달아나, 핸드 헬드 달리 인으로 포착될 때 처음으로 반항한다. 그 순간 카메라는 칼의 주체적인 발걸음을 '클로즈업'하며 그가 저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있음을 가시화했으나, 이 발걸음마저도 한스가 새로 구입한 거대한 농기구가 가로막음에 또다시 롱숏으로 멀어진다. 

이렇게 영화 속 롱숏은 인간이 소외된 상태이기에 적막하고 우울하다. 안드레이의 눈엔 광활하고 풍요로워보일지 모르지만, 칼의 시선에선 자신과 무관한 풍경일 뿐이다. 그 풍경에 칼이 강제로 복속되었을 땐 중앙 하단이나 모서리 부근으로 그가 밀려나며 헤드룸이 커다랗게 발생한다. 친부모가 이송한 세계, 양부모가 결정한 세계에서 칼의 의지는 모조리 박탈되고, 대신 공허가 채워진다. 이 롱숏들 사이사이엔 칼의 유년시절로 추정되는 숏이 이따금 ‘인서트’된다. 어린 소년은 어둠 속에서 쥐불놀이를 즐기며 즐거워한다. 영화 내내 표정이 얼어붙은 성인 칼과 정반대다. 뿐만 아니라 권위적인 백인들의 검열을 피해 제 존재를 아슬아슬하게 은닉하는 성인 칼과 달리, 어둠 속에서 횃불을 든 어린 소년은 존재 그 자체를 찬란하게 빛낸다. 칼은 정체성을 검열할 필요가 없는 유년 시절을 그리워하지만, 반짝이는 기억이 담긴 숏은 눈 깜빡하면 지나갈 정도의 '찰나'다. 이런 칼의 방엔 '수조'가 있다. 칼이 자기만의 세계를 온전하게 구축하고자 하는 열망이 반영된 사물일 테지만, 그 세계는 아주 작을 뿐더러 온전하게 순환하고 있는지 확인하기엔 너무 작다. 그래서 정체성을 회복한 순간은 짧을 수밖에 없는 것이요, 대신 양부모와 함께 노동 및 식사하는 순간은 바라지 않지만 '롱테이크'에 붙잡혀 잘림 없이 길게 이어진다. 칼은 지루한 현재를 중단하여 정체성이 보존된 과거로 건너뛰고 싶지만, 그러기에 그의 힘은 너무나 미미하다.     


칼의 힘이 미약한 이유는 자기만의 세계를 건립할 ‘땅’이 없기 때문이다. 그의 처지는 제 터전을 빼앗겨 강제로 방사된 동물과 다를 바가 없고, 이에 덴마크인의 영지에서 눈칫밥을 얻어먹는 신세다. 친척의 생일 파티, 남자들과 여자들은 각기 다른 테이블에 나뉘어 모여 있다. 대화 주제 역시 극과 극인데, 여자들은 칼의 짝으로 또 다른 동양계 입양아 마리(클라라 티 탄 하일만 옌센)가 어떠냐고, 즉 '안주인'으로서 적합한 얘기를 나누는 반면, 남자들은 EU 지원금 및 동유럽계 노동자 고용과 관련한 얘기를 떠든다. 프레임 분리와 내용 모두 다 전형적인 '가부장제'를 반영한다. 가부장제가 극심한 환경일수록 약자는 강자의 힘에 복속되며 수동적인 존재로 전락한다. 즉 약자는 가장의 목적을 위한 소유물로 퇴보하는 것인데, 그래서 약자 칼은 자신이 바라는 순간을 실현할 수 없다. 생일 파티에선 칼과 마리가 불쾌해할만한 인종차별이 연이어진다. 하지만 그들은 백인들에게 감히 저항하지 못한다. 칼은 집 대신 ‘축사’에서 송아지와 함께 하룻밤을 자주 보내는데, 그는 가장의 목적에 따라 처분될 수 있는 암소, 수확되어 꽁꽁 묶이는 건초더미와 별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이런 칼은 백인의 심기를 거스르지 못한다.

물론 칼은 이제 성인이 된다. 그렇다면 불의로 가득한 환경에서 독립을 선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독립할 칼이 혼자서 개척해야 할 외부는 더 혹독하다. 칼은 오토바이를 타고 마트에 가는 길목에서 제 취향의 여성을 목격한다. 이때 칼의 수직적인 운동 일부분이 회복되고, 또한 이성애자인 그의 시선도 자연스레 그녀에게 향한다. 그러나 말레네는 그 시선을 길게 포착하지도 않고, 또 칼의 시선이 그 여성에게 닿을 수 없게끔 냉정하게 ‘컷’한다. 직후 마트에 도착한 장면에서 이런 편집의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칼은 마트에 있는 여성에게도 관심이 있는 모양이지만, 물건을 사서 나온 직후 어느 한 백인이 시비를 건다. 그는 그녀를 좋아하지만 좋아해선 안 된다. 이후 체육관에 방문한다. 그러나 칼이 운동을 시작해보기도 전에 백인들이 들이닥쳐 청년은 몸을 긴급하게 숨긴다. 즉 입양된 가정 바깥에서 한국계 이민자의 삶은 더 혹독하다. 욕구를 거세하게 만드는, 또한 역량 발전을 저해하는 기득권 백인의 서슬 퍼런 눈초리가 도처에 살벌하다. 그래서 칼은 생존이라도 보장해주는 양부모의 목적에 제 몸을 고분고분 '가축화'하는 수밖에 없다.      


말레네는 노동이 끝난 이후의 ‘휴식 시간’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서 기득권의 감시가 약해지는 '밤'에만 은밀하게 드러나는 입양아의 거세당한 두 가지 욕구를 분석한다. 하나는 부조리한 환경에서 비롯된 ‘자해 욕구’다. 칼은 안드레이와 함께 술집에 간다. 거기서 덴마크인 손님들은 영어를 사용하는 안드레이, 여기에 더해 대놓고 생김새가 이질적인 칼을 무시한다. 다행히도 지지해주는 서로가 있음에, 뿐만 아니라 마리의 친구들도 그 술집에 동행함에, 백인의 방해에도 흔들리지 않고 굳건하다. 이렇게 검열을 무시하는 시공간에서 칼의 욕구는 해방되는데, 그는 술을 흥청망청 마시고 음주운전하며 해방감을 느끼다가, 직후 미끄러진 모양인지 밭에 널브러진 모습으로 이어진다. 이 시퀀스에서 칼의 망각과 파괴 욕구가 드러난다. 그는 양부모의 가축으로 전락하는 자신을 잊거나 파괴하고 싶은 것, 또한 동양인을 구속하는 덴마크인의 법을 음주운전이라는 위반으로써 전복하고 싶은 것이다. 

또 다른 욕구는 ‘인정 욕구’다. 칼은 항상 제 욕구를 유예하기에 스스로를 인정하지 못한다. 한국에 혼자 가고 싶었음에도 불구하고 카렌과 함께, 꿈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최소한 농부가 되기 싫다는 자명한 사실을 내내 은닉해왔다. 자신의 자아가 외치는 목소리가 양부모에 의해 부정당할 가능성, 심지어 그들의 심기를 건드려 생존을 위협받게 될 상황을 경계한다. 그러나 자신을 부정하는 것 자체가 정체성의 위기를 드러낸다. 이런 와중에 안드레이와 마리는 서로를 있는 그대로 수용한다. 특히 이들은 이방인이기에 서로의 처지를 더더욱 공감한다. 생일파티엔 마리 외의 백인 웨이터 세 명이 더 있지만, 마리와 세 백인의 거리는 조금도 좁혀지지 않는다. 그 거리는 인종에 따라 노동을 차별한다. 분명 웨이터가 네 명인데도 불구하고 생일 파티에서 백인에게 샴페인을 따라주는 웨이터는 마리에 그친다. 즉 동양계 입양아가 노동자로서 인정받으려면 백인보다 더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이렇게 배척당하는 칼과 마리는 자신들의 머리를 지긋이 상대 어깨에 기대며 아무 조건 없이 서로를 맹목적으로 지지한다. 이때 카메라가 빙글빙글 회전하여 하단에 위치해있던 칼과 마리가 천장 부근에 매달린다. 그들은 이방인들이 이해받는 세계로의 ‘전환’을 갈망하는 것이다. 동시에 이 뒤집힘은 그들이 천장에 매달리기에 곧 추락할 것처럼 불길하다.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힘없는 남성과 여성이 아무리 연대한다 한들 기득권에 온전히 대항하기란 버겁고, 오직 그 순간의 위안에 그치기 때문이다.

이 직후부터 칼의 욕구는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지 아니하고, 대신 지긋이 상상하며 음미할 뿐인 '상상계'에 갇힌다. 칼은 구체적인 육체를 가진 대상을 욕망하지 않는다. 대신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엉클 분미>에 등장하는 '유령'과 흡사한 투명한 대상을 상상하고 욕망한다. 덴마크에서 만날 수 없는 생모와 더불어, 직접 만날 수 있는 마리조차도 상상 속에서만 함께 춤춘다. 현실에서 칼의 욕구가 실현되면 그의 처지가 불안정하게 뒤집히기 때문인데, 그런데도 자아를 유지하기 위해선 제 욕구를 포기해선 안 되기 때문이다. 현실에선 칼이 원치 않는 장래가 연거푸 강요되고, 한국계인 칼을 축하하기 위해 양부모는 ‘중식당’에 데려가기에, 이 부조리한 현실에 잠식당하지 않고 어떻게든 정체성을 지켜내기 위해서 미약한 상상으로 현실에 저항한다. 중식당에서 소환된 칼의 친모는 덴마크인이 규정하려는 추상적인 동양인의 이미지를 거역하고, 한국계라는 구체적인 사실을 칼에게 제공한다.      


이 상상은 오직 칼만 안다. 유령을 응시하는 칼의 시선을 카렌이 이상하게 쳐다보듯, 현실에선 객관적인 효력을 갖지 못하는 공허한 것이다. 하지만 전혀 의미가 없진 않다. 현실에서 칼의 정체성이 부정당하더라도, 상상은 칼의 자아를 지지하며 무너지지 않을 용기를 제공하고, 현실에서 자신으로 살아가게 만드는 의지를 드높인다. 상상계에서 위안을 받은 칼은 본격적으로 양부모와 자신을 분리한다. 양부모는 칼이 덴마크인 친구들과 교제하길 바라지만, 부모에 의한 운행을 거부하는 격정적인 핸드 헬드와 달리 인으로 안드레이에게 찾아가 이방인간의 깊은 우애를 돈독히 쌓는다. 그간 캐런과 한스가 구성한 숏에 칼은 늘 동행해야만 했다. 칼은 이를 거부하고 서서히 ‘프레임’을 나눈다. 카렌은 샌드위치를 주겠다고 하는데 정작 칼은 심드렁한 태도를 보일 때, 모자는 각기 다른 숏에 위치한다. 또 한스의 수술로 한국 여행이 취소되고 농장을 강제로 물려받을 처지가 되자 아들은 부모의 숏으로 다시금 봉합되지만, 칼이 그 지시를 거부하며 또다시 숏은 분리된다. 더 이상 양부모의 시선에 의해 칼의 운동이 규정되지 않고, 그 자신만을 포착하는 카메라 속에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이로써 평온해 보이던 집에 '균열'이 인다. 그 균열은 본 작품을 지배하는 16mm 필름의 '그레인'과 일맥상통한다. 평온해보이지만 노쇠하고 부조리한 화면을 깨트리는 이방인의 저항인 것이다.

칼은 마치 균열 사이로 빠져나가듯 한국으로 향한다. 그는 쥐불놀이를 즐기던 순간의 한국을 기억하고 고대한다. 칼이 원하는 잔상은 분명 오늘날 대한민국에 일부분 보존되어 있다. 정자에서 도란도란 수다를 떠시는 할머니들, 버스정류장, 시장 등 칼의 발길이 닿고, 그가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공간이 그렇다. 이때 칼은 운동을 일부분 회복하고, 카메라도 그에게 일조한다. 그러나 칼은 또다시 멈춘다. 현재 대한민국을 잘 아는 내지인들이 탑승하는 '버스'에 동행하지 못하고 홀로 덩그러니 남는다. 그 당시 칼을 응시하는 카메라는 멈춰 있어서, 만약 칼이 버스에 탔다면 그는 프레임 밖으로 빠져나가 존재할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또 생모로 추정되는 여인을 목격했을 때도 그녀에게 말 붙일 수 없거니와, 새로운 가정이 생긴 그녀 뒤를 졸졸 따라가지도 못한다. 이때도 카메라는 멈춰있으니, 만약 칼이 생모를 따라갔더라면 그는 저 멀리 사라졌을 것이다. 즉 고향에서도 칼은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존재할 수 없다. 내지인의 방식을 따르면 그는 존재할 수 없게 되고, 칼이 원하는 삶을 복원해주는 오랜 옛날의 고향은 오늘날에 사라져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칼의 한국 여행은 실제의 경험인지, 아니면 그저 꿈이나 상상에 그친 것인지 혼란스럽게 처리된다. 그저 상상일 수도 있고, 현실이었지만 부정당했기에 삭제된 경험일 수도 있는 것이다.   

   

결국 자신을 내친 한국이 아니라 그를 포용해준 덴마크로 되돌아간다. 하지만 과거의 부조리한 덴마크로 회귀하진 않는다. 형식적인 환대가 아니라, 진정으로 그의 온 존재를 다시 입양한다. 이로써 칼을 상징하는 운석은 두둥실 떠오르며 수직적인 운동을 오롯이 회복한다. 진정한 환대의 조건은 기득권이 더는 약자를 복속하지 않아야 한다. 한스는 칼에게 무례를 범한 친척을 단단히 경고하며 아들이 위축되지 않을 환경을 조성한다. 이후 일방적인 언어를 상호 존중의 언어로 전환한다. 칼은 한스에게 "아빠, 나는 농부가 되고 싶지 않아요"라고 고백하며 자신을 회복한다. 이때 칼은 지금까지 롱숏으로 멀어지던 촬영과 달리, 카메라를 향해 수직적으로 걸어오며 비로소 제게 가까워진다. 카렌 역시 유산된 태아의 대체품이라는 목적을 칼에게 투영하지 않고, '더 멋진 아이'라며 독립적으로 대우한다. 비로소 그 순간 카렌 곁의 칼은 클로즈업되며 그 자신으로서 온전히 존재한다.

즉 말레나는 자신을 비롯한 한국계 국제 입양아들의 처지가 가축, 그것도 액자 속에 갇히거나 조각으로 고정된 젖소의 처지와 별 다를 바 없었다고 분석한다. 그 처지를 운석, 가축과 같은 상징으로 돌려 말하며 감상자의 뇌리에 더욱 깊고도 강렬하게 각인될 수 있도록 연출한다. 동시에 현실의 시간을 자르지 않고 고스란히 보존하는 ‘롱테이크’에 ‘비전문배우’들이 보여주는 날것의 표현을 담아내어 한국계 입양아의 ‘현실’을 생생하게 반영한다. 그런데 이 리얼리즘엔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 곧 입양아들이 주체적일 수 있는 희망 역시 담긴다. 말레네는 현재를 고스란히 반영하면서도 그 사실에 마냥 매몰되지 않는다. 입양아들의 입은 열리고 하반신은 유연해질 미래가 허황된 낙관이 아닌, 현실적인 양식에 의해 역으로 실현될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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