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2024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수 Mar 27. 2024

하마구치 류스케,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귀와 피부를 길게 열어 두어라

하마구치 류스케(Ryusuke Hamaguchi),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Evil Does Not Exist) - 귀와 피부를 길게 열어 두어라

최근 글램핑장 및 골프장 개발 논의가 심각한 환경 파괴 의제로 부상하였다. 언뜻 보기에 글램핑장, 골프장은 도시 개발이나 재건축 등에 비한다면 나름 친환경적인 것만 같다. 외관상으론 녹림이 우거져있고, 새들과 날벌레들이 지저귀고 있는 이미지이니 말이다. 그러나 이는 눈속임이다. 글램핑장에 버려지는 쓰레기는 인접한 자연 환경을 파괴하고, 골프장을 유지하기 위해 동원되는 천문학적인 규모의 수자원역시 크나큰 환경 파괴와 자원 불평등을 초래한다. 무엇보다 개발 전까진 만인이 접근할 수 있음과 더불어, 오늘날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자연은 동식물 최후의 보루다. 하지만 개발로 인해 소수 부르주아만 접근 가능한 환경으로 퇴보하고, 이로써 자원을 극소수가 점유하기에 환경 못지않게 민주주의 역시 저해한다. 즉 소수의 사사롭고 불필요한 쾌락을 위해 만인의 접근권과 환경 파괴를 일삼는다는 점에서 아주 크나큰 ‘불의’라고 규정할 수 있다. 하마구치 류스케가 신작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에서 탐구하는 ‘악’역시 이와 같다.     


1978년 가나가와현 태생의 하마구치 류스케는 2010년대부터 주목받기 시작해, 순식간에 일본을 대표하는 국제적인 감독으로 자리매김한 시네아스트다. 류스케의 작품은 늘 '무지'에서 출발한다. 물론 백지 같은 무지가 아니다. 착각과 오해, 친밀함과 흐린 눈, 곧 어쭙잖은 앎에서 시작한다. 잘 안다고 생각했던 통념 및 관계에 무지가 침투하고, 이로써 균열이 발생하며 사건이 촉발된다. 그 무지는 '힘'에서 비롯한다. 류스케는 데뷔한 이래로 늘 ‘관계’를 탐구해왔는데, 상대의 가능성을 제한하고 서로를 제게 가두려는 배타적인 관계로 극은 출발한다. 이러한 '폭력'에 의해 나 자신은 다만 스스로만 알거나 ‘나에 의한 타인’을 알뿐, 진정한 상대를 모른다. 그 통제에서 벗어난 앎이 어느 순간 무지를 질타한다. 

또한 서로가 폭력으로써 통제하지 않는다고 한들, 개개인은 모두 각자를 둘러싼 힘에 의해 변화한다. 그래서 무지가 당연하다. 만나고 헤어지며 재회하는 그 순간 마디마디에 내재한 힘이 익숙하고 당연한 것을 늘 변형시키거나 심하면 붕괴시킨다. 그래서 앎은 낯섦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잠시 직면할 수 있으며, 류스케는 그 앎을 도래하게 만드는 진짜 '친밀함'을 고찰한다. 그의 작품에서는 여러 사람들과의 토론, 대화, 하나의 대상을 여러 각도에서 조명하는 다양한 매체의 접근, 대사를 반복하며 깊게 몰입하였을 때 발생하는 앎을 부각한다. 그래서 류스케의 작품은 ‘롱테이크’도 잦다. 하나의 앎을 위해선 다양한 방법론과 아주 긴 호흡이 필요한 법이기에. 

다만 류스케의 앎은 통달로 끝나지 않는다. 그 이후 변형될 앎, 결국 또 다른 무지와 ‘열림’을 궁극적으로 긍정한다. 그래서 류스케의 작품에서는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사람의 입체적이고 변덕스러운 심리, 어떻게 펼쳐질지 알 수 없지만 열려있기에 행복한 시간, 상상력, 현실을 달리 보는 다양한 예술로 가득 차있다. 이에 류스케의 작품은 '연평도 포격', '도호쿠 대지진'이라는 현실의 특정 사건이나 하루키, 입센 등 소재의 본질에 다가가려는 깊고 심오한 사유를 선보이면서도, 동시에 그것들이 다양한 매체와 상상력을 전유하며 발생할 가능성에 환호한다.      


그래서 류스케는 신작에서도 영화가 다루는 주제에 가장 적합한, 이로써 그들을 잘 알게 할 수 있는 연출을 고안한다. 그것은 도입부의 '로우 앵글 숏'으로, 이는 영화의 배경 ‘미즈바키’의 특성 및 구성원들이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을 가시화한다. 인간이 고개를 직각으로 꺾어 올려봐야만 가능한, 또는 아예 땅바닥에 누워 하늘을 관조해야 가능한 구도가 도입부에서 천천히 연이어진다. 이 촬영은 미즈바키의 땅에 거의 누워 살 정도로 친숙한 구성원의 시점을 반영한다. 왜냐하면 영화에선 ‘시점 숏’이 연어어지기 때문이다. 간접적으로는 인간의 시점을 반영한 ‘아이 레벨 쇼트’를 이용해 꼬마의 눈높이에 맞춰 하나를 관조한달지, 직접적으로는 토론과 회의에 참석하는 인물들 간의 '리버스 숏', 외에도 땅와사비, 죽은 새끼사슴, 타쿠미 자동차 백미러의 시점과 일치하는 숏들이 등장한다. 땅와사비의 동공에 상응할 수 있는 ‘렌즈’에 눈을 맞추는 타쿠미, 마찬가지로 마유즈미를 응시하는 듯한 죽은 새끼사슴 부근에 위치한 카메라 등 이들 모두의 시점이 다 '낮기' 때문에, 도입부의 로우 앵글은 직접 고개를 꺾어 하늘을 올려다보는 하나만의 것으로 축소하긴 어렵다. 미즈바키에 뿌리를 내린 모든 구성원들이 올려다볼 하늘에는 나뭇가지가 끝도 없이 뻗어나가며, 무궁무진한 형태로 굽이친다. 그 길고도 긴 나무들의 행진을 가히 무한에 필적하는 '트래킹 숏'에 담아낸다. 로우 앵글과 트래킹 숏을 결합한 길고도 경이로우며 거룩한 롱테이크가 구성원들을 에워싼다.

즉 미즈바키에 정착한 존재는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에 속해 있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세계를 반영하던 로우 앵글의 피사체가 변화한다. 널따란 하늘은 대뜸 타쿠미의 얼굴로 바뀌며, 이제 구성원을 포착한다. 그는 끝도 없이 뻗어나가는 나무 일부를 벌목한다. 그 과정에서 자연에 관한 다양한 상상력을 자극하던 영화의 신묘한 음악도 끊긴다. 이후에도 추상적인 음악은 아이들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등 비일반적이고 예측 불허한 신묘한 움직임을 부각한다. 그 음악이 끊긴 이후 벌목이라는 단 하나의 행위만을 명확하게 지칭하는 '톱질 소리'가 끼어든다. 타쿠미의 행위도 마찬가지다. 나무는 인간이 차마 가늠조차 할 수 없는, 미지에 둘러싸인 스스로의 내재성에 따라 끝도 없이 뻗어가지만, 인간은 그 나무를 '땔감'이라는 특정 목적으로 '단축'시킨다. 길고 긴 나무는 마디마디 절단되고, 심지어 그조차도 잘 태워지게끔 땔감의 형태로 동강난다. 이때 끝없이 이어지던 영화의 트래킹 숏 역시, 카메라가 고정되어 움직임이 제한되는 '패닝'으로 바뀐다. 즉 자연이 무한이라면, 인간은 유한이다. 자연은 사슴이 어디로든 뛰어다닐 수 있게 자유를 허한다면, 인간은 총소리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는 단순하고 획일화된 행위로 축소한다.  

   

자연과 동화되는 카메라는 이것으로만 그치지 않는다. 류스케에게 자연은 '롱숏'이다. 클로즈업과 달리 롱숏은 ‘산만’하다. 클로즈업은 하나의 피사체만을 프레임에 한가득 채운다. 그래서 감상자는 하나의 대상만을 오롯이 집중할 수 있다. 대신 롱숏은 거대한 세계 전체를 프레임화하고, 그 광대한 풍경에 담긴 것은 무궁무진하기에, 얇고 넓은 집중을 요구한다. 그래서 결말의 하나 실종 소동은 자국의 전원마저 '식민화'하려는 자본주의의 침략에 기인하기도 하지만, ‘길’이 단 하나가 아닌, 사슴의 발자국과 야조의 깃털 등이 시시각각 혼을 빼놓는 롱숏의 다변화도 원인이다. 그 롱숏에서 인간은 클로즈업 상태에서 ‘주연’이었던 지위이자 자격을 박탈당한다. 하나는 항상 늦는 타쿠미를 기다리지 않고 늘 걸어서, 자연이라는 샛길을 해찰하며 하교하는데, 류스케의 롱숏이 하나가 그럴 수밖에 없는 심리를 증명한다. 하나와 재회한 타쿠미는 딸을 업고 귀가한다. 그 과정에서 분명 카메라는 부녀를 트래킹 숏으로 따라다닌다. 그런데 인물과 카메라의 거리는 롱숏, 그것도 익스트림 롱숏으로 아득하게 멀다. 거기엔 타쿠미의 입에서 언급된 무수한 종류의 나무들과 이들이 뿌리내린 둔덕이 함께 포착되며 부녀는 아주 조그맣게 소외된다. 인간은 마치 자연을 포착하기 위한 수단, 카메라가 움직이며 자연을 포착하기 위한 도구쯤으로 전락한다. 여기에 더해 하나의 꿈에서, 녹은 호수의 수면 위로 건너편의 나무가 비치는 장면도 마찬가지로, 자연은 불가능할 것만 같은 공존을 지금 여기서 어떻게든 실현한다. 액자 속에 담긴 타쿠미의 아내이자 하나의 엄마가 속세에서 가족과 함께할 수 없는 것과 달리 말이다.

그 풍경은 무성 영화적이다. 자연을 품은 롱숏에는 ‘침묵’이나 추상적인 음악이 결합하는 반면, 인간이 중심이 된 숏에는 클로즈업과 언어가 함께한다. 여기에 더해 카메라가 핸드 헬드와 달리 인을 이용하여 인간과 동화되는 과정에서, 커다란 자연을 반영하는 롱숏과 길고 긴 트래킹 숏을 내려놓는다. 지극히 유성영화적인 연출과 달리, 여백을 열어두는 연출에서 탄생한 영화는 어디로 튈지 가늠하기 어렵다. 롱숏에 내재한 가능성 자체가 무궁무진할 뿐더러, 추상적인 음악은 풍요롭게 뻗어가는 자연의 운동을 방치하거나, 심지어 동조하기 때문이다. 이런 와중, 인간의 발길이 닿고 입이 열린다. "이거 옮길 게요"라는 말이 흘러나오자 가능성은 축소되어 그 다음 숏이 당연하게 그려진다. 물통을 쥔 손과 옮기는 다리는 예측을 벗어나지 않는다. 설명회에서도 마찬가지로 내지인과 외지인이라는 정체성이 얼굴에 입혀져 있기에 나름 차이는 있지만, 결국 인간의 얼굴만 프레임에 한가득 채워지고, 여러 현상 중 무언가를 가리키고 지칭하는 발화가 그들의 입에서 새어나와 추상적인 음악과 무한한 침묵을 몰아내기에 인세는 그만큼 단조롭고 따분하다.

그래서 타쿠미에게 부여된 설정, '건망증'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롱숏 속에서 부녀는 잊힌다. 부녀를 둘러싼 풍요로운 것들에 감상자는 혼을 뺏기며, 실제로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구성원들이라면 더더욱 집중의 끈을 놓는 것이 당연하리라. 타쿠미가 하나를 데리러 가야 하는 아비로서 본분을 잊는 것, 타카하시가 타쿠미 설득이라는 목적을 잊고 도끼질에 동참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자연에서 비롯한 그들의 산만한 '흐름'은 '편집'을 지배한다. 마치 끝없이 졸졸 흐르며 전혀 관련 없는 듯한 먼 거리의 요소들을 유기적으로 이어내는, 주민들이 필사적으로 지키려 하는 ‘샘물’처럼 말이다. 흥미롭게 편집된 시퀀스는 두 개를 뽑을 수 있다. 먼저 하나의 꿈 시퀀스로, 여기엔 오후에 타쿠미와 함께 숲을 누비던 기억이 반영되어 있다. 그 시퀀스의 이어짐이 무궁무진하다. 얼음은 그 상태로 항구적이지 못하고 결국엔 녹고 흐르며 저 하늘을 투영하고, 사슴의 발자국을 따라갔다가 맹금류의 깃털 및 비행을 마주하는 등 흐름이 거의 기체의 것과 같다. 바로 그 자연을 인간은 '글래머러스'라는 하나의 목적으로 제한하려 하는데, 이때 두 번째의 편집이 야욕을 과감하게 저지한다. 류스케는 보조금을 타내려는 목적으로 자연을 파괴하려는 인간의 야욕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를, 자연은 단순히 '매혹적임' 이상으로 신비롭고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글램핑장 설명 영상을 과격하게 잘라낸 이후 연결한 하나의 발걸음으로 증명한다. 그 이후 하나는 대자연의 풍요와 조우한다.   


물론 비일반적인 편집은 속세를 반영한 시퀀스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비일반성, 독특함은 첨예하게 다르다. 도입부에서 끝도 없이 뻗어나가는 나뭇가지의 연속처럼 자연에 의거한 편집은 '무한한 잇기'라면, 속세에 의한 편집은 그 나무를 쪼개고 자르듯, 또한 샘물을 물통에 가두듯 흐르는 것을 ‘급박하게 저지한다.’ 주민들은 설명회에서 글램핑장 관리 체제를 어떻게 확립할 것인지 질의한다. 거기서 류스케는 냉정하고 과감하게 숏을 잘라내며 답변하는 장면을 보여주지 않는다. 제 이익만 생각하는 인간, 무궁무진한 자연과 공존할 생각이 없는 인간에겐 가능성을 확장하는 이어짐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나가 실종된 시퀀스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침략은 사슴의 이동권을 제한하고, 그들이 살아갈 터전을 오염시키거나 박탈한다. 그 폭압적인 손아귀는 사슴과 동등하게 살아가는 미즈바키 주민들마저 덮칠 것으로, 총소리는 끊이지 않고 외지인의 발길이 떠나지 않자 소녀는 실종된다. 그 순간 롱숏을 가득 채우던 음악은 끊기고, 나무의 날카로운 가시와 피, 상처가 클로즈업된다. 안 그래도 제한적인 인간의 육체를 더 제약하는 폭력이 엄습하며 가능성은 고개를 숙인다. 

그래서 실종된 하나를 찾는 사람들로 이뤄진 후반부의 전개도 충분히 예측이 가능하거나, 가능성을 기대할 수 없는 그들에 의해 반전이 이어지진 않을 것만 같다. 그렇기에 타쿠미의 타카하시 살해는 그만큼 돌출적이다. 뻔한 인간의 기대를 거스르고, 전혀 예상치 못한 선택을 내리기 때문이다. 인간인 그에게 이런 연결이 가능한 이유는 결말의 타쿠미는 클로즈업되지 않고 롱숏에 담기며, 거대한 안개를 뿜어내는 자연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 이렇게 동족을 죽이고 사슴과 동화되는 부녀의 행방을 조금도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타쿠미와 하나를 제외하곤 인간에게 새로운 것을 생성하는 편집은 불가능하다. 영화의 특권인 편집은 속세에서 늘 부정적으로 쓰인다. 이유는 인간의 귀가 닫혀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리버스 숏’에서 마주한 두 사람은 서로의 눈빛을 응시하며 의견을 흡수한다. 미즈바키 내지인들끼리 있을 때 리버스 숏의 일반적인 용례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외지인들과 내지인이 첨예하게 대립할 때, 리버스 숏은 서로가 흡착되는 형식이 아니라 갈등의 연출로 변모한다. 내지인들은 생존을 위해 외지인이 밀어붙이는 불의를 수긍할 생각이 없고, 기업인들은 제 이익만 생각할 뿐 개발에서 비롯되는 윤리적 문제에 귀를 막고 모순과 부실한 정책만 내뱉는다. 이후 타카하시와 마유즈미가 도쿄로 돌아간 시퀀스에서 이들의 독선은 더 적나라하게 가시화된다. 개발 전문가는 주민들의 의견을 수용하는 척, 결국에는 도돌이표 '조삼모사'일 뿐인 대책을 시정하고, 사장은 그것에 환호한다. 비용 절감과 이윤 추구라는 탐욕에 빠진 그들은 현실이 아니라 화상 채팅 '모니터'에 갇힌 모습이다. 그들은 현실, 그것도 내지인들이 사는 거주지에 직접 방문 및 참여할 생각이 없다. 본인의 편의와 스케줄을 위한 안온한 표상에 갇혀 그 너머로 확장될 여지를 사전에 차단한다.     


그래서 류스케는 신작에서도 과거와 똑같은 말을 되풀이한다, 부디 "들어라." 내지인들은 제 이익과 무관한 이야기라도 필히 청취한다. 오히려 본인을 귀찮게 하는 이야기도 깊게 듣는다. 그래서 타쿠미는 ‘심부름꾼’이 된다. 회장을 위해 꿩의 깃이 눈에 띄면 주워주고, 우동 가게에서 물 공급이 부족하다하니 기꺼이 두 팔 걷어붙이고 샘물을 떠다준다. 이로써 도쿄와는 다른 미즈바키만의 특유하고도 고유한 맛의 우동이 완성되고, 꿩의 깃을 이용해 악기도 탄생할 것이다. 회장이 '악기'를 말하자, 손님들을 떠나보낸 이후 타쿠미의 손이 '피아노'로 향하고 이를 연주했을 아내를 회고한다. 즉 타자의 의견을 청취하면 다양한 가능성이 열린다. 설명회에서도 마찬가지로 주민들은 각자 전문적인 분야가 있다. 누군가는 정화조와 식수 문제, 또 다른 누군가는 글램핑장 관리 문제를 거론하고, 주민들은 서로의 다양하고도 깊은 식견에 박수를 친다. 이로써 글램핑장 개발이라는 기업인들의 목적을 무너뜨리고 공존의 가능성으로 나아간다. 

그래서 류스케는 말하지 않는 자연은 '잘 보고', 말로써 표현하는 인간에겐 ‘잘 들을’ 수 있는 디렉팅을 고안한다. 기교 넘치는 전문배우에 비해 표현력이 다소 떨어지는 비전문배우들을 기용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심지어 류스케는 안 그래도 부족한 비전문배우들의 감정표현 마저 덜어내고, 오직 대사만 우직하고 또렷하게 말하도록 디렉팅한다. 이로써 감상자는 그들의 표정이나 몸동작을 보기보다는 대사만을 열심히 듣는다. 굳이 볼만한 것이 적기 때문이요, 귀로써 파악할 게 더 많기 때문이다. 이로써 감상자가 미즈바키에서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세계를 보여주는 카메라, 진술하는 주민들 덕분에 충분히 동화될 수 있다.

이렇게 잘 들을 수 있는 환경과 표현에 길게 참여해야 한다. 또한 들은 것을 서툴더라도 몸소 실천해봐야 한다. 마유즈미와 타카하시는 미즈바키로 향하는 차량에서 긴 시간을 할애해 서로의 깊은 속내를 이해한다. 왜 이직을 했느냐, 퇴직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 소개팅에 있어서 여성들의 취향, 향후 계획 등을 말이다. 길고도 긴 서로 간의 대화가 끝나자 류스케는 '드라이브'하는 그들의 카를 비춘다. 그들의 차는 비로소 향하게 된 것이다, 서로의 앎이라는 공존을 위한 목적지로. 이후 타쿠미의 집에서 타카하시는 땔감을 베어 본다. 당연히 도끼질을 처음 하는 그는 아주 서투르다. 하지만 타쿠미의 조언을 적극적으로 듣고 이후 몸에 반영하자 금세 땔감을 잘 베게 된다. 또 마유즈미와 타카하시는 직접 샘물을 길어보는데, 이 현장이 '롱테이크'에 담긴다. 더해서 그들의 발걸음에 상응하는 핸드 헬드-달리 인 역시 따라한다. 길게 듣고 체감하며 나를 내려놓고 그들이 되어본다. 그때 비로소 조금이나마 어렴풋이 미즈바키를 알겠다.      


하지만 류스케는 낙관하지 않는다. 타쿠미는 내지인의 목소리에는 귀를 열지만, 마유즈미와 타카하시에게는 철저하게 귀를 닫는다. 내지인들은 귀를 열 수 없다. 귀를 열었다간 기업인들의 파렴치하고도 날카로운 발화가 자신들의 고막과 터전을 찌를 것이다. 뿐만 아니라 타카하시와 마유즈키, 여기에 더해 그들이 대변하는 전문가와 사장 역시 내지인들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았다. 주민들이 주장하는 정화조 및 관리 문제에 확실한 대책을 내놓지 못했고, 단지 타쿠미나 타카하시를 관리인으로 임명하는 허술한 방책만 마련했을 뿐이다. 그 모든 귀 닫음의 결과가 총 맞은 사슴, 그 이후 타쿠미의 타카하시 살해와 쓰러진 하나의 모습으로 이어진다. 하나가 실종된 순간 타쿠미의 집엔 ‘연기’가, 숲에 ‘어둠’이, 겨우 찾은 들판엔 ‘안개’가 가득하다. 이동할 수 없는 환경, 또한 보거나 들을 수 없어서 절박해진 환경, 그렇게 도망칠 수 없는 순간 사슴이 가히 유일하게 공격적으로 변한다는 말처럼 미즈바키 주민들 역시 최후의 일격을 가한다. 눈은 감기고 다리는 멈춰져가는 최후의 시퀀스에서 세계는 어둑해지며 닫히듯, 인간의 이기심이 자연의 가능성을 제한해가는 그곳엔 오직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류스케는 최후의 목소리를 필사적이고도 간절하게 청취한다. 트래킹 숏과 편집이 끝도 없이 이어질 수 있도록, 그렇게 도달한 광대한 롱숏에서 다양한 존재의 삶이 뻗어나갈 수 있도록. 

매거진의 이전글 말레네 최, <조용한 이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