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은 우리의 의지를 일으키는 목적지
카메라는 인간을 둘러싼 물리적 실재를 객관적으로 포착하고자 하는 열망에서 발명되었다. 그래서 꾸며지지 않은, 자연스럽고 진솔한 감정을 포착하기 위해 실제 친분이 있는 배우들을 캐스팅하기도 한다. 최근 국내에 개봉한 <임파서블 러브>가 대표적인 사례다. 주연 배우 ‘버지니아 에피라’와 ‘니엘스 슈나이더’는 실제 연인 관계로서, 영화 속 가까워지고 멀어지는 관계를 실감나게 표현했다. <임파서블 러브>의 사례는 배우들에게 호의적이고 친화적이지만, 프랑스 영화에선 '부정적인 감정'이나 '아쉬움' 등을 표현하기 위해, '이혼했거나 헤어진 커플'을 영화에 공동 캐스팅하여 불편한 두 얼굴을 맞대게도 한다. 크리스토퍼 오노레의 <마법에 빠졌어요>에 캐스팅된 ‘키아라 마스트로얀니’와 ‘뱅자맹 비올레’가 그렇다. 이들은 2005년에 이혼한 이후 약 13년이 지나 영화에서 재회하며 회고의 정서를 절절히 드러냈다. 또 클레어 드니는 <렛 더 선샤인 인>에서 ‘줄리엣 비노쉬’와 그녀에게 심한 모욕을 한 ‘제라드 디파르디유’를 공동 캐스팅하였다. 이때에는 둘을 화해시키며, 불편한 관계를 역으로 이용한다. 이 같은 시도가 트란 안 홍에 의해 이어진다. 줄리엣 비노쉬는 <프렌치 수프>에서 사실혼 관계였던 브누와 마지멜과 재회한다.
1962년 다낭 태생의 트란 안 홍은 베트남계 프랑스 영화감독이다. 베트남 전쟁으로 사이공이 함락되자 가족들과 함께 프랑스로 이민을 갈 수밖에 없었던 트란 안 홍은 떠날 수밖에 없었던 조국으로 되돌아가는 작업을 해왔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회고의 정서로 가득 차 있으며, 등져야만 했던 환경을 아주 세밀하고도 아름답게 기록한다. 물론 프랑스에서도 작품을 연출하였지만, 향수를 서정적이고도 섬세하게 재현하는 베트남에서의 영화가 더 높은 평가를 받는다. 트란 안 홍에게 베트남은 '상실'로 가득한 땅이다. 감독의 개인적 서사뿐만 아니라, <씨클로>에서처럼 일반 시민의 삶조차 일말의 휴식마저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다. 제게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우울증'에 빠져 자신을 가두고, 상실된 것을 '제사'의 형태로 보존한다. <그린 파파야 향기>에서 '처음'이라서 아름답고 감미로웠던 진귀하고도 순수한 경험들, <여름의 수직선에서>에서 가부장제에서 불가능으로 전락하는 여성의 섬세한 연애를 조심스럽게 붙잡는다.
트란 안 홍은 역사 속에서 소중한 것을 파괴하는 자가 '남성'이었다고, 반면 그 '공백'을 메운 존재가 '여성'이었다고 분석한다. <그린 파파야 향기>에서 가장은 가족을 등지고 소년은 여자들에게 짓궂다. 그런 남성이 돈을 빼돌린다면 여성은 ‘금고’에 돈을 비축하며 남성이 앗아간 소중한 일상을 재건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외에도 <여름의 수직선에서> 속 남성은 바깥을 누비며 가정에만 머무는 여성을 배신하는 반면, 여성은 배에 생명을 품고 보존하며 극적인 대비를 이룬다. <씨클로>에선 부르주아 여성이라는 특정 사례를 제외하곤 남성은 포주이자 갱으로서 여성을 매춘부, 전업주부로 포획하여 유린한다.
트란 안 홍은 세상을 지탱하는 여성의 '사랑'을 부각하고, '여성만 접할 수 있는 이미지'를 매번 붙잡고 예찬한다. 가정을 이끄는 여성들이 항상 머무는 '부엌', 그 안에 즐비한 식재료를 가르면 드러나는 '속살'과 '씨앗'을 섬세하게 비춘다. 베트남에서 소중한 것들을 비추던 트란 안 홍이 신작에선 프랑스의 감미로운 것들을 비춘다. 여전히 그가 선호하는 '부엌'에서 식재료, 조리 과정, 요리를 비추는 ‘미식 여정’으로 말이다.
도입부에서 트란 안 홍은 미식에 이르는 여정이, 공허와 무의미로 가득 찬 어둠을 개고 아침을 불러오는 작업이라고 지긋이 돌려 말한다. 도입은 아직 동이 온전하지 트지 않은 새벽녘이라서 어둡다. 아득하리만큼 이른 시간부터 요리사 위제니는 밭에서 작물을 캐느라 아주 분주하다. 트란 안 홍은 이 현장과 동화되다시피 카메라를 밀착한다. 위제니의 얼굴을 '클로즈업'하여 그녀의 행동과 표정을 감상자에게 고스란히 전달하고, 두껍게 쌓인 흙을 힘겹게 파내는 감각을 '핸드 헬드'로 가시화하며 말이다. 이윽고 위제니가 흙 속에서 작물을 모두 캐자 지평선 너머로 해가 올라왔는지 영화가 밝아진다. 미식은 어둠 속에 구멍을 내어 빛이 들어오게 만드는 일이요, 불쾌나 거칢으로부터 부드러움, 심미성으로 나아가는 여정이다.
위제니와 더불어 비올레트 등 고용된 노동자들은 거칠고 험난한 과정을 거쳐 상쾌한 아침을 불러온다. 이들의 노동이 남들은 쿨쿨 자고 있는 이른 아침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견습생으로 들어온 폴린의 반응에서 확인할 수 있고, 조리를 다 마치면 얼굴이 시뻘게질 정도로 업무 강도는 고되다. 그녀들은 다듬어지지 않은 날것의 '재료'를 캐고 손질하여, 레시피라는 '관념'의 목적에 맞게끔 한 차원 고풍스럽게 고양시킨다. 이를 트란 안 홍의 ‘편집’에서 느낄 수 있다. 두 여인이 각 재료를 손질 및 조리하고 이후 다른 재료로 넘어가는 사이사이를 필히 ‘컷’한다. 재료와 재료 사이의 시차는 전혀 없기에, 사실 물 흐르듯 순탄하게 이어지기에 ‘롱테이크’로 포착해도 별 탈 없는데도 필히 잘라서 다른 숏을 이어붙이는 이유는 그만큼 기존의 상태를 초탈했다는 것을 의미하리라. 탁하던 것이 맑아지고, 털이 수북한 것이 매끈해지는 등 재료들은 이전 숏과 결별하고 다른 숏을 점유해야할 만큼 달라진다.
그래서 위제니는 더더욱 클로즈업되어야만 한다. 관념을 실현하기 위해 억세고도 거친 물질과 가까이서 치열하게 사투를 벌이는 위제니는 물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클로즈업만이 적합하다. 또 아무리 다가가도 물질의 한계에 부딪히며 그 너머를 포착할 수 없는 클로즈업은 재료를 깎는 노동의 힘겨움도 가시화한다. 그런데 이 힘겨운 과정을 몸소 감내하는 위제니와 달리, 그녀의 밭일이 끝난 직후 포착된 도댕은 클로즈업과 핸드 헬드가 결합된 연출로써는 드물게 포착된다. 비올렛이 욕조에 받아놓은 온수로 뜨끈하고도 개운하게 목욕하는 그는 멀리서 부드럽게 '줌인'된다. 거칠고 투박한 핸드 헬드라는 물리적 속성은 아주 말끔하게 정제된다. 또한 재료에 인간의 관념과 질서를 투영하는 조리를 전부 실천하지 않고, 그저 그녀들이 만들어놓은 먹음직스러운 아침 식사를 평화롭게 즐길 뿐이다. 이후 영화에선 오롯이 동이 튼다.
즉 도입부에선 19세기 프랑스 요식업계에 만연한 성 관행 및 역할이 극적으로 대비를 이룬다. 본 작품의 원전, 『도댕 부팡의 열정』을 집필한 ‘마르셀 루프’는 미식의 왕자라고 불리는 '퀴르농스키'의 도움을 받아 해당 저서를 써내려갔다. 퀴르농스키의 도움으로 프랑스 요리는 체계적인 관념을 갖게 되었다. 분류부터 각 재료에 맞는 탁월한 조리 과정 등 '원칙'을 극도로 강조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요리 원칙은 탁월한 연구와 분석, 곧 '책'에서 출발한다. 본 작품에서 '미식계의 나폴레옹'이라고 불리는 도댕도 퀴르농스키와 유사한 인물임이 이미지로 드러난다. 직접적으론 책과 가깝거나, 간접적으론 물리적 현장에서 멀리 떨어진 사색적이고 관념적인 풀숏, 롱숏에 담기기 때문이다. 물론 그 역시 조리 현장에서 원천 배제된 것은 아니지만, 구체적인 조리는 위제니가 책임지고, 대체로 현장에서 멀찌감치 유리된 채로 골똘히 책에 시선이 파묻혔거나, 폴린에게 '강의'하는 모습이 잦다. 위제니에게 중요한 신체 기관이 ‘손’이라면, 도댕은 ‘머리’다. 도댕에게 ‘입’ 역시 맛봄과 동시에 ‘말하는 기관’, 곧 관념을 현실에 투사하는 기관으로서 중요하다. 도댕과 함께 말하고 먹는 입을 즐기는 남성들 역시 마찬가지로, 후반부에 도댕을 다시 일으킬만한 아이디어를 짜지만, 정작 실행은 비올레트의 몫이다.
관념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관념을 실행해줄 사람이 없으면 아이디어는 그저 허무맹랑한 뜬소리에 그친다. 실제로 후반부에 위제니가 사망하자 도댕은 그녀를 대체할 다른 요리사들을 물색하지만, 그의 레시피를 실현할 요리사가 전무하다. 이로써 영화는 어둠 속에 빠지고, 아름답고 활기찬 아침은 친구들의 잔꾀에 의해 열리려다가도 만다. 그래서 영화 속 어둠은 체계가 잡히지 않은 카오스 그 자체의 물질성을 상징하고, 이 물질을 세세하게 규명하고 제련해야만 빛이 밝아온다. 그 과정에서 머릿속에서 계측한 바를 명령·지시하는 사람이 아니라, 실제로 관념을 실현하는 이들이 더 중요하며, 그들은 모두 '그녀들'이다. 문제는 도댕의 레시피를 하나씩 실현할 때마다 위제니는 심각한 '현기증'을 느낀다. 당연하다, 그 물질은 거칠고 날카로우며 비릿하고 때론 불결하며, 매우 뜨겁거나 반대로 아주 차갑고 심지어 무겁기 때문에 대면하는 인간의 물질에 큰 손상을 입힌다. 그 사투의 흔적인 흰 머리나 주름, 빨개진 피부색 등을 숨기지 않고 부각한다. 그렇게 노쇠해지면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마치 투명하게 연성된 콘소메가 이전 재료 상태로 돌아갈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관념을 물질로 실현하는 일은 이토록 커다란 희생을 동반하지만, 그 희생에 따른 성취를 정작 남성이 누린다. 위제니는 도댕의 수석 요리사로 유명하지만, 실제로 그녀를 가르친 것은 도댕이나 아버지가 아닌, 그녀 어머니의 공이다. 하지만 그 사실은 대외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영화에선 프랑스의 가장 잔인하고도 악랄한 미식 문화 중 하나인 '오르톨랑'이 등장한다. 오르톨랑의 맛은 매우 환상적이지만, 그 과정이 악랄하고 잔인하기에 신의 노여움을 사지 않기 위해 숨어서 먹었고, 최근에는 불법으로 규정되었다. 징벌을 피하기 위해 숨어서 맛있는 호사를 누리는 쪽은 남자들이며, 그 당시 위제니는 폴린을 견습생으로 들이기 위해 또 다른 일에 매진하고 있었다. 트란 안 홍은 편집을 이용하여 극단적으로 나뉘는 젠더를 가시화하는데, 초반부 남과 여는 함께 섞이지 않는다. 남자들이 우아하고 호사스러운 홀에서 오감이 만족스러운 연회를 즐기는 것과 달리, 여성은 식재료 및 조리 과정에서 생겨난 냄새가 혼탁하게 뒤섞인 부엌에서 남은 음식을 즐긴다. 이따금 위제니의 공을 높게 칭송하기 위해 남자들과 위제니는 하나의 숏에 섞이지만, 그 안에서도 여성은 겸손해야만 한다. 분명 위제니는 아름다운 무언가를 창조하는 '예술가'로 불릴 만 하지만, 그 표현을 한사코 거절한다.
이 미식을 누릴 수 있는 남성에게 허용된 특권이란, 바로 '목적'을 드높게 상정할 수 있다는 점이다. 도댕은 폴린에게 소스를 맛보게 하고, 이후 어떤 재료가 들어갔는지 맞춰보라는 퀴즈를 낸다. 절대미각을 타고난 폴린은 소스에 섞인 각기 다른 식재료들을 모조리 분류해내는데, 이때 트란 안 홍은 해당 식재료를 포착한 숏을 중간 중간 '인서트'한다. 지금 여기에 펼쳐진 것이 뭉쳐진 소스라면, 그 이전과 너머에서 생기 넘치는 식재료들이 쏙쏙 침투한다. 외에도 미식은 ‘네덜란드풍’, ‘교황령풍’ 등 지금 여기에서 다른 나라로 간접 여행을 떠날 수 있으며, 그 즐거움은 별을 발견하는 것보다 더욱 크다고 일컬어진다. 즉 미식은 단순한 즐거움이기도 하지만, 현재를 넘어선 무언가가 침투하는 즐거움, 곧 지금 여기를 초월하는 의지를 고취시킨다.
폴린은 도댕과 위제니 앞에선 내색하지 않았지만, 집으로 돌아간 이후엔 견습생이 되고 싶다는 의중을 내비친 모양이다. 그 이유를 영화 초입에서 유추할 수 있다. 고급 음식을 현란하게 조리하는 위제니와 비올레트의 동작은 아주 우아하고 섬세하며, 그것을 포착하는 카메라 워킹 역시 ‘발레’를 연상케 할 정도로 유려하게 미끄러진다. 그 현장은 아주 좋아 보인다. 인간이라면 응당 좋은 것을 보면 따라하거나 소속하고 싶은 군집 본능을 가졌기에, 폴린은 당연히 그녀들처럼 되길 원한다. 프로패셔널한 조리 과정뿐만 아니라, 그 결과인 미식까지도. 위제니의 사망 이후 실의에 빠진 도댕은 평범한 음식으로는 도무지 열의가 나지 않는다. 그러다가 아델 피두라는 요리사의 기상천외한 요리를 맛본 이후에야 다시금 몸을 일으켜 나폴레옹마냥 개척에 뛰어든다. 즉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누릴 수 없기에 먹고 다가가고 싶은 미식은 하나의 ‘목적지’가 된다. 그 즐겁고 아름다운 감각 때문에 어린 폴린은 그렇게 '성장'하기를 바라며, 도댕은 삶의 목적과 이유를 상정한다.
남성에게 여성 역시 마찬가지였다. 호사스럽게 식탁을 장식하는 요리나 식기류처럼 도댕의 눈에 위제니 역시 다가가고 싶은 하나의 미식이다. 도댕의 동공에 비친 목욕하는 위제니, 비너스를 연상케 하는 뒤태 나신이 그렇다. 그런데 식재료가 고급 요리로 연성되는 과정은 심히 폭력적이다. 불투명한 고체의 식재료들이 삶고 찌고 끓여져서 맑고 투명한 콘소메가 되는 것처럼, 죽임당한 식재료의 해괴한 식감과 촉감, 비린내 등을 모조리 제거해야만 훌륭한 요리가 탄생되듯 말이다. 그래서 타인을 미식의 대상, 곧 ‘성적 대상화’하는 행위 역시 마찬가지의 폭력을 동반할 수 있기에, 성애는 일방적이어선 안 되고 도댕이 위제니의 문을 ‘노크’하고 허락을 받는 상호 동등한 관계가 중요하다. 또 위제니가 허약해진 이후, 도댕은 자신의 실력을 발휘하여 그녀가 남성 손님들처럼 멋진 식사를 누리도록 존중한다. 위제니가 쓰러지기 직전엔 그와 함께 왕자에게 대접할 도전적인 코스를 연구해보자고 열의를 품었다. 상호 존중하며 서로가 축적한 경험과 지혜를 뒤섞고, 이로써 삶을 확장하며 드넓은 지평으로 나아간다. 결말에선 ‘패닝’하는 하나의 롱테이크에 시간, 계절의 변화가 신비롭게 담긴다. 직후 도댕은 아내가 아니라 요리사로 불리길 원하는 위제니를 기꺼이 존중한다. 그것이 서로에게 지금 여기 너머의 계절을 선사한다.
우리는 바로 여기서 트란 안 홍이 비노쉬와 마지멜을 캐스팅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바타이유의 사상을 짧게 언급하자면, 섹슈얼한 감정이나 감각을 자극하기 위해선 '위반'이 필요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에너지 낭비를 막기 위해, 또 사회 치안과 긴밀하게 관련된 '쾌락을 위한 성애'는 금기시되었다. 그래서 섹스는 단순히 자극에 따른 즐거움뿐만 아니라, 사회적 금기를 위반했다는 짜릿하고 해방된 감각 역시 동반하였다. 그렇기에 결혼 이후 많은 연인이 성적으로 권태기에 빠진다. 합법적으로 가능해진 관계에선 더는 위반의 아찔함과 신선함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도댕과 위제니는 아직까지 서로에 대한 감정이 절절한 것이다. 미혼인 도댕은 위제니의 방에 들어가기 위해선 실례를 무릅쓰고 늘 노크해야 하기에, 은밀하고도 조심스러운 상황에서 비롯된 자극은 배가 된다.
비노쉬와 마지멜의 관계도 위반을 동반한다. 1998년부터 이들은 사실혼 관계였지만, 2003년 이들은 결별하였고 이후의 만남은 둘 사이에 탄생한 딸, 한나 마지멜의 양육을 위한 목적이나 세자르 시상식에서 동료로서의 만남에 그쳤다. 즉 작금에 비노쉬와 마지멜은 합법적인 성애적 관계로 묶이지 않는다. 이제 서로는 다시금 불가능해진 금기와도 같다. 이 관계에서만이 가능한 벅차오르는 애틋함과 그리움, 환희가 도댕과 위제니의 심리를 효과적으로 가시화한다. 특히 위제니가 쓰러져서 도댕 곁에서 멀어지는 장면에서 정점에 이른다. 또 결별 이후 도댕이라는 배역을 빌려 감미로운 경험을 제공하는 마지멜에게 비노쉬는 그녀 자신의 것인지 위제니의 반응인지 구분되지 않는 감격스러운 표정을 선물한다. 더해서 위제니를 연기하는 비노쉬의 매력적인 외모와 육체에 마지멜은 다시금 경탄한다. 즉 한때 합법이었지만 지금은 다가가기 어렵게 된 비노쉬와 마지멜의 관계가 닿고 싶은 절절한 감정, 동시에 멀리 있기에 예의를 차려야 하는 태도를 자연스럽게 샘솟도록 만든다. 그리고 결말에서 도댕은 위제니를 아내가 아니라 요리사, 곧 그녀 자신이 불리고 싶은 정체성으로 존중한다. 그것은 비노쉬가 마지멜로부터 불리고 싶은 정체성이기도 하다. 요리사, 곧 배우라는 직업적 정체성으로 그들은 존중받아야 하고 이에 또다시 헤어져야 한다.
그녀의 육체 대신 전문성에 경의를 표하는 일은 동시에 페미니즘 메시지를 동반한다. 미식 클럽에 참여하는 고위 공직자들 못지않은 식견을 지닌 위제니 역시 높은 지위와 이에 수반되는 특권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미식계의 나폴레옹이라는 호칭을 가진 도댕은 위제니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제 관념을 물질로써 실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위제니는 도댕에 의해 맛있는 음식을 대접받고, 이를 조리하는 도댕은 '익스트림 클로즈업'되어 치열하게 물질과 겨룬다. 쩔쩔매며 빵을 종이처럼 아주 얇게 구워내는 장면에서 관념을 물질로 실현하는 과정의 어려움이 드러난다. 즉 트란 안 홍은 미식을 즐기며 드높은 목적지를 상정할 수 있었던 남성의 야망이란 특권을 여성 역시 가능하게, 남성이 누리는 성취의 대가와 책임을 그들이 몸소 짊어지게 한다. 뿐만 아니라 본 작품은 감독이 계획한 바를 현장에서 실현해주는, 요리사와 같은 현장 작업자들을 향한 아주 아름다운 헌사다. 움직이는 이미지, 곧 운동을 기록하고 그 결과를 즉각 마주할 수 있는 '요리'라는 소재로 영화의 참맛을 느낄 수 있는 본 작품에서 물질을 다루는 작업자들의 공이 없었다면 트란 안 홍의 관념은 그저 헛것에 그쳤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조리씬을 제외한 시퀀스는 다소 따분하고 진부하다. 그 씬들이 '미식 여정'이라는 명성을 퇴색시킨 점이 다소 아쉽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