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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Jul 04. 2024

빔 벤더스, <퍼펙트 데이즈>

완벽한 하루를 위한 조건들

빔 벤더스(Wim Wenders), <퍼펙트 데이즈>(Perfect Days) 

- 완벽한 하루를 위한 조건들     

하루를 '완벽하다'라고 칭할 수 있는 조건을 전설적인 록 밴드,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리더 '루 리드'가 대표곡 <perfect day>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공원에서 상그리아를 마시고 동물원이나 영화관에 가며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하는, 소박한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하루가 실로 완벽하다고 논한다. 또 그 하루는 새로워야 한다. 리드는 "연인 덕분에 나 자신을 잊었다, 내가 다른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라고 노래하는데, 그렇다면 오늘은 어제와 달라야만 고유의 완벽함을 성립할 수 있다. <perfect day>의 소박한 가사와 느슨한 보컬 덕분에 완벽한 하루의 요건을 성취하긴 그리 어렵지 않아 보이지만, 깊게 생각해보면 그 사소한 것이 우리 일상에서 그리 쉽게 허용되진 않는다. 쉬우면서도 어려운 그 완벽한 하루를 빔 벤더스가 신작에서 고찰한다. <perfect day>를 배경음악으로 사용하고, 또 제목에 직접 차용하는 그는 루 리드가 제안한 완벽한 날에 어떻게 화답할까.      


1945년 뒤셀도르프 태생의 빔 벤더스는 '뉴 저먼 시네마'를 이끈 독일의 시네아스트다. 뉴 저먼 시네마를 함께 이끈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가 '도발적인 성', 베르너 헤어초크가 '파격적인 전위주의', 마가레테 폰 트로타가 '여성 해방'을 주도했다면, 벤더스는 '진정 자유로운 즉흥적인 로드무비' 장르를 개척했다. 벤더스의 로드 무비는 잃어버린 것을 되찾고자 하는 욕망에서 시작한다.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사람'이나 '길 잃은 사람'들이 잃거나 잊은 것들을 되찾는 여정을 떠난다. <파리, 텍사스>의 잃어버린 관계는 기억을 되밟아가는 이야기로 이어지고, <베를린 천사의 시>에선 동/서독, 육체/관념의 분리가 여정을 비롯한다. 벤더스가 다루는 상실의 유형은 여럿이지만, 그 원인은 공통적으로 ‘시간’에 의해 발생한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속 시간은 분명 컬러나 유성영화 등 새로운 문물을 가져다주는 강물이다. 이와 동시에 무성영화나 흑백 고유의 맛이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하고, 또 나치에 의한 동/서독 분단 등 기존을 앗아간다.

여기서 벤더스는 의문을 제기한다. “과연 유실물이 내게 진정 소중한 것일까, 단지 나 자신의 아집과 소유욕은 아니었을까?” 하며 말이다. 벤더스는 이 고집이 편향적인 시선에서 비롯된다고 논한다. 벤더스의 작품 속 등장인물들은 ‘총체’를 바라보지 못하고 ‘특정한 면’만을 주관적으로 응시한다. 이러한 시선에 따라 주인공이 잃어버린 소중한 것은 '나를 위한', '나에 의한' 대상으로 왜곡된다. 상실된 것이 생명이라면 이들은 주인공에게 귀속된 객체가 아니기에, 오직 그 자신을 위하며 변하거나 떠나는 것이 적합하고, 또 필연인데 말이다. 더욱이 길을 나서는 주체들이 완고한 고집을 꺾지 않아서 편향된 상태에 머물러 있기도 한다. <패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에서 공격수들에 의해 수동적으로 좌우되는 골키퍼의 운명, <사물의 상태>에서 세상을 일면만 파악한 자신의 '계획'을 무리하게 밀어붙이는 태도처럼, 우리는 '특별하다고 여기는 것'이나 ‘단 하나의 존재 의미’ 등에 완고하게 갇혀 있다. 

그래서 벤더스는 여행을 떠난다. 분명 특별하다고 여긴 것을 되찾으려고 시작된 여행이다. 현재를 부정하고 잃어버린 것이 존재하는 ‘과거’로 빙빙 돌아가는 여정이었다. 그렇지만 벤더스의 여행은 '무계획'으로 변하며, 즉흥적으로 이름도 모르는 여러 도시를 오간다. <도시의 앨리스>처럼 앎과 계획 등의 모든 것이 백지 상태인 아이 상태로 되돌아간다. 그렇게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삶을 긍정하고, 아집을 내려놓으며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벤더스는 그 여행에서 파생되는 생경한 이미지들로 뉴 저먼 시네마를 이끌었는데, 그 여정이 <퍼펙트 데이즈>에서 다시 펼쳐진다.     


도입의 벤더스는 밤/아침을 대비한다. 시간에 따른 인간의 상반된 행위를 탐구하고, 이를 각기 다른 연출로 가시화하여, 어떤 시간에 인간이 완벽한 하루를 만들 수 있는지 고찰한다. 어두컴컴한 밤의 풍경은 '익스트림 롱숏'에 담긴다. 주인공은 풀숏 내지는 클로즈업이 적합한 인간이 아니라 광대한 세상인 것이다. 거기서 인간은 먼지처럼 작아져서 아예 흔적조차 느끼기 않는다. 설령 인간이 보일 수 있는 거리로 축소된다 한들,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그 이유는 황혼은 어둠이라는 두꺼운 이불을 세계 전체에 넓게 드리우기 때문이다. 고로 보일 수 있다 하여도, 그 인간의 형체는 어둠 속에 파묻혀 보이지 않는다. 또한 그 인간은 깨어있는 형상이 아니다. 히라야마는 밤에 독서를 좀 더 하고 싶다. 그러나 어둠에 의해 눈꺼풀은 자꾸만 잠기고, 결국 독서를 포기하며 잠을 택한다. 즉 겨우 보일 수 있다고 하여도, 인간 스스로가 의도하는 상태로 보일 수 없다. 세계에 굴복한 무기력한 존재로 나타날 뿐이다. 

하지만 인간이 밤에 연장하지 못한 열망이란 어찌나 크고 거대한지, 히라야마는 잠들고 나면 꿈속에서 미처 펼쳐내지 못한 오늘을 이어내 본다. 모든 것을 은폐하는 어둠 속에서 ‘흑백’으로나마 저항하는 것이 꿈인 것이다. 꿈 시퀀스에선 그가 잠들기 전에 겪었던 일들이 무차별적으로 연결 및 디졸브된다. 아무렇게나 이동할 수 있는 꿈이야 말로 분명 자유롭지만, 동시에 불완전하다. 히라야마의 꿈을 훔쳐보면 짐작할 수 있듯, 그가 겪은 일의 대략적인 정황은 확인할 수 있으나, 사건의 구체적인 진상을 파악하긴 어렵다. 이미지는 단편적이고, 연결은 비선형적이니 말이다. 또 꿈은 손에 잡히지 않고 색채마저 잃어버렸으니, 결국 꿈만으로는 완벽한 하루를 보충할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은 현실에서 완벽에 도달해야 할 터인데, 그 조건은 일단 동이 터야만 한다. 밤에 인간이 세계에 굴복했노라면, 해가 뜨자 사람들은 세계를 자기 의도대로 재정비한다. 이웃은 골목을 청소하고, 히라야마는 침구를 정리한다. 세계가 헤집어놓은 것들을 인간이 보기 좋게 재정립하는 것이다. 이후 히라야마는 운전하여 도쿄 한복판을 제 마음대로 가로지른다. 즉 세계에 어둠이 드리웠을 때 보이지 않게 된 인간은 주저앉고 굴복했다. 반대로 세계에 빛이 가득해지자 잘 보이게 된 인간은 제 의도와 욕망이 잘 보이게끔 조정한다.      


하지만 낮이라 한들 인간의 열망이 항상 가능하진 않다. 운전 중 히라야마는 선호하는 올드 락을 듣는다. 테이프가 재생될 때 그는 즐겁고 만족스럽다는 듯, 평온한 미소를 짓는다. 그런데 히라야마가 튼 음악은 끝까지 재생되지 못하고 중간에 정지된다. 이로써 히라야마의 미소도 무표정으로 순식간에 얼어붙는다. 그 이유는 히라야마가 모는 자동차는 사적인 운송수단이 아니라, 노동현장인 화장실로 향하는 업무용 자동차이기 때문이다. 히라야마가 아무리 듣고 싶은 음악을 틀어도, 자동차 내부를 꽉 채운 무수한 청소 도구가 그가 떠맡아야 할 책임을 가리킨다. 장비를 잔뜩 실은 자동차는 자신의 용도에 따른 목적지에 다다를 수밖에 없고, 그 목적지인 화장실은 그가 보고자 하는 심미적인 것들과는 정 반대의 불결함이 펼쳐지고 있을 터이니, 자연스레 히라야마의 사적인 욕망, 곧 자유가 중단된다. 영화에서 자동차와 상반되는 운송수단은 '자전거'다. 히라야마가 여가 생활을 보낼 때의 이동 수단이 자전거인데, 자동차와 달리 많은 물품을 실을 수 없어서 히라야마의 존재를 가볍게 만들고, 이렇게 경쾌해진 그는 진정 자유를 누린다. 문제는 인간은 취미 생활만 즐기며 하루를 보낼 수는 없다. 그는 어찌됐든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에, 자본주의라는 세계의 물결을 따라 흘러가는 업무용 자동차에 몸을 맡기는 수밖에 없다. 

그의 금욕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노동이라는 행위에 더해, 그가 택한 '청소부'라는 직업의 특성이 히라야마를 이중으로 소외시킨다. 청소부는 자신을 더럽혀가며, 또 보기 싫은 오물이나 맡기 싫은 악취를 어떻게든 참아가며, 타인이 남긴 더러운 쓰레기와 구정물을 치워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직종보다 노동 과정에서 더더욱 자신을 희생한다. 더욱이 고객-청소부 간의 수직적 관계에 의해 히라야마가 ‘청소 중’이라는 팻말을 밖에 놔둬도, 화장실을 어떻게든 이용하려는 대중들이 그를 무시하고 출입하는데, 이때 히라야마는 군말 없이 자리를 내줘야 한다. 원체 과묵한 성격이긴 하지만, 그래도 몇 마디가량 툭툭 던지는 사적 상황에 비해, 사람들이 화장실에 들어올 때의 그는 더더욱 침묵한다. 아마도 사람들이 팻말을 무시하고 화장실로 들어왔을 때 청소부가 비켜주는 것이 설명하거나 항변할 필요도 없는 미리 합의된 암묵적 당연함이기 때문이랴. 

이렇게 노동에 의해 히라야마의 감정은 자기 외부로 쫓겨난다. 벤더스는 소외된 그의 심리를 두 가지 연출로써 가시화하는데, 먼저 '청각'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일할 땐 ‘무성영화’라고 착각할 정도로 청각이 사라지고, 겨우 소리가 들려온다 한들 청소 장비들이 부딪히면서 발생하는 싸늘하고 차가운 소음뿐이다. 벤더스는 히라야마의 감각을 즐겁게 만드는 음악과 상반되는 청각을 대비시켜 노동이 인간을 어떻게 소외시키는지 표현한다. 노동은 자신을 표현하는 창구인 입을 막고, 또 듣기 싫은 것을 억지로 듣게 하는 것이다. 또 다른 연출은 화면비다. 벤더스는 본 작품에서 좁고 폐쇄적인 1.33:1 화면비를 선택하는데, 사실 도입에선 왜 이런 화면비를 사용했는지 의문이 든다. 아침을 여는 히라야마의 모습이 갑갑해 보이기는커녕 어둠을 몰아내는 해방감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더 넓은 화면비가 지당해 보였다. 하지만 어둠을 몰아내도 노동에 참여해야 하며, 일이 끝나고 그에게 주어지는 여가 시간은 그리 길지 않으니, 밤과 자본주의는 1.33:1 화면비처럼 히라야마의 가능성을 늘 좁다랗게 축소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잃어버린 주권을 되찾아야 할까. 히라야마는 점심시간에는 꼭 근처 공원에 가서 좋아하는 나무를 바라보며 밥을 먹는다. 단순히 관조할 뿐만 아니라 사진까지 찍을 정도로 나무를 향한 감정이 애틋하다. 나무의 모든 순간을 붙잡고 싶은 것이다. 또 히라야마는 집 안에서도 어린 나무들을 정성스럽게 기르고 있다. 즉 그는 나무, 곧 자연을 사랑하는데 여기서 자연이란 외재적 기준에 따라 움직이지 아니하고, 제 내부에 설정된 내재적 가치를 따라 삶을 개척한다. 히라야마가 집에 가져온 식물들을 분재하지 아니하고 장소만 바꾸었을 뿐, 모습은 원상태 그대로 보존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렇게 자연을 바라볼 때 히라야마는 은은한 미소를 짓는다. 노동 현장에서 내내 경직되어 있던 그, 또 공간의 일부처럼 롱숏에 포착되던 히라야마였다. 하지만 속세를 벗어나 자연에 참여할 때, 벤더스는 그의 감정이 충만하게 드러나는 얼굴을 가까이 '클로즈업'한다. 비로소 그 자신에게 밀착했다는 듯 말이다.

또 히라야마는 소박하게 사치한다. 일이 끝난 이후에는 꼭 공중목욕탕에 향하고, 이후 식당과 술집에 들러 끼니를 해결한다. 또 휴일에는 사진관에 가서 필름을 현상하고, 책방에 들러 값싼 책을 구입한다. 여기서 목욕탕과 외식은 집 안에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으니 효율을 따지면 불필요하고, 사진과 책 또한 경제적 이득과는 전혀 무관한, 돈만 축내는 행위다. 그런데도 굳이 그는 소비하며 즐거움을 누리는데, 그 이유는 축적과 사치의 메커니즘에 있다. 철학자 바타이유는 축적은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고, 낭비는 현재를 위해 미래를 희생한다고 정의한다. 축적하는 인간은 빈곤해진 현재를 참아내느라 괴로운 반면, 낭비하는 인간은 풍부한 현재를 누리는 만큼 즐겁다. 반대로 미래가 찾아오면 축적한 사람과 낭비한 사람의 처지는 정반대가 된다. 노동하는 히라야마는 축적에 맞닿아있는 반면, 일이 끝난 이후에는 사치의 경계에 근접한다. 히라야마는 사치를 포기할 수 없다. 그가 아무리 사명감을 갖고 일을 해도, 다카시가 갑작스럽게 일을 그만 둬서 자신이 저녁까지 풀타임을 소화해야 할 때 불만을 표했듯, 청소부는 자신의 현재를 다른 직종보다 더 많이 잃어버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히라야마는 필수적인 사치로써 자신을 되찾아야 한다.

이렇게 속세에서 자연으로, 축적에서 낭비로 향하는 완벽한 하루의 조건은 ‘일탈’이다. 주체성을 잃게 만드는 세계로부터 말이다. 오늘날의 보편적인 가치를 따르는 여동생이 속해있는 가족으로부터 빗겨나 있는 히라야마의 직업과 위치 역시 마찬가지다. 즉 우리는 일탈하며 자신의 주권을 찾을 수 있다. 그 주권이란 내가 잠재한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되찾는 일이다. 가령 일반적으로 화장실이 용변을 보는 목적으로 굳어져 있다면, 자신의 감정에만 충실한 아이들은 그 목적을 위반하여 숨바꼭질하는 장소로 사용한다. 이렇게 하나의 목적이 아니라, 즉흥적으로 그때그때 필요한 다양한 용도를 띨 수 있을 때 외부가 허용한 제한된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워 풍요로운 자신을 되찾을 수 있다.     


그러나 늘 반복되는 노동이 쳇바퀴 굴러가듯 따분한 것처럼, 히라야마의 일탈 또한 어느 샌가 틀에 박힌 루틴이 되어 지루해진다. 히라야마는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행위를 반복하고, 심지어 벤더스는 이를 유사한 구도로 촬영하여, 이전 시퀀스와 흡사한 방식으로 이어내기에 단조로움은 배가 된다. 이에 히라야마는 현재를 즐겁게 살기는커녕, 관성적으로 기억을 답습하며 과거에 파묻힌 꼴이 된다. 그래서 사치는 사치가, 일탈은 일탈이 아니게 되는데, 이에 벤더스는 또 다른 일탈의 요건을 제시한다. 바로 과거를 따르지 않는, 현재의 즉흥적이고 예기치 않은 만남이다. 묵묵하게 제 할일을 다하는 히라야마와 달리, 다카시는 노동보단 제 욕구에 충실한 인물이다. 첫 등장부터 지각하고, 아침 청소는 싫다고 불평하며, 아야와의 데이트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히라야마에게 테이프를 팔라고 강요한다. 자기밖에 모르는 상종하기 싫은 인간 유형이긴 하지만, 자신의 욕구를 꾹 참는 히라야마와 대척점에 있기에 그와의 만남은 히라야마의 내면에 신선한 자극을 준다. 다카시에 의해 그의 업무용 자동차가 여가시설로 향하는 분방한 자동차로 변하니 말이다. 또 다카시에게 돈을 빌려준 나머지 지갑이 텅 빈 히라야마는 공교롭게도 자동차에 기름까지 떨어져 낯선 곳에 멈춘다. 다카시에 의해 연결된 아야는 히라야마의 볼에 갑작스레 입맞춤하는데, 다카시와의 만남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둔감한 히라야마의 피부에 소동을 일으키며, 그의 떨리는 육체를, 곧 짜릿한 삶을 환기한다. 

이 만남들에서 부각하는 것은 '대화'다. 다카시와 더불어 니코, 술집 사장 전남편과의 만남이 히라야마에게 중요한데, 히라야마와 달리 이들은 꽤 수다스럽다. 니코는 히라야마에게 이것저것 질문한다. 책을 빌려도 되겠냐며 묻고, 이후 책에 대한 견해를 나눈다. 또 삼촌이 어떤 직업을 갖고 있는지 궁금해 하고, 이후 동행하여 간접 체험해본다. 그리고 엄마와 삼촌의 관계가 왜 서먹서먹한지도 질문하는데, 이 발화에는 '나는 알지만 상대는 모를 법한 것', 또 '상대는 알지만 나는 모르는 것'이 담긴다. 침묵은 너무 당연해서, 또 누구나 다 알고 있어서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라면, 대화는 새로운 것이 오가는 개척이자 통로다. 사장의 전남편도 마찬가지로, 그가 "그림자가 겹치면 더 짙어지나?"라는 의문을 제기하니, 그 말에 따라 히라야마는 그림자를 요모조모 겹쳐보는 실험을 한다. 그 실험으로 인생에 지금껏 보지 못한 새로운 앎과 경험을 축적한다. 또 히라야마가 사장과 전남편의 관계를 오해했다면, 전남편이 진상을 히라야마에게 설명하며, 그와의 대화는 히라야마가 사장과 새로운 국면으로 진입할 여지를 열어준다. 

이 만남을 열어둘 때 벤더스의 로드무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태양이 떠오르며 히라야마가 하루를 시작할 때, 도쿄의 광활하고도 생경한 풍경을 생생히 느낄 수 있는 로드무비의 성격이 있었다. 그러나 그 풍경은 이내 곧 저물었다. 오직 일터와 연관된 풍경만이 그에게 허용되기에, 직종을 바꾸거나 장소를 옮기지 않는 이상 풍경은 반복되고 또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가 겨우 행한 일탈조차도 단조롭게 반복되었기에, 어떤 풍경이 이어질지 예상할 수 없어서 충격적이고 숭고한 로드무비의 맛이 점차 쇠퇴하고 있었다. 그러나 만남과 대화가 그를 새로운 장소로, 이후 그 장소에서 가능한 새로운 히라야마를 열어젖힌다.      


이렇게 벤더스는 인간을 제약하는 세상 속에서 일탈과 즉흥으로 나를 되찾을 수 있다고, 그렇게 하루를 나 자신으로 잔뜩 채워낼 때 완벽에 근접한다고 논한다. 이를 픽션이긴 하지만 히라야마가 바라보는 풍광은 덜 설계된, 이로써 즉흥적인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이미지로 풀어낸다. 픽션의 목적에 엄격하게 종속되지 않고 스스로 자유로운 그 이미지들은 타인과 목적에 붙잡히지 않고 그저 현재에 충실할 때 오늘은 가장 완벽하고 아름답다고 몸소 증언한다. 

다만 본 작품은 그 완벽한 하루의 조건을 열거하는데 그친다. 소중하고 값진 조건이 오롯이 서식할 수 있는 그릇, 곧 형식을 제대로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본 작품의 연출은 두 갈래에서 방황한다. 벤더스는 분명 이미지에만 몰입할 수 있는 무성영화적 무드와 좌우를 잘라내어 정중앙의 행위만 집중할 수 있는 4:3 화면비를 결합시켜 완벽의 조건을 부연설명 없이, 그저 오롯이 느낄 수 있게 만들려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 소박한 행위들의 참맛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는다. 보여줄 거라면 ‘웨스 앤더슨’처럼 확실하게, 아주 대놓고 클로즈업하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한편 아예 탐미주의적 경향으로 빠지지 못한 이유는 본 작품이 정돈된 이미지를 보여주는 영화가 아니라,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일상 속의 소박한 로드무비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카메라는 정물화처럼 가만히 있기 보다는 핸드헬드를 동반하며 팔딱거리지만, 즉흥성을 표현하기엔 배우들에게 주문된 디렉팅이 기교적이다. 최소한 히라야마가 일탈을 할 때에는 ‘이마무라 쇼헤이’처럼 날것의 표현을 지시했어야 설득력을 지녔을 텐데, 청소부로서 옷을 벗어던지고 느슨해져야 하는 순간에도 마치 ‘오스 야스지로’의 것처럼 한껏 힘을 주며 경직되어 있다. 말로는 일탈을 하라고 외치면서도, 정작 카메라가 그렇지 못하는 삐걱거림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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