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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Nov 08. 2024

션 베이커, <아노라>

가부장제와 신자유주의

션 베이커, <아노라> - 가부장제와 신자유주의     

오늘날 여성 성노동자는 여성 해방 물결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규정되곤 한다. 남성에 의해 여성의 몸과 정신이 규정되는 것을 거부하고 주체성을 되찾는 것을 페미니즘은 목표로 삼기에, 남성의 지시를 온 존재로 육화한 성노동자는 가부장제를 공고히 지탱하는 부역자로 보기 충분하다. 하지만 이건 오늘날의 관점이다. 과거에 이들은 오히려 가부장제에 균열을 냈다. 예전에도 이들은 분명 남성의 욕망과 지시가 육화된 화신이었으나 한편 남성이 바라지 않는, 빼앗고 싶어서 안달이 난 무언가를 몸에 꼭 지니고 있었나니 바로 '경제권'이다. 이들이 아무리 포주에게 막대한 수수료를 뜯기더라도, 또한 남성이 헐값에 그녀들을 등쳐먹는다 하여도, 가정주부들과 달리 성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지갑에 자신의 돈이 있었고, 남자들에게 그 돈을 어디에 썼는지 가계부를 쓸 필요도 없었다. 션 베이커의 신작, <아노라>는 바로 이 과거의 전통을 일부 잇는 애니이자 아노라의 일대기를 다룬다.      


1971년 뉴저지 태생의 션 베이커는 미국의 시네아스트다. 오늘날의 미국을 전 세계 대중문화를 지배하는 거대한 꿈의 공장이라 칭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듯, 그 나라의 영화감독인 베이커는 늘 대중문화를 영화의 소재로 삼는다. 보편적인 형태로는 ‘놀이공원’, ‘매스미디어’, 대중의 쾌락을 만족시키는 대중문화가 극단으로 치달은 형태로 ‘마약’, ‘포르노’, ‘매춘’ 등을 배경으로 삼고, 그 세계를 지탱하는 소위 '성 노동자'들의 살아 숨 쉬는 삶을 포착한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대중문화 및 성 산업은 헐떡이고도 전율하는 육체를 충분히 포착하고 있기에 베이커의 작업이 그저 동어반복에 그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말이다. 그러나 베이커가 판단하기에 문화산업은 '닫혀' 있기에, 요동치는 인간의 가능성을 보여주지 못한다. 그래서 베이커는 보여주려 한다. 현실에서 제한되고 불가능한 욕구가 무제한적으로 표출되는 ‘가능성의 출구’에서 나올 수 있는 모든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것들을, 그 이유는 대중문화가 '쾌'만을 허용하고 그 외의 것을 거부하며 자신을 둘러싼 담론을 축약시키므로, 대중문화의 총체를 다루기 위해서 ‘생물’들을 포착하려 한다.

그래서 베이커는 닫히지 않은, 열려 있는 대중문화의 '민낯'과 그들이 결코 보여주지 않는 '백스테이지'를 비춘다. 당연하게도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은 삶들은 포르노의 쾌감, 놀이공원의 즐거움과는 거리가 멀다. 누군가가 맹목적으로 즐거워야 한다면, 그들에 의해서 대상화되는 다른 누군가는 맹목적으로 굴욕적이어야 한다. 자신만을 만족시키는 욕망이란 그 정도로 잔인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대중문화가 약속한 것이 허위임을 까발리고, 외의 진실을 가시화하는 베이커의 작업은 인종, 젠더 문제로도 확장된다. 전자에는 <프린스 오브 브로드웨이>, 후자로는 <탠저린>이 대표적이며 베이커는 이들 역시 '생물'로 포착한다. 타인을 규정할 수 있는 힘을 지닌 보편자, 곧 시스젠더 백인들로부터 이들이 쉽게 객체화되기에, 베이커의 작품 속에서 주체로서 마음껏 널뛰는 이들은 백인이 승인한 진실이 아닌 오롯한 진실을 보여준다. 

이로써 베이커의 작품은 분명 픽션이지만, 동시에 자연스러운 물리적 실재를 반영하는 다큐멘터리적인 측면도 지닌다. 베이커는 비전문배우, 특히 영화 속 배역의 삶을 실제로 살아본 이들을 적극 캐스팅하기 때문이다. 더해서 베이커의 작품에서는 늘 '아이들'이 중점적으로 등장한다. 영화라는 매체에서 가장 진실한 배우는 아이와 동물이라고 하듯, 그의 작품 속 등장하는 아이들은 배역과 실제 삶이 일치하는 비전문배우들, 카메라 앞에서 자연스럽게 행동할 수 있는 기성배우들보다 더더욱 꾸밈없는 연기를 선보인다. 그 아이들은 성 산업의 메커니즘이나 인종, 젠더의 고정관념으로부터 자유롭기에 베이커는 그들로부터 자신이 다루는 타자들의 진실, 주체성을 회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엿본다.      


본 작품에선 베이커의 그간 작품과 달리 아이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몸은 성인이어도 정신연령은 미취학아동 수준이라 해도 높게 쳐준 셈인 이반(또는 반야)를 통해 어떤 순수한 것을 길어낸다. 그것은 조금의 미화도 포장도 없는 남성의 단순하고도 무식하며 폭력적인 욕망이다. 본 작품의 도입부는 마치 뮤직비디오 같다. 영화의 숏들이 끈적하고도 통통 튀는 감각적인 배경음악에 헌사하고 있기에 그렇다. 또한 약 3분에서 5분 사이의 러닝타임동안 무수한 숏을 나열하며 감상자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 뮤직비디오처럼 <아노라>의 도입도 유사한 문법을 따른다. 다만 조금 다르다면 본 작품에선 짧은 숏의 빠른 나열 대신 '롱테이크'와 '슬로우 모션'의 조합을 선택한다. 물론 편집 외의 촬영은 유사하다. 마초적인 남자 가수들의 뮤직비디오에 투사된 '메일게이즈'처럼 베이커 역시 성노동자들의 가슴이나 둔부를 클로즈업하여, 그녀들을 만지고 싶은 그들의 욕망에 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롱테이크와 슬로우모션, 더해서 '스테디캠'이 사용되어야 하는 이유가 드러난다. 남성들로 하여금 잘려선 안 되고 가능한 한 오랫동안 유지되어 흔들림 없이 제대로 만끽할 수 있어야 하기에 해당 형식들이 사용된다. 

그 욕망을 어떠한 가식도 없는 이반이 보여준다. 더해서 극의 서사에 깊이 개입하고 있는 남성 조연들부터 시작해서 이름도 모르는 무수한 남자들 역시 가식을 떨 필요가 없는 그 홍등가에서 남자들이 바라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건 복잡하게 머리 굴릴 필요 없게도, 그저 삽입하고 쑤셔대는 행위일 뿐이다. 이반이 섹스가 끝난 이후에도 무기를 발사하거나, 무언가를 찌르거나, 어디론가 계속 들어가는 게임을 선호하는 것처럼, 그가 도망쳤을 때 발견된 곳이 구멍을 쑤실 수 있고 샴페인이 분출되는 클럽과 술집인 것처럼, 창과 같은 남근의 욕구를 위해 육체와 정신을 포기한 이들이 바로 남성이다. 그들을 위해 클럽에선 '검붉은' 조명이 번쩍이며 여자들을 비춘다. 그 빛은 여성이 인간으로서 지닐 수 있는 정신적이고 관념적인 가능성을 말소하고 오직 살덩이로서의 무언가로만 국한시킨다. 물론 육체 역시 무수한 가능성을 지닐 수 있지만, 그저 살덩이이자 먹기 좋은 물질로만 전락시키는 것이 검붉은 조명의 사악한 힘이다. 가부장제에 깊이 매몰되었거나 현대의 문명화라는 수혜를 포기한 남성들에게서 바로 그러한 솔직함이 폭로된다.     


그러나 아이 같다는 이유로 그것을 순진하다거나 순박하다거나 순수하다는 식으로 받아들여선 안 된다. 검붉은 조명은 고기를 먹기 좋게 절단하는 정육점의 색채이기도 한 것처럼, 그 조명을 쏘는 남성들이 관계를 맺고자 하는 여성들에게 매우 해롭다. 베이커는 바로 그 악영향을 포착한다. 뮤직비디오 같은 도입부가 종료되기 직전, 베이커가 관심이 있는 것은 애니(클라이맥스에 되찾는 이름 아노라)의 얼굴이다. 그녀는 남자들 앞에선 늘 사근사근 웃는다. 또한 그 남성들의 욕망을 만족시켜야 돈을 벌 수 있는 가부장적인 경제 구조에서 애니의 입은 늘 그들을 회유하거나 설득하는 말만이 흘러나온다. 시각과 청각 모두 그녀는 그들에게 좋아야 한다. 그러나 정작 그녀에게는 귀찮고 못생긴 그 모든 남자들이 그녀로부터 시선을 돌렸을 때, 애니의 입가에서 미소는 그저 희미한 수준으로 남는다. 전체적인 이목구비는 피곤에 절어서 아주 차갑고 지쳐 보인다. 그것이 가부장적인 시스템 내에서 여성의 진실이다. 

살기 위해서 가면을 쓰지만 그 너머의 빈곤하고 남루한 민낯을 가부장제는 늘 보여주지 않았다. 가정주부는 그저 행복하다거나, 성노동자는 그저 악마이자 꽃뱀이라는 식으로 호도해왔다. 베이커는 그간의 남성중심적인 '히'스토리를 거부한다. 남성에 의해서 연출되고 있는 뮤직비디오가 온전하게 완결되기 전에 불완전하게 종료한다. 여성도 충분히 즐기고 있다는 식이거나, 또 여성의 불행을 제거하기 때문이다. 대신 보여주는 것은 핸드 헬드로 포착된 홍등가 너머 애니의 일상이다. 남성의 스테디캠과 달리 여성을 포착하는 핸드헬드는 멀미가 날 것만 같은, 비위 상하는 기분 나쁜 흔들림을 보여준다. 그것이 같은 시공간에서 달리 느끼는, 가부장제에 의한 성별간의 차이다. 더해서 베이커는 본 작품에서도 35mm 필름을 사용한다. 디지털에 비해서 불투명한 35mm 필름은 그만큼 가부장제가 은닉하고 있는, 쉽게 볼 수 없는 현장의 베일을 한 꺼풀 벗겼다는 인상을 준다. 또한 35mm 필름은 디지털에 비해서 만질 수 있는 유한한 물질이다. 그래서 거친 물성, 또한 훼손될 시 그레인이 유한성을 환기하는데 이 또한 가부장제 내 여성의 진실이다. 25라는 청춘은 자신의 미래를 위해 투자할 수 있는 무한한 동력을 제공하지만, 그 찬란한 성장의 가능성을 오직 소름끼치는 남성들의 욕망을 위해서 갉아먹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찾아야 한다. 남성이 말하지 않는, 또한 그들이 스카프로 입을 틀어막는 그녀들의 발언권 때때로의 비명을 말이다. 검붉은 조명 아래서의 여자들은 늘 웃고 있고, 눈가의 글리터도 사치스럽게 반짝인다. 그러나 남성의 검붉은 조명을 걷어내면, 여자만의 공간이나 자연광에서의 그녀들은 아주 괄괄하다. 애니는 돈을 벌기 위해서 남성에게 일부 굴종할지언정, 그 이후의 시간에는 그야말로 할 말을 있는 힘껏 죄다 쏟아낸다. 매니저에게 자신을 자꾸 무시하면 돈을 나누지 않겠다고 으름장이고, 제 권리를 지키기 위한 법도 나름 꿰고 있어서 휴가도 마음대로 쓰며, 법정에서도 꽤 영리하게 자신을 변호한다. 또한 룸메이트가 사오라는 우유도 사오지 않는다. 이러한 조명 아래서 지배당하지 않고자 하는, 그녀들의 savage한 본심이 드러나는 것이다. 

남자들의 관심이 그저 구멍이나 툭 튀어나온 물질들에 그친다면, 여성의 관심은 육체가 아니다. 애초에 육체를 따진다면 이반은 경쟁력이 없다. 이고르라는 걸출한 경쟁자는커녕 친구들 사이에서도 가장 빈약한 육체를 지녔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애니가 그에게 매료된 이유는 미화되긴 했지만 그와 '대화'가 됐기 때문이다. 자신들에게 아부하는 말만 늘여놓길 바라는 남자들과 달리, 러시아어가 가능한 애니의 지성을 필요로 하는 존재가 이반이며, 크게 대화답지 않지만 미국에서 러시아인이 느끼는 이방인으로서 소외나 발음 문제, 유년 시절 할머니 이야기 등을 공유할 수 있었다. 솔직히 클라이맥스에 이고르와 나눈 대화다운 대화에 비하면 솔직히 제대로 된 대화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애니가 들뜨게 된 이유는 대화가 아예 불능한 홍등가의 가장 저열한 밑바닥, 심연 내지는 나락에선 그나마 제일 낫기 때문이다. 또한 지금 여기의 육체가 아니라, 그 너머의 가시화되지 않는 무언가를 갈망하는 애니에게 이반은 일부 일조한다. 물론 그 또한 애니의 콩깍지가 미화한 것이긴 하지만, 확실한건 여자의 욕망은 남자에게 그리 해롭지 않는다. 21세의 젊음이 더 나은 쪽으로 사용될 수 있게끔 독려하거나, 존재에게 용기를 준다.

여성은 그런 남성과 시간을 보내고 싶다. 여자를 사람취급도 않는 금수 같은 것들과 달리 말이다. 애니의 근무와 퇴근 이후의 시간 모두 다 영화에선 아주 짧게 지나간다. <아노라>가 다 끝난 이후 돌이켜보면 그 때의 숏들은 일일이 기억나지도 않는다. 그것이 남성에 의해 성적 대상화된 여성의 의식이다. 기억할 필요도 없기에 뇌리에서 그저 쉽게 지워지고, 기억하고 싶지도 않기에 순식간에 보내버리는 법을 깨달은 것이다. 또한 그 고된 노동 이후에는 여가를 보내 여유조차 제공되지 않는다. 여자의 휴식시간은 밤에 다시금 남자를 만족시키기 위한 배터리 충전 시간에 그친다. 그런 애니가 어쩌면 최초로 더 길게 함께 있고 싶은 이반을 만난다. 이반과 처음 만난 순간의 롱테이크, 그와 애니가 시선을 치열하게 교차하는 리버스숏으로 이뤄진 긴 호흡의 시퀀스, 번호를 교환한 이후 시간과 공간이 바뀌어도 서로 이어지는 편집 등 여성은 최소한의 욕구를 따를 때(그것이 아무리 가부장제가 세팅해놓은 것일지라도) 편집, 곧 시간을 유의미하게 활용하는 것이다. 흘려보내는 시간이 아니라 꾹꾹 눌러 담고 각인하는 시간으로.  

    

물론 가부장제 내 여성의 욕망은 주의해야 한다. 그녀들은 빈곤하다. 이반은 애니와의 일주일간 독점 계약을 하면서 3만 달러도 줄 수 있다고 했지만, 정작 애니는 1만 5천 달러를 제안했다. 그녀 기준에서는 큰 액수를 불렀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남성 기준에서는 헐값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은 나쁜 환경의 잿빛 거주지를 벗어나지 못한다. 여성이 과소평가되는 거래 속에서 여성은 타인으로부터 프라이버시가 보장되지 않는, 또한 무수한 소음에 둘러싸인 잿빛 거주지가 강제되고, 이러한 와중에 돈을 아껴서 으리으리한 대저택을 지은 남성에게 마치 불나방처럼 홀릴 수밖에 없으랴. 애니는 이반에게 "내가 하고 싶어"라거나 "내가 리드할게"라고 말하지만 그 욕구는 온당 가부장제 뒤집기가 아니다. 처참한 환경에서 조금 더 나은 남자를 만났다는 벅참과 과잉은 이반과의 키스에서 번쩍이는 ‘렌즈플레어’가 가시화한다. 절대적인 빛이 아니라, 렌즈가 빛을 어느 정도 품을 수 있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번쩍임, 애니라는 렌즈는 조금의 호의와 베풂에도 벅차하는 그런 예민한 렌즈이거나, 가부장제의 냉대와 학대 속에서 여성들이 바로 그렇다.

그 렌즈플레어에 홀린 애니는 이반의 곁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는다. 그 이상의 것을 진작 누렸어야 하는 여성이지만 그러지 못해서 발생한 착각, 베이커는 이번에도 연출로서 가부장제에 의해 인도되는 작위적인 욕망을 경고한다. 애니가 결혼을 다짐하기 전까지 이반과의 일주일은 마치 '숏츠' 같다. 가장 자극적인 순간들이 길어야 10초를 넘지 않고 빨리빨리 지나간다. 또한 더 과하거나, 이전에 느끼지 못한 새로운 자극들이 연이어진다. 이 숏츠와도 같은 시퀀스를 이루기 위해서 본 작품에 사용된 35mm 필름은 잘리고 또 잘려야 했을 것이다. 즉 소모적이다. 그 소모를 애니 역시 겪는다. 다이아몬드가 너희 결혼 2주면 끝날 거라 경고했고, 실제로 1주도 못가고 취해서는 다이아몬드와 관계 맺은 그처럼, 유한한 인간인 이상 그렇게 빠르게 모든 걸 소모하면 욕망은 식기 마련이다. 욕망이 식은 남자는 달아나고, 남겨진 여성은 방전되어 채워지지 못할 공허만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것이 이반과 결혼 후 키스하는 그 순간 멀어지는 '줌아웃'으로 드러난다. 실제 이후에도 이반은 게임에 시선이 고정되어 있고, 부모라는 불청객이 다가올 예정이다.     


지금껏 가부장제를 좋게 포장해온 역사는 가족의 경우 가장이 비교적 유약한 식구들을, 사회에선 남성 지배자가 노약자들을 책임진다고 호도해왔다. 그런데 가부장제에서 약자로 규정된 여성에게 제 권리를 찾아주니 그녀들은 결코 약자가 아니었다. 남성들이 강요하는 코르셋에 의해서, 남성 가해자들을 제대로 엄벌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에게 힘을 쥐어주는 남성 중심적인 법에 의해 그녀들은 인위적으로 나약해진 것이지, 가해자가 죗값을 치르고 피해자가 위축될 필요가 없는, 또한 그녀들이 평등하게 경제적 주권을 지닌 상태에선 여성들은 충분히 강하게 권리를 사수한다. 단지 가부장제가 남성성의 신화나 가장이자 지도자라는 명분으로 주어지는 자원을 독점하기 위해서 그간 여성을 나약하게 만들고 복속해왔던 것이다. 그 가장을 선망하는 형태의 결혼은 바로 이 고루하고도 사악한 족쇄인 가부장제를 재소환한다. 가부장제는 약자를 지킨다고 일컫는, 실제로는 약자를 위협하는 ‘힘을 숭상하는 이념’이기에 이반이라는 가장을 힘으로 제압할 수 있는 다른 강자들이 등장하면 애니를 쥐락펴락할 수 있는 게 섭리다. 찌질한 이반을 제어하는 토로스 일당이 쳐들어온다. 애니가 보고 싶은 이반의 얼굴 대신 화를 내고 과속을 하면서 오고 있는 토로스의 얼굴이 편집으로 이어진다. 그들이 도착하니 이반의 육체 대신 이고르의 무릎이 그녀 몸에 밀착한다. 그 토로스 일당을 고용한 이반의 부모가 닥쳐와서 애니의 혼인을 무효화하려 한다. 거부하고 오히려 도발해도 소용없다. 전용기에 타라면 타야만 한다. 가부장적인 결혼에의 서약은 곧 힘에 복속하겠다는 의미, 불가항력에의 동의에 다름 아니다.

이 가부장제는 개인 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평화학자이자 여성학자인 베티 리어든이 말하듯, 사회가 군사주의적일수록 가부장적인 경향도 높아진다. 가정의 가부장제는 사회로 확장되거나, 그 반대의 형태를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본 작품에서는 신자유주의가 오늘날 가부장제의 형태라 하겠다. 애초에 신체적으로 강함을 타고난 남자들에게 더 많은 자원을 독점시켜주는 가부장제처럼, 신자유주의는 부자들이 더 부자이게 만든다. 또한 가장이라는 이유로 노약자들을 지배, 적나라하게는 폭정을 일삼는 그들처럼, 그 부르주아들의 권리를 수호하기 위해서 프롤레타리아의 권리쯤은 짓밟혀도 좋고, 부르주아의 이익을 위해서 한없이 프롤레타리를 빈곤하게 만든다. 물론 신자유주의는 계급과 결합하여 부르주아 남성은 프롤레타리아 여성뿐만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남성도 유린하고, 그 부르주아 남성과 결혼한 부르주아 여성이 프롤레타리아 남성도 호령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부르주아 여성이 휘두르는 힘의 근원이 남성이라는 점, 그 남성이 지닌 힘이 정의나 질서를 유린하고 대신 숭상된다는 점은 가부장제와 동일하다. 가부장제의 여성들처럼 프롤레타리아 계층은 고용인인 부르주아 없이는 추운 거리를 전전해야 하며, 그 부르주아는 제 목적을 위해 업무방해와 공무집행방해, 판사회유 등을 일삼으며 약자를 사기치고 절도한 '꽃뱀'으로 만들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한다.      


음, 그렇다면 우린 이에 순응해야만 할까. 베이커는 전통적인 성노동자의 태도가 가부장제에 균열을 낼 수 있다고 본다. 이반에게서 양도받은 여성의 운명을 다른 가장들이 아무렇게나 결정하려는 폭정 속에서 애니는 있는 힘껏 저항한다. 그녀는 이반한테서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 이반이 없다면 무기력하게 당하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다. 우락부락한 남정네들의 얼굴에 꽤 큼지막한 생채기를 내고, 어떻게든 빠져나가기 위해서 기회만 엿보고 자신을 속박하려는 가장들을 힘껏 물며, 결국 묶여버린다면 있는 힘껏 고함을 지른다. 끝끝내 네바다 주로 끌려가 이혼을 할 수밖에 없지만, 이반은 찌질하고 당신이 폄훼하는 그런 여자와 당신의 아들이 결혼했다며 권력자들 앞에서 그야말로 할 말을 다한다. 그것이 곧 이 사회의 보편적인 원리에 일부 순응하더라도 경제권은 손에 꼭 쥐고 놓지 않던 성노동자들의 다른 형태인 것이다. 법원에서 할 말 다하는 애니, 이반 부모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이고르처럼 틀어막을 수 없는 입, 거기서 새어나오는 자신들의 주체성과 권리 말이다. 

물론 애니가 바라던 모습은 갈리나였을 것이다. 이반과 결혼하여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다이아몬드와 같은 여자들에게 채찍을 휘두르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무시무시하고 재수 없는 갈리나 역시 제게 힘을 수여하는 남편 아래서 한갓 웃음거리로 전락하듯, 서열 관계나 일방적으로 복속되는 관계에 구원은 없다. 구원까지는 아니어도 행복과 인간다움은 반가부장적인, 폭력을 쓰지 않고 강간하지 않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샘솟는다. 대화다운 대화가 가능한, 또한 그녀가 모종의 이유로 아노라라는 이름을 포기하고 애니라는 미국식 이름을 꾸민 것과 달리 그 본명을 긍정하는 이고르에게 자꾸 눈이 간다. 이에 그녀가 주도해서 그와 섹스를 하려 한다. 하지만 움찔한다. 그런 남자는 절대 자신을 구원하지 못할 거란 가부장적인 기준에서의 불안감, 그러나 여성 역시 동등하게 사랑할 수 있는 사람과 교제할 때, 아첨 대신 흐느낌이 새어나오는 입을 긍정하는 사람을 곁에 둘 때 그것이 진정한 제 삶 일지다.

이렇듯 전통적인 가부장제는 거기에 양극화된 계급을 한 스푼 끼얹은 신자유주의로 오늘날 팽창되고 있는 것이다. 소련의 실패 이후 부를 독식한 어떤 러시아인은 제 정체성과 러시아어를 당당하게 외치며 오히려 타 언어를 쓰는 사람들을 복속시키는 반면, 성과 계급 모든 것에 열세인 어떤 존재는 그 흔적을 지우기 위해서 아등바등 몸부림을 쳐야만 했다. 그것이 폭소가 터지는 본 작품의 난장판과 소동을 마냥 만끽할 수 없었던 이유였다. 가부장제라는 해묵은 유산과 신자유주의라는 거대한 구름의 그늘이 가져오는 인간의 사물화를 분명히 목도하게 되므로. 다만 그것을 타파할 수 있는 가능성 역시 가부장제 속에서 경제권을 지키던 과거의 성노동자에 있다. 그들이 진정 보여주지 않는 것, 그것은 성노동자의 열린 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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