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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Dec 11. 2024

팀 밀란츠, <이처럼 사소한 것들>

그들도, 또한 우리도 괜찮게 살아야 한다

팀 밀란츠, <이처럼 사소한 것들> - 그들도, 또한 우리도 괜찮게 살아야 한다     

최근 아일랜드의 작가 클레어 키건의 단편이 차례로 국내에 소개되고 있다. 피상적으로 그녀의 소설은 단순하고도 소박하다. 커다란 사건이라 하기엔 무리가 있는 소시민의 삶을 일상에서 흔히 쓰일 법한 언어와 시선으로 재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의 소설은 그리 가볍지 않다. 그 평범한 일상에 균열을 일으키는 사건과 이를 맞닥뜨린 주인공들이 내리는 결정은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해왔지만 정작 쉽게 실천하기 어려운, 알고 있었지만 어느 순간 잊고 살던 '인간성'이기 때문에 아주 묵직한 여운을 남긴다. 또한 키건의 작품 배경은 생각보다 거대하다. 영국-아일랜드의 역사와 정치적 관계, 막달레나 수녀원 사건 등 국제적으로도 악명이 높은 시대상에 배경을 둔다. 다만 키건이 그 거시적 역사를 재현하는데 관심을 두지 않고,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소시민들에게만 주목하기에 커다란 규모는 눈에 띄지 않는다. 더욱이 배경보다 더 중요하고 거룩한 것은 팍팍하고도 급박한 상황이라도 인간이라면 실천해야하고 또 실천할 수 있는, 소박하게 보이지만 가장 숭고하고도 단단한 선택들이기 때문이다. 그 단순한 묵직함이 아일랜드의 영화감독 콤 베어리드에 의해 <말없는 소녀>로 영상화된 바 있고, 벨기에의 시네아스트 팀 밀란츠의 손에서 <이처럼 사소한 것들>로 스크린에 이어진다.     


1979년 플랑드르 모르트셀 태생의 팀 밀란츠는 벨기에의 영화감독이다. 그는 TV 시리즈와 드라마를 연출하다가 2019년 <사랑스러운 파트릭>으로 장편 데뷔하였다. 그의 특징은 아주 감각적인 영상미를 꼽을 수 있다. 밀란츠가 스크린에 구현하는 미장센은 마치 이탈리아의 시네아스트, 파올로 소렌티노의 터치처럼 아주 감각적이고 사치스럽다. 하지만 동시에 그 형식은 텅 비어있다. 풍성한 디테일들로 가득 들어찬 형식에는, 마땅히 그렇게 재현되어야할 소재가 담겨야 할 것이다. 그런데 정작 그 형식 안에 담긴 인물들은 마치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캐릭터처럼 아주 황량하고 공허하다. 밀란츠는 외관상으론 아무 문제가 없다 못해 과잉이 되어서 흘러넘치지만, 정작 이런 가운데서 내면이 텅 비어 있는 인물들을 연출로써 드러낸다.

그들이 뻣뻣하고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러운 이유는 '자유'를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이 사회의 이데올로기와 규칙 등에 기반을 둔, 무시하기 어려운 권위자의 명령을 하달 받으며 살아간다. 지시를 수행한 대가가 밀란츠가 그려낸 풍성하고도 사치스러운 미장센이라 하겠다. 실제로도 그들은 유산을 물려받는 등 일련의 보상이 예정되어 있다. 하지만 그 보상을 받기 위해선 상관이 요구하는 기준에서 완벽에 도달해야 한다. 그러다보면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해 외관은 가꾸게 되지만, 정작 내 생각과 의지는 말살됨에 연출의 괴리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밀란츠는 인간이 자유를 되찾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서로에게 제 욕망을 투영하는 관계가 아니라, 그저 있는 그대로의 서로를 인정하는 태도, 아무리 보기 흉하고 살집이 엉망으로 늘어져있더라도 그게 당연한 타인이겠거니 생각하는 '나체'를 긍정하는 태도로서 말이다. 내가 기대하는 타인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타인을 부드럽게 어루만질 때 모두는 자유로워진다. 밀란츠의 완벽주의에 가까운 연출 역시 말미에는 서로를 향한 이상적인 사랑과 조금도 이상적이지 않은 평범하고도 투박한 육체를 매혹적으로 포착하기에 이른다. 이제 그의 카메라는 키건이 길어오는 소박하지만 중요한 것들을 황홀하게 비추려 한다. 

     

밀란츠가 도입에서 비추는 새벽녘의 정경도 제법 사치스럽다. 물론 일반적인 의미의 화려함과 호사스러움과는 거리가 있지만,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인다는 건 충분히 고마워할만한 사치스러운 삶이다. 들어보아라, 드넓게 울려 퍼지는 맑고 청아한 종소리가 사람들의 아침을 연다. 사람들이 수면에 빠져 무방비로 노출된 동안 아무 문제도 없이 늑대의 시간은 지나갔다고, 복잡하게 생각할 건 아무 것도 없다고 종소리는 말하며 새로운 오늘을 열어젖힌다. 그 고마운 단순함에 풍경도 부합하나니, 엄밀하게 말하자면 평범한 마을이자 새벽녘의 풍경이다. 심지어 길조라고 하기엔 거리가 먼 까마귀도 날아들고, 겨우 갠 아침도 우중충하고 흐리다. 하지만 중요한 것, 이 세상은 사람들이 일상을 충분히 준비할 수 있을 정도로 별 문제는 없다는 것, 그렇게 오늘이 시작된다. 

그리고 그 오늘에 이르러 어떤 사실이 드러난다, 꽤 정돈된 구도로 포착된 평화롭고도 고요한 풍경은 단지 우리가 보고 싶은 것, 또 볼 수 있는 것뿐이었다고. 왜냐하면 직후의 시퀀스에서는 볼 수 있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확연하게 나뉘기 때문이다. 펄롱 사무실의 유리창은 흐리다. 그 유리창 너머로 사람들은 희뿌옇게 보인다. 사람의 흔적이 흐린 것이다. 그 와중에 전화벨은 계속 따르릉거리며 시끄럽게 울린다. 하지만 그것을 받는 이가 부재하고, 이로써 저 너머에서 들려올 사람의 음성 역시 확인할 길이 없다. 수신 여부를 확인하지 못한 채로, 또한 어떤 사람도 뚜렷하게 보여주지 않은 채로 밀란츠는 냉정하게 다음 숏으로 넘어간다. 그 숏에서 카메라는 고정되어 있다. 여전히 사람들은 잘 보이지 않는다. 오만방자하게 고정된 카메라가 유일하게 관심 있는 것, 이로써 감상자에게 전달되는 것은 오직 돈을 내고 그것을 받는, 자본주의의 논리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손’이다. 이후 겨우 클로즈업되는 펄롱의 얼굴도, 그가 감독하는 노동 현장을 포착한 트래킹 숏도 마찬가지다. 가까이서 정확하게 보여주고,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대상들이라면 열심히 따라다니지만, 그것은 자유로운 인간이 아니다. 감독으로서 감시하는 인간, 그 감시에 맞춰서 열심히 일하는 인간, 이 모든 인간을 공통적으로 관통하는 삭막한 노동과 경제와 지배만이 볼 수 있다. 

그나마 밤이 되었다. 삭막하고 따분하며 위중하고도 고된 일과가 드디어 끝이 난다. 특히 펄롱은 영화 내내 좋은 상사로 그려지기에 직원들은 여가를 즐길 수 있을 테다. 노동자들에게 성탄절에 맞춘 추가 수당과 선물을 충분하게 줬는데도, 거기에 술값까지 내어준다. 그렇게 펄롱과 그의 직원들은 일해야 하는, 그 사실 여부를 열렬히 감시하는 오후에 빼앗긴 여가와 유희를 즐긴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무엇을 할지, 연인과 어떤 시간을 보낼 지, 그러나 이번에도 밀란츠의 손바닥은 냉정하다. 그 즐거운 순간들을 파편적으로만 보여줄 뿐 재빨리 잘라낸다. 이후 이어지는 것은 바로 아침, 막달레나 수녀원에 석탄을 배달하러 가는 펄롱의 모습이다. 즉 삭막한 노동으로 인하여, 그 노동을 지시하는 지배자의 손아귀를 따라하는 밀란츠의 편집에 의해서 보이지 않게 된 것들은 인간다움이다. 자유, 소통, 우애 등 인간이 가진, 죽는 그날까지 놓아선 안 되는 따스한 인간성이 말이다.     


그렇다면 왜 들려주거나 보여주지 않는가. 우리는 보면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판단한다. 계속 걸어갈지 돌아갈지, 어떤 사람과 함께할지 말지 등 우리는 봐야만 선택하고 실천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더 나은 것을 보고 싶고, 더 낫게 행동하고 싶다. 괜히 사르트르와 푸코 등이 시선의 힘을 역설한 것이 아니다. 보는 사람은 그 영향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바라봐지는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투사하고, 그렇게 바라봐지는 사람은 시선을 의식하며 어떻게든 변화한다. 그러한 와중에 인간은 참으로 가여운 대상 및 상황과 마주했을 때, 자연스레 동정심과 온정의 손길을 내민다. 또한 그들을 이토록 참담하게 내몬 대상을 단죄한다. 즉 불의의 상황과 마주한 인간은 시선이라는 특권으로 그 상황을 개선할 수 있는 힘, 계속 존재할 수 있게 하는 의지를 태운다. 

실제로도 펄롱이 응시하는 것들을 보라. 펄롱이 응시하는 대상은 비가시적인, 오직 자신만 알고 있는 '기억'과 객관적으로 존재하지만 모종의 이유로 짧게 스쳐 지나가거나 가려 있는 '물리적 실재'다. 전자의 경우 펄롱이 어떻게든 보려고 노력하는 대상이다. 어머니의 자리를 대신해준 윌슨 부인,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었던 아버지의 역할을 대리해준 네드 삼촌을 보려고 한다. 그들은 현재 물리적 실재로 존재하지 않거나, 최소한 과거의 모습은 사라졌다. 펄롱 모자를 보살피던 그 인자한 미소와 든든한 육체가 지금은 노쇠하다 못해 어딘가에 입원해있다. 하지만 그들로 인해 펄롱은 지금 여기에 존재하고, 이제는 그러한 태도로서 아내와 딸들을 책임져야 한다. 그래서 펄롱은 영화 내내 반복하는, 세상이 어떻게 지시하든 '괜찮게' 살기 위해서 인간성이 내재해 있는 과거로 플래시백한다. 

그 태도를 따라서 아직 연약한 피부를 갖고 빼빼 마른 다리로 위태롭게 도로를 횡단하는 믹 시노트의 아들을 쉽게 지나치지 못한다. 본디 처음 마주했을 때부터 흐린 유리창에 비쳐서 흐렸던 소년은 그마저도 곧바로 스쳐서 사라졌고, 이윽고 사이드 미러로 겨우 보이다가 그마저도 롱숏으로 흐려진다. 그러한 방식으로 약자는 지워지고 있다. 그러나 펄롱은 다가간다. 멀어진 소년을 향해 트래킹 숏으로 가까워진다. 거기서 도입부에서 받지 못했던 전화, 곧 '대화'를 회복하여 안부를 묻는다. 괜찮냐고, 펄롱은 소년이 별 탈 없이 존재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대화는 서로의 삶을 환기하고 확인한다. 물론 아버지의 눈치를 보는 듯한 소년에 의해서 대화가 마냥 솔직하진 않지만, 최소한 소년은 펄롱과의 대화를 통해 자기의 존재를 잠시나마 환기한다. 제가 가진 것을 모조리 수탈해가는 비정한 애비가 존재하는 가정에서 소년은 지워지고 또 지워질 지다. 또한 그 삶이 아주 조금이라도, 찰나라도 괜찮아지게끔 용돈을 건넨다.      


하지만 대체로 펄롱은 그러지 못한다. 수녀원에 맨 처음 갔을 때, 아마도 집과 가축을 모두 처분하고 있다는 윌슨의 딸로 추정되는 여성이 강제로 맡겨지고 있었다. 펄롱은 아마도 여인의 자유 의지를 꺾는, 그 야만의 현장에 다가가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푹 숙인다. 그는 초라하고 그녀는 ‘롱숏’, 멀리 있다. 그러다가 믹 시노트의 아들까지 만난 이후 귀가한다. 집에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지만, 왜 믹 시노트의 아들에게 용돈을 줬냐며, 소년에게 별 말은 안했냐며 핀잔을 주는 대화만 오간다. 그리고 말해야 하는 것은 딸들이 얼마나 학교를 잘 다니고 있는지, 오직 내 가족의 안위다. 그렇게 식구들은 눈을 감을 것을 간청하지만, 펄롱은 눈이 도무지 감기지 않는다. 보고 싶고 참여하고 싶은 그는 어느 날 밤 산책을 나서서 피골이 상접한 소년이 고양이에게 주려고 내놓은 우유, 아마도 신선하지 못할 그것이라도 헐레벌떡 들이키는 모습을 본다. 하지만 그 현장도 어김없이 롱숏이다. 펄롱은 더 가까워지지 못한다.

본디 인간은 약자에게 호의를 베풀 것이 몸 안에 간직되어 있다. 우리와 공동 선조를 둔 영장류들 대다수한테서 발견되는 특성이자 본질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본 작의 배경인 20세기,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그 따스한 인간성이 '더러운 것'으로 치부되어 온다. 그렇게 집에 들어온 펄롱은 손을 씻는다. 석탄 유통업을 하기에 물리적으로 더러워서 그렇게 박박 씻는 걸까, 아니다, 그 이후 어머니의 죽음을 떠올리면서 상처가 날 정도로 더욱 거세게 손을 문대는 것을 보건데 관념적인 더러움을 씻는 것이다. 그 관념적인 더러움이 바깥에서 눈을 뗄 수 없던 슬픈 상황들, 나를 불편하게 하던 약자들이다. 그리고 인간은 그 불편함을 향해 손길을 내밀면서 정서적으로 깨끗해져야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죄책감, 가책, 불편함을 그저 씻고 내려놓는 게 문화가 되었다. 모두가 괜찮기를 바라는, 그렇게 너, 나 우리가 괜찮아야 존재할 수 있다는 진리가 더러운 것으로 치부되는 것이다.     


이로써 '괜찮아'라는 말이 오직 나, 그 내가 속한 최소한의 바운더리인 '가족'만으로 축소된다. 펄롱은 괜찮아라는 말을 괜찮지 못한 존재들에게 건넨다. 믹 시노트의 아들, 수녀원의 세라 등에게 말하고 괜찮기를 바라거나, 그렇지 못하다면 괜찮지 못한 이유를 해결해주고 싶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충분히 괜찮은 존재들끼리 괜찮아라는 말을 교환한다. 물론 딸들의 대입이나 기독학교 입학도 매우 중요한 일, 괜찮아져야 하는 일이지만, 그것이 과연 차가운 길거리에 얇은 옷만 입혀져 비정하게 내던져진 존재들에 비해서 덜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가. 펄롱에게 더는 수녀원의 일에 관여하지 말라고 하는 술집 주인도 그렇다. 그녀 역시 걱정되는 게 많긴 하지만 펄롱에게 받는 돈, 술집에서 북적거리는 손님들을 보라. 수녀원장의 폭정으로 더 안 괜찮아질 수는 있지만, 그래도 가게가 있고 집이 있는 존재는 펄롱이 지나쳐온 그들보다는 괜찮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영화의 도입부처럼 충분히 사치스러운 존재끼리 괜찮아라는 말을 오용하는가? 이유는 크게 두 가지, 먼저 자신의 죄책감을 달래기 위해서, 펄롱은 영화 내내 안 괜찮은 존재들을 괜찮게 만들지 못했다. 심지어 괜찮냐는 말조차 못 건넨 존재들이 있다. 그것에 대해서 자책하고 마음아파 하며 딴 생각할 수 없는 게 인간성이다. 딸들이 시끄럽게 재잘대는 수다는 음소거되고, 비가시적인 영역으로 침잠하며 고뇌한다. 인간성은 자신과의 대화다. 하지만 고뇌는 고뇌에 그친다. 그 고뇌가 안 괜찮은 존재에게 향할 수 없게끔 다들 핀잔을 준다. 이에 어떻게든 그 불편한 마음을 해소하기 위해서 괜찮은 사람들에게 괜찮냐는 말을 건네는 것이다. 아버지의 일을 도와서 사무실에서 일하는 장녀 역시 괜찮다. 불량한 남자애들이 추파를 던지며 상황이 안 괜찮아질 여지가 있긴 있지만 그래도 충분히 그 청년들을 거부할 수도 있을 만큼 자라났고, 또한 마을 내 펄롱의 평판이나 입지를 고려했을 때 쉽게 건들 수도 없을 테다. 하지만 그 딸에게 재차 괜찮느냐고 묻는다. 펄롱의 동공이 지나친, 그 수많은 안 괜찮던 사람들에게 건네야했던 괜찮아를 대상을 확인하지 않고 연신 되뇐다. 

약자에게 괜찮냐는 말을 건네면 자연스레 분노의 방향은 그 약자를 착취하고 핍박한 강자들한테 향할 것이다. 하지만 강자들은 그 괜찮지 못한 분노의 화살이 자신에게 향하는 것을 저지한다. 강자는 약자를 핍박함으로써 어마어마한 부를 쌓았고 지금도 쌓고 있다. 심지어 인간이 인간을 팔아먹고, 가장 취약한 상태의 인간인 신생아를 인신매매하기에 이른다. 이로써 사회의 많은 영역을, 또한 법을 장악하고, 이를 이용해 여전히 타인들이 자신을 위해서 봉사할 것을 명령한다. 펄롱이 주문대로 정당하게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강자는 변덕을 부리며 조개탄을 가져오지 않으면 돈을 주지 않겠다고 윽박지른다. 그렇게 봉사하지 않으면 사회에서 불이익을 가한다. 학교 입학에 지장을 줄 것이고, 심지어 펄롱의 이웃들도 겁박하여 점점 펄롱 일가를 고립시킬 것이다. 괜찮지만 괜찮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는 아일린의 공포가 아예 이해 안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강자의 명령을 따른다면 그 근심은 너무도 깨끗하게 잊힌다. 그것이 '심미성'의 힘이다. 펄롱의 초반부 플래시백은 '도피'의 의미도 지닌다. 윌슨 부인의 집에 울려 퍼지는 우아한 클래식과 향긋한 위스키 향, 엄마와 네드 삼촌의 연애가 가져다주는 낭만성이 불쾌감을 몰아내고 만족감만 안겨다준다. 성탄절 당일에 선물을 고르며 미소를 지을 딸들의 얼굴을 상상하거나, 깔끔하게 이발을 하러 가는 행동도 마찬가지다. 삐죽삐죽 튀어나와서 보기 싫은, 따끔거리는 불쾌함을 깔끔하게 면도하는 심미성을 수녀원장은 비인간적으로 써먹으며 '눈' 이야기를 한다. 눈은 골치 아픈 것이지만, 그것이 새하얗게 온 세상을 뒤덮으면 참으로 아름답다고. 왜 아름다운가, 이 세상에 가득 찬 부조리를 새하얗게, 마치 아무 문제도 없다는 듯 순수하고도 순진하게 가려버리기 때문에, 마치 신성하고도 청아하게 울려 퍼지는 성가대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 눈은 봐야할 것이 보이지 않게 한다. 아무리 와이퍼가 펄럭거려도, 차창에 낀 김을 손바닥으로 어떻게든 닦아내고 또 닦아내도 그 아름답고도 순일한 것이 봐야할 것을 안 보이게 만든다. 임산부의 노역을, 석탄실에 숨어있는 세라를, 핸드헬드로 바들거리며 떨고 있는 그녀들의 절박함과 호소를…  

   

그래서 우리는 보고 들어야 한다. 영화 내내 울려 퍼지는, 그러나 그 누구도 받지 않고, 또 대화 내용을 확인할 수 없는 전화기는 결코 들을 수 없는 무언가를 상징할 것이다. 충분히 들을 수 있는 강자의 지시, 이웃과 아내의 호소에 비해서 받아선 안 되는 것은 바로 약자의 간절한 절규다. 그것을 듣고, 그 청각이 새어나오는 시각 역시 봐야만 한다. 막달레나 수녀원의 부패한 수녀들은 갈 곳 없는 여인들에게 강제하는 노역과 그 부조리한 환경을 펄롱이 못 보게끔 아주 빠른 발걸음으로 내쫓는다. 그러나 펄롱은 그 짧은 순간을 속속들이 보다 못해서, 조금도 자르지 않는다. 롱테이크, 그리고 팔로우 숏으로서 말이다. 또한 돌아가서 세라와 자신의 이름을 교환하기에 이른다. 이후 그녀를 구하게 된 그는 마땅히 보여야 할 세라가 선명해질 수 있도록 조력한다. 본디 핸드헬드와 아웃포커싱이었던 그녀를 선명하게, 또한 탄탄한 스테디캠으로, 반면 그녀를 데리고 가는 그를 쏘아보는 주민들의 눈총을 아웃포커싱한다. 그렇게 진정으로 손을 세척할 수 있게 된다. 정말 더러운 것을 해결함으로써. 

즉 우리는 봐야할 것과 외면해야 할 것을 구분해야 한다. 모두가 그 태도를 고수할 때, 모든 약자를 구원할 수는 없어도 그 온정이 모이고 모여서 우리가 다시 재건될 지다. 밀란츠는 키건의 원전을 충실하게 옮겨오면서도, 키건이 단순하고도 우직하게 부각하는 인간성처럼 어떻게 촬영하고 어떻게 편집할지, 그 최소한의 고민으로 단순하지만 중요한 것들을 동시에 부각한다. 특히 극이 전개될수록 카메라는 인간다움을 잃지 않으려는, 수심에 찬 펄롱의 얼굴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 클로즈업이 바로 우리가 멀어져선 안 되는 무엇이요, 이를 바탕으로 본 작품을 감상하는 우리도 괜찮아야만 한다. 작가와 소통하기 위해선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최대한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감상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듣는 감상자 자신의 주관성과 감상자가 속한 특수한 시대상을 배제할 수 없다. 우리는 작가를 이해함과 동시에, 그 대화가 우리에게 이롭기를 바란다. 당장 필자도 지난 대선 결과가 나온 당일에 곧바로 감상한 <레벤느망>이 더더욱 잔혹하고도 서늘했던 기억이 난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도 마찬가지다. 10월이나 11월이라면 달랐겠지만, 이 작품은 2024년 12월 11에 대한민국에서 개봉했기에 우리가 군홧발에 맞서 지키고자 하는 것, 밟혀지고 총구가 겨눠졌을 대상들끼리의 연대와 저항을 의도치 않게 환기하고, 아무리 부정해도 그렇게 보게만 되는 우리의 의지는 결코 꺾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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