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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프단 울만 톤델, <모든 것은 아르망에서 시작되었다>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만큼의 객관

by 정수 Dec 26. 2024

하프단 울만 톤델(Halfdan Ullmann Tøndel), 

<모든 것은 아르망에서 시작되었다>(Armand)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만큼의 객관  

브런치 글 이미지 1

세계는 넓고 거대하며 그만큼 다양한 것들로 가득 차있다. 그렇기에 어떤 이가 전전긍긍하는 일은 심각할 수 있지만 대체론 사소할 확률이 높다. 그가 맞닥뜨린 사안은 주관적인 시선에선 아주 거대하지만, 정작 객관적으로 더 큰 안건들과 비교될 수 있다. 또 어떤 현상이나 존재는 여러 가지 맥락에 위치하고, 아주 다양한 관점으로 조명된다. 이에 그 사안을 두고 여러 공방이 오가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하지만 인간은 그 다양함이라는 당연함을 결코 수긍하지 못한다. 각자에게 참은 오직 나다. 

그래서 세계는 드넓지만 그 세계를 바라보는 개인의 시야는 좁다. 무한한 세계 속에서 좁디좁은 아집만 고수하는 인간의 필연적인 본성 때문에 발생하는 고뇌를 스웨덴의 전설적인 시네아스트 잉마르 베리만이 늘 탐구해왔다. 또한 그의 예술적 동료이자 연인이었던 배우 리브 울만 역시 영화감독으로 데뷔하였을 때 인간의 폐쇄성을 고찰하였다. 이들은 세계의 거대한 섭리인 형이상학을 탐구하면서도, 동시에 미시적이고 주관적인 것에 천착하는 인간 본성을 대비하였다. 제 3자의 시선에서 "대체 왜 저래?" 싶은 폐쇄성과 고집, 하지만 인간은 그럴 수밖에 없다. 어떤 원인이든 죽음이라는 한계 때문이든, 드넓은 세계 중 협소한 일부에만 예속되어 있는 존재, 거기서 어떻게든 버텨내려면 그만큼 하찮은 것에도 예민해질 수밖에 없는 존재가 바로 인류다. 이 탐구를 베리만과 울만의 손자인 하프단 울만 톤델이 장편 데뷔작에서 이어간다.      


톤델은 흥미로운 몇 가지 시퀀스들로 ‘객관과 주관의 대립’, 더해서 물리적 실재라는 객관을 포착하는 카메라의 역할과 한계를 탐구한다. 그렇다면 먼저 객관과 주관의 의미를 정립하고 가자. 철학자 헤르만 슈미츠는 주관과 객관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논한다. 주관은 오직 한 사람만이 자신의 이름으로 사태를 진술할 수 있는 것이다. 주관적 사실은 삶 자체에서 포착된 사실, 충만한 현실성의 무게를 지닌 사실, 운명적인 얽힘의 사실이다. 반면 객관성은 어떤 사태를 누구나 언어로 진술할 수 있는 유형이다. 객관적 사실은 증류된 사실 내지는 빛이 바래서 중립성이 된 사실로서 순수하게 기록하는 태도로만 접근할 수 있다. 객관성이 주관성으로 전도되는 순간 사실은 더 풍부해지고 자신에 의해 현저하게 강화되지만, 한편 객관성을 잃고 주관성만 남을 때 타인은 동의하기 어려운 것으로 전락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주목할 만한 첫 번째 시퀀스는 도입부다. 도로를 위험천만하게 가로지르는 누군가가 그야말로 분노의 질주를 하고 있다. 직후 이어진 두 번째 숏에는 그 차량 룸미러에 운전자의 눈동자가 클로즈업된다. 동공의 주인은 영화의 주인공 엘리자베스로 그녀는 아들 아르망과 통화하며 전폭적인 믿음과 사랑을 표현한다. 이후의 시퀀스에서 아르망이 친구 욘에게 폭행과 성추행을 가한 용의자임이 드러나기에 오직 앞만 보고 고집스럽게 달려가는 엘리자베스는 객관, 곧 진실이 어떠하든 아들만 믿겠다는 주관을 표명하는 것이다. 그만큼 완고하게 치우친 주관이란 일방적인 것, 행위가 과속이라는 점에서 불법, 즉 잘못된 것 내지는 거짓일 수 있다. 또한 그녀는 아무리 주관에 편향돼도 자꾸만 룸미러로 뒤를 돌아본다. 누가, 아마도 경찰이 자기를 좇아오지 않을까하는 불안, 곧 속도를 위반했다는 객관을 고발하지 않을까 걱정한다. 즉 인간은 아무리 주관이 중요해도, 그것의 옳고 그름을 판가름하는 근거로서 객관을 무시하지 못한다. 아무리 일방적으로 주관을 밀고 나가도, 내심 객관이 주관을 방해하지 않기를, 또한 편들어주기를 소망한다.

그 이후엔 학교의 곳곳을 촬영한 시퀀스를 주목해야한다. 여기선 카메라와 객관의 관계가 드러난다. 먼저 롱숏으로 학교의 외관을 샅샅이 훑는다. 이후 학교 내부로 들어가 실내 구조, 아이들의 사진, 그림, 다양한 사물 등을 클로즈업한다. 여기까지는 카메라가 대상의 물리적 객관을 보여준다는 사실에 그 누구도 반박하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카메라는 아주 객관적이지만, 그 카메라에 사람의 손이 개입한다면, 또한 주관적인 편집이나 기교가 뻗친다면 어떻게 변할까? 톤델은 학교의 세부를 포착한 숏 사이사이를 디졸브하여 전후를 중첩한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하거나, 아주 의미심장해 보이는 줌인과 줌아웃을 선보이기도 하며, 어딘지 미심쩍다는 듯 여러 각도로 카메라를 워킹한다. 그 연출 각각에 톤델이 어떤 의도를 담았는지 일일이 파악하긴 어렵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카메라가 도출한 물리적 실재엔 충분히 주관이 개입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자명하던 객관은 어느새 아리송한 주관으로 얼룩진다.     


카메라는 사물뿐만 아니라 인간의 육체 역시 객관적으로 포착할 수 있다. 톤델이 본 작품에서 유별날 정도로 클로즈업을 자주 사용하는 이유 중 하나다. 톤델은 인물의 얼굴이 중앙에 위치하는 안정적인 구도와 조금의 흔들림도 허용하지 않는 스테디캠으로 초상을 클로즈업한다. 초반부에 한정해서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대상이 어떤 이목구비를 가졌고 피부색이나 결은 어떠하며, 무슨 표정을 짓는지 인식한다. 그런데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그 물리적 실재에 그치지 않는다. 물리적 객관 배후에 숨어있는 비가시적인 무언가, 객관적으로 포착할 수 없어서 주관적으로 재현될 수밖에 없는 무엇을 우리는 알고 싶다. 그것이 사물과 인간의 차이다. 사물은 학교를 포착한 시퀀스에서 보여준 물리적 실재만으로도 중요한 정보를 꽤 파악할 수 있지만, 인간은 그것만으론 역부족이다. 대상이 어떤 인격을 가졌고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떤 사실을 알고 있는지, 비가시적인 내면에서 꿈틀거리는 무언가를 우리는 캐내고 싶다. 그래서 카메라는 객관적인 촬영을 때때로 포기하고, 인물의 그림자랄지 발걸음이 되어 그 '의식'에 도달해보고자 한다. 마치 <사울의 아들>처럼 인물의 등 뒤에서 카메라가 따라다니는 핸드헬드 팔로우 숏으로 말이다. 이 순간 카메라가 촬영한 것은 객관적 실재가 아니라, 왜곡되거나 조작된 이미지에 가깝다. 급박하고도 초조하게 흔들려 대상의 외관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촬영 감독이나 주인공의 상황 및 의도가 주관적으로 반영된 결과라 하겠다. 하지만 영화는 이처럼 객관적 실재를 포기하고 주관적인 이미지가 되어야만 인간의 비가시적인 핵심을 전달해낼 수 있다. 

시각적 객관이 주목적이자 장점이지만 정작 이미지를 지향해야 하는 카메라의 딜레마는 중반부, 히터의 열기와 외부 온도 차에 의해 발생한 '아지랑이'가 인물들의 얼굴을 가리는 숏에서 정점에 달한다. 그 숏은 답답하다. 인간의 얼굴은 물리적 객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영혼의 창으로 일컬어져 사람의 비가시적인 신비가 이따금 새어 나오기 때문이다. 또한 영화를 보는 감상자의 관심은 아지랑이라는 물리적 현상이 아니다. 아르망의 혐의가 과연 참인지, 참이라면 어떤 연유로 그런 일을 벌였는지, 혐의가 거짓이라면 욘의 팔에 난 멍은 누구의 소행인지 등 의혹이 영화의 관객에게만 특정되는 관심사다. 그 호기심이 우리에겐 아지랑이라는 물리적 실재보다 더 흥미를 끌고 중요하다. 어떤 이에겐 다르겠지만 영화를 보는 사람에 한해선 욕망이자 중요한 지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카메라는 더더욱 고민에 빠진다. 인간은 각각의 중요한 주관을 따르는데, 정작 카메라는 주인과 달리 객관만을 지향하는 게 사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카메라는 비가시적인 무엇을 가시화하는 일에 약한 모습을 보인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초상을 촬영하는 카메라는 본디 안정적이었다. 그런데 이제 관객은 등장인물들의 물리적 객관은 충분히 알았으니 비가시적인 것에 갈급하다. 그래서 당사자들이 모두 모여 진술을 시작하는 그 순간 카메라는 돌변하여 이들의 얼굴을 떨리게 촬영한다. 엘리자베스와 사라 각각의 진술, 그것을 받아들이는 각자의 얼굴 모두 카메라는 덜덜 떨고 있다. 현장이 흔들리지 않는데 카메라가 덜컹거린다면 그것은 촬영자의 어떤 의도가 개입한 것인데,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물리적 실재를 포착함에 있어 카메라는 더할 나위 없는 참이어도, 그 물리적 실재에 표상되는 비가시적인 무언가를 포착하는 일에는 확신이 없기에 명확한 촬영을 포기하는 것인가? 아니면 아지랑이가 일렁이던 숏에서 어떻게든 포커싱을 조정한 것처럼, 주관의 차이로 인해 발생하는 팽팽한 비가시적 긴장감을 드러내기 위해 고의적으로 카메라를 흔드는가? 무엇이든 비가시적인 것과 연관된 것은 분명하다.     


이처럼 객관적인 시각만으론 사실은 일부에 그치고, 총체적인 사실은 추론과 해석의 영역을 포괄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본 작품이 종합예술인 영화라는 점, 카메라의 곁에 청각과 언어가 놓여 있다는 조건은 그야말로 천운이다. 그들은 이 물리적 객관 배후에 숨겨진 비가시적인 것들을 파악하는데 힌트를 준다. 본디 감상자는 엘리자베스의 직업이 배우인지 몰랐고, 사라의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 단정할 수 없지만 아르망과 다소 부적절한 관계라는 것도 몰랐으며, 남편의 유무나 생사 역시 몰랐다. 그 정보들은 과거의 것이라서 오직 현재만을 포착할 수 있는 지금의 카메라에겐 기대할 수 없는 임무다. 그러나 본 작품은 영화라서 카메라 시야 바깥의 것, 시각이 품지 못하는 다른 요소들을 끌어온다. 우리는 엘리자베스가 당당한 척 연기를 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 그녀 밑에서 부적절한 영향을 받은 아르망이 진짜로 나쁜 짓을 벌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한편 엘리자베스는 욘이 자신의 집에 6개월 동안 40회 가량 방문했고, 소년은 이에 만족했으며 사라 역시 별 불만이 없었다는 말로 반박한다. 또 이 주장을 따르면 엘리자베스가 억울하게 보인다. 이 상반된 주장 중 무엇을 믿을지 아직까지 속단할 수 없다. 다만 객관적인 시각을 슬슬 판단할 수 있는 관점과 맥락이 추가되며 비가시적인 무엇을 길어낼 순간이 머지않은 것 같다. 

미술과 사진보다는 더 총체적인 객관에 다다를 수 있는 매체, 영화한텐 또 다른 무기인 편집이 있다. 수집된 그 모든 요소들을 나열하여 추론의 결과를 이어낼 수 있는 힘이다. 그런데 오롯한 결과는 사실 롱테이크에 그친다. 자르고 오려서 이어낸 편집은 유실된 롱테이크를 재현할 수도 있지만, 그저 그럴듯한 선동일 수도 있다. 현상에 대한 객관이 아니라, 감독 개인의 취향이 반영된 쿠키나 코피, 곧 주관을 이어낼 수도 있다는 얘기다. 회의 중 에이샤가 코피를 쏟는다. 그 이전 숏에서 분위기는 다소 격양되어 있었다. 그래서 에이샤의 코피 원인이 엘리자베스가 원인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초반부에도 에이샤는 쉽게 코피를 흘렸고, 이후 수습하는 과정에서 아직 원인을 모르는 습관성임이 드러난다. 얄레가 춤추는 엘리자베스를 목격한 장면도 마찬가지다. 그 장면을 마치 결과마냥 잘라버린다면 감상자는 얄레처럼 엘리자베스가 불안정한 정신을 가졌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런데 직후 엘리자베스가 카메라가 보지 못한 사각지대에서 팬인 청소노동자와 함께 합을 맞추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결과인줄 알았던 숏이 과정이었고, 정신질환을 의심하기보다는 일련의 팬서비스로 보는 것이 옳을 지다. 즉 어디까지 이어내고 어느 부분을 자르며 과정과 결과 사이에 어떤 것을 끼워 넣을지, 그 주관적인 인간의 손가락이 비가시적인 객관을 비출 수도 있지만, 그럴듯한 거짓을 도출할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톤델이 선택한 16mm 필름의 쓰임새를 고찰해볼 법하다. 최근 북유럽 영화계에는 35mm 필름 광풍이 불었다. 국내에서 제법 흥행을 한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와 <해시태그 시그네>가 대표적이다. 그래서 본 작품의 16mm 필름도 이러한 작품들의 유행을 따라가려나 싶었다. 그런데 이들과 질감이 확연하게 다르다. 앞선 작품들이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뿌옇고 희멀거며 차가운 빛살을 35mm 필름으로 구현했고, 또 청춘의 꿈과 욕망을 아스라한 미장센으로 승화한 것이라면, 톤델의 16mm 필름은 그것보다는 칙칙하고 탁하다. 오히려 동시대의 작품들보다, 조부인 베리만의 <가을 소나타>나 <결혼의 풍경>과 더 닮아있는 미장센이라 하겠다. 그 필름으로 인물들의 얼굴을 치열하게 클로즈업하여 비가시적인 주관을 드러내려는 경향 역시 유사하다.

동시에 톤델의 16mm 필름은 중반부를 지나면 지날수록 그레인과 노이즈가 더 많아진다. 영화가 중반부를 지날 때쯤 감상자는 등장인물들 간의 상충되는 여러 주관이 교차하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고, 또 카메라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의 한계 역시 드러났다. 이런 상황에서 16mm 필름은 그레인과 노이즈를 잔뜩 노출하며 물성을 뽐내는데,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 기록한 바가 물리적 실재로 정확하게 남는 필름과 달리, 오늘날의 디지털은 점점 더 그럴듯하게 존재하지 않는 것을 꾸며낸다. 이런 상황에서 16mm 필름은 자신이 비춘 바가 물리적 실재임을 더더욱 과시하려고 물성을 드러내는가? 동시에 그 물리적 실재가 훼손되어가며 그레인을 노출한다는 것은 영화 역시 스스로의 물리적 실재만 반영할 뿐, 영화가 담아낸 것의 객관에선 흐려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이러나저러나 본 작품의 탁한 16mm 필름은 피상적 객관 너머로 접근할 수 없는 영화의 한계를 보여준다.      


여기서 드는 의문, 왜 인간은 물리적 실재라는 객관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 너머의 보이지 않는 무엇에 접근하고 싶어 하는가? 그것은 주관, 곧 '나의 이익'과 깊이 연관한다. 학교를 포착한 시퀀스 직후 톤델은 순나의 얼굴을 클로즈업한다. 그녀는 쿠키를 먹고 있다. 그것은 학교라는 현장의 무수한 구성원 중 오직 그녀 자신에게만 중요한 주관적 행위다. 타인은 배고프지 않다면 관심이 없을 테요, 또 학생은 등·하교가 먼저다. 이후 회의가 시작돼서 취식을 멈추고 급박하게 다른 교실로 향한다. 그 회의는 객관적인 것이라 하겠다. 누구도 반박 못 할 옳고 그름을 가리는 시간이니 말이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에이샤는 코피가 난다. 그 모습을 톤델은 순나를 포착할 때와 마찬가지로 익스트림 클로즈업한다. 남들에게는 그저 걱정스럽고 우려스러운 것, 심지어 사건 당사자들이 모두 모인 상황에서 코피가 난 에이샤에게 얄레는 화장실에 가지 말고 회의실에 남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 각각에겐 객관적인 상황보다 허기진 순나의 위장, 뚝뚝 떨어지며 옷을 더럽히고 불쾌한 피비린내를 남기는 에이샤의 코에 더 근접해야 한다. 앤더스가 엘리자베스에게 갖는 흠모라는 감정, 사라의 질투심, 토마스와 얽힌 얄레의 복수심도 마찬가지다. 즉 객관이란 누구에게나 다 중요한 것이긴 하지만 그보다 내게 더 압도적으로 중요한 것이 주관이다. 

여기서 객관은 주관의 도구로 전락한다. 이들이 평정심을 유지할 때, 진지한 모습일 때 객관은 그리 간절해 보이지 않다. 오직 유일하게 엘리자베스만 흥분한 모습으로 제시된 의혹을 뒤집어 객관을 도출하려 한다. 그러다가 구성원 다수가 분노하고 격양된 모습을 보일 때 아주 절박하게 객관을 놓고 다툰다. 앤더스가 폭력을 쓰고 협박을 할 때 사라의 오류가 탄로 나는 것처럼 말이다. 즉 누군가는 객관 자체가 주관의 목적을 이룰 도구가 되고, 또 다른 누군가에겐 그 객관이 부정되어야만 주관이 만족스럽다. 그래서 객관에 닿기 위해선 그 객관과 접촉하는 주관을 읽어내야 한다. 객관에 다가가려는 자가 더 신빙성을 갖는 반면, 객관을 더럽히려 하는 자의 발언이 거짓이다! 

하지만 그 주관은 이해하기 어렵다. 엘리자베스의 '웃음 시퀀스'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에이샤의 어떤 발언을 듣고 다른 사람들은 다 진지한데, 엘리자베스 혼자 폭소가 터졌다. 타인이 제지를 하는데도 웃음을 참지 못하다가, 이내 곧 그 폭소는 울음으로 뒤바뀐다. 엘리자베스의 웃음은 특정 기대가 해방되거나 풀어질 때 발생하는 '해방 이론'이 아니라, 기존의 범주를 위반하는 즐거움인 '유머의 부조화 이론'을 따를 것이다. 에이샤의 말이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태도니 말이다. 여기서 다른 사람들은 가만히 있기에, 엘리자베스에게만 에이샤의 발언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얘기다. 그런데 우린 그 엘리자베스의 기준을 모른다. 이를 파악하려면 언어로써 자신의 감정을 이해시키려고 노력해야 하는데, 문제는 본 작품에서 언어는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객관의 도구로만 사용된다. 엘리자베스가 감정을 쏟아낸 이후 다른 학부형들과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 감정을 숨기고 연기를 하며 그저 '관례적'으로 누구에게나, 어떤 상황에나 통용되는 인사를 건네는 것처럼 말이다. 순나도 마찬가지로 파이잘의 시선에서 이해되지 않는 신경질을 보였었는데, 직후 언어를 활용하여 제 감정과 주관적 실수를 고백한다. 그러나 그 발화는 파이잘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객관적으론 잘못됐고 다른 주관이 이해하기엔 너무나 다른 주관이기에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감정을 쉽게 풀이할 수 없다.     


하지만 객관에 다다르기 위해선 그 객관과 관계 맺는 주관들의 비밀을 어떻게든 풀어야 한다. 그런데 감각적인 주관을 이성적인 언어를 거쳐 번역하면 오역이 발생할 수 있다. 그래서 톤델은 시각적 객관을 포기하며 주관을 가시화하고, 또한 주관을 거의 있는 그대로 재현할 수 있는 역할을 감정적인 영화가 수행할 수 있으리라 본다. 지금껏 본 작품은 시각 못지않게 청각 또한 객관적으로 담아왔다. 화재경보기 알림이 그렇다. 하지만 그 객관적인 청각만으로는 고장 난 화재경보기의 알림이 참인지 거짓인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주관이 객관에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해답이 있었다. 그래서 톤델은 아예 객관적이지 않은 '환청'과 '환각'을 연출하며 주관을 가시화한다. 엘리자베스가 무수한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다는 것을 합창단 중 한 어린이의 입을 클로즈업하여 보여준다. 편향적이고 일방적인 입장에 휘둘리고 있는 그녀는 그 사실을 접한 학부모들의 주관에 의해 더더욱 입방아에 오르내리며 그야말로 노리개로 전락한다. 즉 아이를 지키고 싶은 학부모들의 주관이 더더욱 용의자에 대한 다른 객관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그 환청과 환각으로 주관의 이해관계를 해제한 후 앤더스가 밝힌 의혹을 교사들에게 전한다. 폭우 속에서 울린 화재경보기, 곧 불이 나지 않을 환경에서 경고를 믿었었다. 그 상태에서 오직 엘리자베스만 다른 의견을 가져서 동떨어졌다. 그러다가 의혹이 해결되어 다들 엘리자베스한테 모여든다.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객관은 엘리자베스의 주장이었던 것이다. 

다만 우리는 여전히 잘 모르고 일부만 안다. 아르망의 혐의와 관련된 주관을 꽤 해제한 것은 사실이나, 그 이상의 것이라곤 말할 수 없다. 엘리자베스의 말처럼 "너무 많지도, 그렇다고 적지도 않게" 알고 있다. 사라가 제기한 의혹 중 나체 포옹이나 아르망과의 부적절한 관계는 다뤄지지 않았다. 그에 대한 객관은 엘리자베스와 사라 각각이 또 다른 태도를 보일 수 있다. 즉 물리적 실재 너머의 비가시적인 객관에 닿기 위해서 우리는 주관을 필요로 하고, 그 주관의 무수한 변덕과 이해관계가 어떤 객관은 진실 그 자체로, 또 다른 객관은 조작한다. ‘카오스’ 그 자체인 주관이 객관과 맺는 이해관계가 진실의 열쇠다. 이렇듯 흥미로운 탐구, 특히 유사한 주제를 다루고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아들들>에 비해 더 빼어나게 접근하는 작품이지만, 카메라와 영화의 한계를 보여주는 인상적인 숏들은 중반부를 거치며 점차 사라져 평범한 서스펜스로 전락하고, 환각과 환청 숏이 지나치게 적나라하고도 직관적이어서 오히려 유치해진다. 끝까지 매력을 살릴 수 있는 방안을 고안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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