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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2025

브래디 코베, <브루탈리스트>

두 가지 그림자: 물질과 주권성

by 정수

브래디 코베(Brady Corbet), <브루탈리스트>(The Brutalist)

- 두 가지 그림자: 물질과 주권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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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탈리즘’은 뾰족뾰족하고 우락부락하며 육중하고 거칠지만, 동시에 그만큼 위압적이고 합리적인 느낌을 주는 건축 양식이다. 양식의 이름 자체가 '원시 콘크리트'를 뜻하는 프랑스어에서 유래된 만큼 콘크리트를 잔뜩 덧칠해놓은 듯한 질감이 특징이며, 모더니즘 건축의 아버지 ‘르 코르뷔지에’의 영향으로 발전한 만큼 기하학적인 정밀함과 기능성도 특징으로 손꼽힌다. 브루탈리즘을 발전시킨 대표적인 건축가로는 ‘마르셀 브로이어’와 ‘폴 루돌프’를 꼽을 수 있는데, 브래디 코베는 이 두 건축가에서 영감을 받은 가상의 전기 영화 <브루탈리스트>를 선보인다.


1988년 애리조나 태생의 브래디 코베는 미국의 배우이자 영화감독이다. 배우로서 그는 <포스마쥬어: 화이트 베케이션>,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 <생 로랑>, <에덴: 로스트 인 뮤직> 등 유럽 시네아스트들의 작품에 조연으로 자주 등장하고, 거기서 기성 배우의 전문적인 기교나 극적인 톤이 느껴지지 않는, 리얼리틱한 연기를 선보였다. 이러한 연기 스타일처럼 그가 영화감독으로서 연출하는 작품들 역시 미국 영화 특유의 극적이고 과장되며 들뜬 톤과는 거리를 둔다. 코베의 영화는 건조하고 메말라있으며, 나탈리 포트만이나 주드 로 등 일상에서 쉽게 보기 어려운 환상적인 배우들이 등장한다고 한들 현실적인 톤을 일관되게 주문한다. 이를 바탕으로 좁게는 미국을 지탱하는 메커니즘, 넓게는 전 세계를 잠식한 주권성에 의한 비극을 탐구한다.

코베는 늘 전기 영화를 연출해왔다. 영화를 보다보면 자연스레 연상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영화에서 묘사하는 인물이 구체적으로 누구라고 특정할 순 없다. 실존 인물과 성격 일부를 공유하되, 동시에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해당하는 보편성을 공유한다. 그 이유는 대상이 특정 국가에서 살았기 때문, 또한 본인이 최고 권력을 갖는다고 착각하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은 주권성을 따르기 때문이다. 코베가 배우로서 참여한 <포스마쥬어: 화이트 베케이션>, 곧 '불가항력'처럼 이들은 선택하지 않고 탄생'된' 가족과 세계를 고스란히 따르게 된다. 유년기에 형성되는 개인의 꿈과 자아는 스스로 주체적이라 착각하지만 결코 주체적이지 않다. 자신이 향한 세계가 아니라 인도'된' 세계에 의한 만들어짐, 모두 다 자기 자신이 최고 권력을 행사한다고 믿기 때문에 타인에게 유리한 욕망이 늘 나 자신에게 투사된다. 그래서 코베는 그 권위적이고도 위압적인 세계를 롱숏으로 포착하고, 또한 성인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유년기를 아주 깊게 비춘다.

주권성은 주체성과는 다르다. 코베의 관점은 주권성이 주체성을 침해한다고 본다. 주권성은 내가 가장 큰 권력을 지녀야 하기에 타인은 늘 나보다 낮아야 한다. 반면 자유로운 제 의지를 역설하는 주체성 개념에서 타인은 방해꾼도 될 수 있지만, 동시에 두 개의 주체성은 충분히 존중과 협력이 가능하다. 주인공들은 유년기에 모두 다 공존할 수 있는 주체성의 좌절을 겪는다. 피해자가 된 주인공들은 제 삶의 주권성을 되찾으려 하는데, 동시에 그들 역시 타인에게 주권성을 횡포하게 휘두르는 가해자가 된다. 이에 나와 타인은 1인 2역이다. 분리되지 아니하고 나를 위한 도구다. 또 주체성이라면 스스로 책임져야 할 것들이, 주권성에선 내 권력을 위협한다. 그래서 모조리 타인에게 전가하며, 그렇게 자신의 신화는 높다랗게 쌓여 올라간다. 이런 와중 주권성의 피해를 주로 입는 성별은 여성이다. 남성이 여성에게, 어머니는 딸에게, 그 여성들은 늘 '무서움'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며 주권성을 행사하기 보단, 주권성을 행사하는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형국이다. 그 여성에 유대인이 추가된 극이 바로 <브루탈리스트>다.


코베는 데뷔작 <더 차일드후드 오브 어 리더>에서 소름끼치게 사용한 어둠을 신작에도 이어온다. 도입부, 아직 감상자의 눈에 매개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정확히는 ‘아무것도 없음’, 바로 어둠이 전달된다. 이러한 가운데 귀에는 무언가가 들려온다. 그것 역시 추상적이기는 매한가지지만, 결코 전망이 좋지 않은 '굉음'과 '사이렌'이 섞여 있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그 괴기스럽고 흉측한 어둠 시퀀스가 지나고 조피아가 나치에게 심문을 받는 장면이 이어진다. 조피아가 창백하리만큼 새하얗게 드러나는 숏을 기준으로 전과 후는 확연한 어둠에 덮여 있기에, 도입에선 ‘빛과 어둠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극단적 편집’이 특징이다. 분명 어둠으로부터 무언가가 드러났다. 그러나 드러난 존재는 자신의 '있음'을 영속하지 못한다. 유대인인 조피아에게 나치는 "자신들이 규정한 집으로 보내주겠다"라고 실실 쪼개가며 심문한다. 즉 어둠이 존재를 무로 전락시키는 흉흉한 소음을 불러온다면, 빛은 존재를 드러내지만 동시에 위험에 빠트린다. 그것이 유대인의 눈과 귀에 닥쳐온 1940년대의 유럽이다.

조피아의 숏이 끝난 이후 다시 영화에선 어둠이 이어진다. 어둠은 존재를 무로 전락시키긴 하지만, 직후 숏의 라즐로가 눈에 띄지 않은 채로 어디론가 급박하고도 긴밀하게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나름 장점도 있다. 존재는 자신의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서, 또 삶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리저리 이동해야 하기에 어둠의 추상성과 은밀함이 도움이 될 수도 있다. 특히 나치의 고발하고 감시하는 빛은 조피아를 의자에 주저앉혔기에, 라즐로의 어둠과 더더욱 대비를 이룬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라즐로의 다급한 발걸음과 몸부림, 이윽고 도달한 목적지는 모두 '롱테이크'에 담긴다. 이전 숏들이 지금 여기를 중단하고 다른 시간과 공간을 이어낸 것과 달리, 라즐로는 어둠 속에 갇혀있던 지금 여기서 광명을 찾는다. 그 빛은 바로 미국의 것이다. 그렇다, 유럽과 달리 미국에선 유대인이 빛을 만끽해도 결코 학살당하지 않고, 오히려 쭉 유지된다.

하지만 이는 착각이었다. 곧바로 컷이 발생하고 다음 숏이 이어내는데, 다시 어둠이다. 그런데 앞선 어둠 숏과 달리 라즐로는 스스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가 없다. 라즐로가 어둠 속에서 뒤척이자 카메라 역시 바쁘게 달리 인 하던 것과 달리, 이민국을 촬영하는 카메라는 패닝하기에 수동적이다. 이들은 당국의 권고, 사실상 강제로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처박힌다. 즉 아메리칸 드림은 환상이었고, 유대인은 그 어디에도 설자리가 없다. 여전히 강제된 이동과 아주 기본적인 '배급'마저 제한되는 열악한 삶이 두 대륙을 거쳐 이어진다. 이후 라즐로는 미국에 먼저 정착한 친척 아틸라를 만나 그나마 양지를 누빌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빛은 내지인, 그것도 뷰런이 고든을 '니그로'라고 호칭한 것을 보건데 백인, 더 정확히는 뷰런이라는 성이 암시하는 '먼저 정착한 게르만계 백인'의 전유물이라 하겠다. 그래서 먼저 정착하지 못한 이들은 정착민들의 심사가 조금만 뒤틀려도 다시 어둠으로 추방된다. 자유의 여신상은 뒤집혔다.


그를 어둠으로 추방시키는 두 가지 조건 중 하나가 주권성으로 유럽에서나 미국에서나 라즐로의 여정을 진절머리 나게 쫓아다닌다. 주권성의 특징은 “내가 제일 잘났다”는 점이다. 그 내가 만약 게르만계 백인이라면 인종적 특권을 얻길 원한다. 이에 다른 인종과 타 민족 이민자를 짓밟는다. 더 나아가 주권성은 민족주의와 달리 최고 권력을 내가 가져야 한다. 이에 같은 민족이어도 아틸라는 라즐로를 짓밟는다. 그 주권적인 자신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결코 일관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시대와 상황에 따라 어떤 가치를 높게 평가할지 기준이 바뀌기 마련이기에 주권적인 그들은 마치 카멜레온처럼 말을 바꿔댄다. 벤은 라즐로와의 첫 만남에서 가족주의와 가부장제의 명예를 중시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다가 라즐로에게 호의적으로 접촉할 땐 문화의 수호자임을 자처한다. 이후 자신이 손해를 입자 옹졸하게 지갑을 닫는 자본가로 변절한다.

그런데 이렇게 말이 계속 바뀐다면 사람들은 결코 그를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그 자신이 최고 권력을 지닐 수 있도록 가만 놔두지 않을 테다. 그래서 주권적인 이들의 또 다른 특징은 '타자화'다. 자기 내면의 결함들을 모두 타인에게 전가하는 것이다. 뷰런이 두 번째로 라즐로와 만났을 때, 아들 녀석이 돈을 미지급해서 죄송하다고 머리를 숙인다. 과연 파파보이 해리가 제 판단이나 감정만으로 임금을 미지불했을까, 아버지의 불호령이 과연 없었을까? 이후 라즐로에게 건축 프로젝트를 맡기고 돈 걱정은 하지 말라고 한다. 하지만 이내 곧 뷰런 부자는 추가금, 사실상 원래 예산 중 일부를 라즐로에게 맡기려고 등을 떠민다. 대망의 로마 골목길 시퀀스에서 뷰런은 유대인은 핍박당할 만 했고, 라즐로가 잠재력을 못 펼친 이유도 그 자신이 원인이라 타박하며, 그를 강간하기에 이른다. 뷰런은 제 내면에 있는 유대인 혐오를, 자신에 의해서 미래가 꺾인 라즐로의 재능에 대한 죄책감을, 스스로가 아니라 라즐로가 원흉이라는 식으로 타자화한다. 심지어 유대인에게 인면수심 자본가라는 편견이 덧씌워져 있지만, 정작 그 악랄함을 영화 내내 보여주는 건 유대인이 아니라 뷰런이다. 이는 뷰런만의 문제는 아니다. 미국에 정착해서 그 문화를 빠르게 흡수한 아틸라 역시 제 선택에 따른 책임을 모조리 라즐로에게 전가한다. 라즐로한테 오드리와 춤을 추라고 강요한 것도 자신, 뷰런의 제안을 물어온 것도 자신, 심지어 라즐로가 뷰런 일가에게 바가지를 씌웠다며 좋아한 것도 자신이지만, 이에 따른 불리한 것들은 죄다 라즐로의 탓이다.

유럽에서도 미국에서도 주권성의 피해자로 전락한 유대인들은 이따금 존재한다. 백인은 필요에 따라 유대인을 환한 얼굴로 환대한다. 하지만 필요가 다하면 금세 처분한다. 이로써 어디에서나 그 모든 백인들의 죄악이 떠넘겨진 유대인들은 영화 내내 심각한 통증을 겪고 정착하지 못하며, 끝끝내 예루살렘 이주를 결정한다. 예루살렘 이주와 이스라엘 건국으로 인한 문제가 작금에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을 넘어 전쟁으로 확장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코베는 다소 위험한 정치적 접근을 하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는 막무가내식 이스라엘 옹호라기 보단, 유대인이 이스라엘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인 이유를 유럽과 미국이 제공하였다는 것, 그래서 당시 유대인이 이스라엘을 건국할 수밖에 없었던 맥락은 옹호하고, 또한 오늘날 분쟁의 모든 원인을 유대인과 무슬림의 탓으로 떠넘기는 서구의 타자화를 저지하는 시도에 가깝다.


이 주권성에 유대인 못지않게 여성 역시 희생된다. 여성 유대인들은 남성 유대인보다 더 큰 수모에 처하고, 뷰런 일가에서도 해리와 매기의 취급은 영 딴판이다. 조피아와 에르제벳은 미국에서 통용되는 이름인 소피아와 엘리자벳, 더해서 영어 억양 때문에 무시를 당한다. 이방인이라는 사실에 더해 그녀들이 여성이기에 가부장적인 이성애자 남성의 징그럽고 저열한 추파에 계속 시달린다. 이때 조피아는 침묵한다. 상대방의 제안을 충분히 거절할 수 있는 주체성을 표현한다. 오히려 불쾌한 추파를 계속 던져댄 해리가 개인의 권리를 넘어선 월권을 무례하게 행사한 셈이다. 그런데도 남성의 아쉬움과 잘못은 모두 '성적 제안을 수락하지 않은 여성'에게 전가된다. 매기는 남성 가족들의 주권을 실현할 시종이나 들러리 수준으로 격하된다. 벤이 동업자로 여기는 해리에게는 센터 설립 계획을 미리 귀띔해준 반면, 매기는 자신의 야심을 응원하고 축하해줄 들러리로 만들기 위해 미리 공유하지 않았다. 해리 역시 쌍둥이, 곧 자신과 동등한 그녀를 아랫사람으로 계속 취급한다. 그래서 유대인 여성은 유대인 남성의 이동 제한보다 더 혹독한, '휠체어'를 탄 모습으로 등장하며 미국으로의 엑소더스도 늦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가부장제의 주권성이 약자 여성을 유린하는 태도가 약한 민족, 곧 유대인으로 확장되어 약한 타민족 동성을 강간하기에 이른다. 에필로그, 노년의 라즐로는 에르제벳처럼 휠체어를 탄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그게 단순히 노화의 여파일까? 에르제벳이 뷰런 저택에서 폭로한 내용을 생각하면 가부장적 주권성의 야만은 라즐로에게 치유되지 못한 상처를 남겼을 가능성이 크다. 오드리가 자신에게 라즐로와 춤을 추라고 강요한 남편에겐 찍소리도 못하고, 그녀보다 지위가 낮은 라즐로의 추파라 누명을 씌우는 것도 가부장적 주권성의 여파라 하겠다. 결국 주권성의 확장에 나를 기준으로 그 어떤 타인, 특히 약자는 제 일말의 주체성도 지키지 못하게 된다.


여기에 더해 존재가 어둠에 파묻히는 또 다른 조건이 ‘물질’이다. 영화가 다루는 인간의 몸과 건물이라는 두 가지 물질 중에서 건축, 곧 환경과 관련된 물질은 본디 우리를 늘 붙잡는 불가항력이다. 라즐로가 뷰런의 서재를 수리하는 장면에서 인부들이 잠시 해찰을 하니 곧장 돔 지붕이 추락하고야 만다. 무거운 물질인 돔 지붕은 조금도 저항하지 못한다, ‘중력’에 말이다. 늘 대지에 복속되는 운명은 인간의 육체도 다르지 않다. 또한 물질들은 결코 다루기가 쉽지 않다. 인간이 지금껏 여러 방면으로 투쟁해왔지만 어떻게든 이겨내기보다는, 단단함과 육중함에 그저 순응하기가 더 쉽다. 그 투쟁의 과정이 ‘핸드헬드’로 펼쳐진다. 기차 탈선 사고랄지 높디높은 대리석 채석장을 등반할 때, 물질이 충돌하는 거대한 힘과 흔들림, 물질과의 투쟁 속에서 후들거리는 팔과 다리 등을 가시화하는 것이다. 그만큼 그 모든 물질적 한계를 뚫고 차량에 올라타 도로를 주행하는 모습은 스테디캠을 이용한 온유한 촬영과 영웅적인 로우 앵글로 포착한다.

또 다른 물질은 바로 인간이다. 인간의 물질은 대개 선천적으로 많은 부분 결정된다. 바로 그 선천성, 개종되지 않은 인종적 유대인의 특질로 인해서 차별 당한다. 주체적으로 만들어가는 인생이 아니라 이미 결정된 인생을 물질이 구성한다. 물론 인간은 한 사람이 언제나 그런 모습이었다는 감각, 곧 자신이 누구였고 어떤 사람인지를 자각하고 묘사하는 ‘자아’를 갈고 닦는다. 자아는 어떤 행동이나 정체성으로 형성되기에 관념, 곧 이러저러하고 싶은 이상의 영역이다. 그런데 이상은 더 나아가고 싶은 마음이기에 결국 내가 기본적인 욕구에 어느 정도의 불만이 없어야 한다. 욕구 불만일시 자아보다는 가장 기본적인 생존에 천착하게 된다. 그리고 1940년대 전장이 된 유럽, 약자에게 박한 미국은 이들이 자아를 형성하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가장 기본적인 욕구들을 모조리 제한하여 자아가 아닌 그저 육체의 갈급에 허덕이도록 방치한다. 또한 자본주의라는 이념은 물질이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부족하고 조급한 것처럼 선동하거나, 주권성과 결합하여 자신의 최고 권력은 물질만 제공할 수 있다고 호도한다. 돈이 없는데도 사비로 추가금을 충당하겠다고 말하는 쪽이 라즐로고, 자본이 풍부함에도 추가금과 보상금 지불에 절절매는 쪽이 뷰런이다. 즉 안 그래도 인간은 물질에 천착하기 쉬운 몸을 지니고 물리적 환경에 메여있는데, 이로써 관념을 실천하기가 안 그래도 어려운데, 이념마저도 더더욱 물질주의를 방조하는 것이다.

이로써 인간은 물질에 '갇힌다.' 코베는 이를 연출로 가시화한다. 본 작품에선 당대 실제 펜실베이니아를 촬영한 숏들을 아카이빙 푸티지한다. 또 라즐로가 욕정을 해소하기 위해 감상하는 고전 포르노도 인서트한다. 이 모든 숏들은 1.33:1 화면비에 담긴다. 이는 푸티지가 탄생한 당대의 시대성을 지칭하기도 하지만, 라즐로의 풍랑을 고려하면 좁디좁아 선택지 없은 도시와 몸에 갇힌 폐쇄성을 드러내는 결정이라고도 하겠다. 라즐로가 아틸라의 가구점에 처음 방문했을 때의 롱테이크 역시 쓰임새는 유사하다. 아틸라의 제안과 가구점의 명운을 결정하는 당대 미국적인 욕망과 유행, 그것을 라즐로는 ‘자를 수 없는 것’이다. 폐쇄적인 롱테이크에 갇혀버렸다.


그렇기에 코베는 연출로써 저항한다. 롱테이크에 갇혔을 아틸라가 밀러라는 이름으로 개명하듯, 이주민에겐 개명과 개종이 어쩔 수 없다. 그렇게 유대인이자 헝가리인의 특질을 모두 없앤 아틸라와 반면 여전히 헝가리 출신의 유대인인 라즐로가 대화하는 장면에서의 '리버스 숏', 이상하게도 라즐로의 시선에서 밀러는 멀고, 밀러의 시선에서 라즐로는 지나치게 가까워보인다. 그래서 밀러를 둘러싼 공간은 더 많이 포착되는 반면, 라즐로는 틈이 별로 없다. 둘이 똑같은 거리를 공유하는데도 말이다. 이는 미국이라는 공간에 잠식당한 밀러, 반면 아직까진 자아를 지키는 라즐로의 차이에서 비롯되듯 보인다. 이후 숏에서 푸르른 이상과 동경의 하늘에 배치된 라즐로의 얼굴은 가구가 될 물질과 치열한 사투를 벌인다. 끝끝내 자기 취향의 가구를 만들고야 만다. 이후 해리와 대화할 때, 그는 리버스 숏에서 처음으로 멀어졌다. 오히려 더 가까운 쪽이 해리였는데, 어느 편이 이기느냐가 중요한 게 아닌, 단지 전쟁이라는 상황이 중요했던 군수업자인 뷰런 일가에게 전쟁의 피해자인 라즐로가 협조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또다시 가까워진다. 그는 뷰런이 원하는 디자인도, 원하는 금액에도 순순히 따를 의향이 없기 때문이다.

라즐로가 지향하는 것은 자아든 브루탈리즘이든 결국 관념이다. 자신이 비록 지긋지긋한 물질 그 자체인 주어진 몸에 휩쓸리며 살아가고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관념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일련의 추상적인 연출로 드러난다. 물질로서의 시각과 일치하지 않는, 내면적인 목소리라 할 수 있는 에르제벳의 독백이다. 그를 둘러싼 물질적 저변이 유대인을 핍박하더라도 손에 잡히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는 관념을 목표로 삼아 라즐로는 꾸역꾸역 잡초처럼 버텨낸다. 그가 미국에서 매춘부와 관계를 맺을 때 육체적 관계보다 대화를 중시한 것도 마찬가지다. 그는 펼쳐진 물질에 만족하지 않는다. 물질 너머의 것이 궁금하고, 또 대상을 물질로써 착취하고 싶지도 않다. 그 저항적 몸부림은 에르제벳을 찾았다는 소식을 전해주는 친척을 향해 몸부림을 치면서 되묻는 라즐로의 행위에도 가시화된다. 지금 여기를 부정하며 에르제벳이 있는 곳으로 단번에 향하고 싶은, 육체를 뚫고 나오고 싶은 영혼의 억센 꿈틀거림인 것이다.

하지만 그 저항적 시도가 대체로 부질없다. 저항은 단편적이고 결국에는 또다시 주권성과 물질주의의 야욕에 붙잡힌다. 그래서 라즐로는 마찬가지의 핍박을 당하는 고든과 아편을 흡입한다. 이 때의 편집에 주목할법한데 리버스 숏에서의 컷과 연결이 타당하다면, 아편을 투약한 화장실과 술집에서는 불필요한 컷이 발생한다. 시공간상 그냥 원테이크로 촬영해도 크게 비효율적이지 않은 유사한 숏 사이사이에 굳이 컷을 꼭 넣는다. 왜냐하면 라즐로는 아편을 투약하여 물질은 지금 여기더라도 의식에 한해선 '다른 숏'으로 이행하였기 때문이다. 아편을 투약한 상태로 가게 된 뷰런 자택에서의 편집도 마찬가지다. 내가 속한 일반적 현실이 아니라, 더 정밀하고도 예민한 현실과 감각을 편집은 계속 잇는다. 즉 관념이 아무리 저항해도 물질의 힘을 이겨낼 수 없자, 결국 아편으로써 물질의 힘을 약화하고 관념의 힘을 강화하기로 선택하였다. 이로써 설령 환각일지라도 현실을 중단하여 자신이 원하는 세계를 잠시 이을 수 있게 됐지만, 그 결과는 라즐로의 현실 도피와 에르제벳의 위독함, 곧 현실에서의 영원한 안녕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물질주의와 주권성을 대체할 다른 패러다임을 생각해야 한다. 코베는 라즐로의 신념에서 인간과 물질의 관계를 재정립한다. 물질로 이뤄진 공간에서 인간은 "그냥 존재"해야 한다. 그렇다면 인간이 어떻게든 물질을 꺾어야만 한다. 물질을 꺾고 그냥 존재하는 인간은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상에 도달하고자 라즐로는 ‘콘크리트’를 선호한다. 콘크리트는 저렴하고 다루기가 쉬워 비싼 자원과 달리 절절매지 않아도 된다. 그렇다고 해서 라즐로가 비싼 자원을 일체 사용하지 않는 건 아니다. 인간이 그냥 존재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그것이 아무리 비싸다고 한들 사용해야만 직성이 풀린다. 이탈리아까지 가서 최고급 대리석을 구하는 것처럼 말이다. 코베는 라즐로의 정신을 영화로 실현한다. 35mm 필름과 70mm 필름을 사용한 본 작품에서 노이즈와 그레인은 아주 이따금 존재한다. 필름의 감출 수 없는 물질성을 최대한 통제하여 피사체의 영원에 방해가 되지 않는 '영화적 장소'를 마련한다. 그렇게 건축이, 그 안에 담긴 존재가 기능과 목적을 다할 때 영화는 진정 아름답다. 라즐로가 영화에서 오직 단 한번 뿐인 방해받지 않은 결과물, 뷰런의 서재를 포착한 고요한 롱숏이 말이다.

또 우리는 주권성을 주체성으로 전환해야 한다. 영화의 제목은 브루탈리즘 건축가인 라즐로를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brutal이라는 단어의 뜻을 생각하면 주권성을 따르는 난폭한 사람들도 뜻할 수 있다. 이 브루탈리스트들에게 시달리는 타인들은 서서히 그들과 유사해진다. 에르제벳은 점점 더 집착적으로 변해가고, 라즐로는 타협 불가한 공사장의 폭군으로 즉위한다. 싸우고 꽉 붙들어 잡아야지만 제게 소중한 무언가를 사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주권성을 주체성으로 바꿔야 모두가 평화롭다. 다리를 다친 에르제벳이 혹여나 더 다칠까봐 애정 표현을 삼가하고, 추가금액을 사비로 충당하겠다고 내지르긴 했지만 이를 아내와 상의하는 라즐로처럼 상대의 주체성을 물어서 둘의 주체성이 공존할 수 있어야 한다. 에르제벳 역시 차안에서 라즐로와 과격하게 다투지만, 남편이 미국에서의 핍박과 설움을 고백하자 그 상흔들을 어루만진다. 뷰런의 저택에서 그녀는 그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은 채로 꿋꿋하게 제 힘으로 서있음과 더불어, 그 의지를 라즐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사용한다. 그녀의 폭로가 불쾌한 해리가 그녀를 거칠게 잡아끌어 내던지자 다정한 매기는 그녀를 걱정하며 부축한다. 에르제벳이 라즐로 및 조피아와 주고받는 편지에 스며있는 관념도 똑같다. 상호주체성의 실현을 위한 조건인 다정함, 주권성의 시대 및 대륙에서 실종되어버렸던 바로 그 사려 깊은 정신을 실현할 때 영화는 다시금 아름답다. 라즐로가 자신의 배식과 생활비까지 내어주는 고든에게 안전띠를 조심스럽게 매어줄 때, 영화가 아주 그윽한 멜로드라마 문법을 패러디하듯 말이다.

그 우아함과 포근함으로, 또한 주권성으로 폭정을 저지른 강간범을 마땅한 어둠으로 추방하며 코베는 미국을 다시 세우고자 한다. 주권성의 화신이 미국의 수장이 된 작금에 말이다. 이에 코베는 마지막으로 주권성에 짓밟혀 허구의 죗값을 치루고, 심지어 존재 자체가 허구로 전락한 이들이 다시 존재할 수 있도록 만든다. 라즐로는 에필로그에서 제 1회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의 헌정자가 된다. 이때 코베는 픽션인 본 작품을 다큐멘터리로 오인하게 만드는 당대의 보도 영상 문법을 택한다. 이로써 에필로그를 흡사 당대의 르포 푸티지처럼, 곧 실재로 둔갑하는데, 라즐로라는 인물이 대표할 수 있는 당대 주권성과 물질주의의 피해자들은 지금껏 허구로 여겨져 지워져왔지만, 코베의 연출에 의해 실재로서 존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더 나은 관념과 짓밟힌 주체성이 보존됨으로써 코베의 전작 <복스 럭스>에 이어 또 다시 1인 2역을 맡은 래피 캐시디는 이전보다 더 낫게 존재한다. 그녀의 첫 등장이 유럽에서 붙잡혀 심문을 당한 조피아였다면, 그녀가 연기하는 또 다른 역할인 조피아의 딸은 지금 베니스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영광을 누리며 극적인 대비를 이룬다. 패러다임의 전환은 나를 더 낫게 만들거나, 내가 복권됨으로써 너도 복권된 것이다. 라즐로라는 인물과 1인 다역의 보편성이 확장될 수 있는 여지를 생각할 때, 2막 후반부과 에필로그에서 주권성을 죽이고 주체성을 선택한 코베의 결정은 결국 감상자를 위한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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