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극에서는 서로서로 친구.
'이 망망대해에 좌우앞뒤를 둘러봐도 아무것도 없는데?'
"조만간 아라온호가 칠레 프레이기지 인근에 도착해요. 칠레에 요청해서 빌려보죠."
아라온호가 얼마나 달렸을까? 점점 남극 대륙에 가까워 오자 엄청난 추위가 몰려온다.
배의 거의 모든 것들이 여기가 남극이라고 말하는 것 처럼 꽁꽁 얼어 붙었다.
"프레이 기지에서 드럼을 빌려 준다고 하네요."
"하지만 프레이기지에 바지선이 없어서 헬기에 드럼을 싣고 와야 하는데 오늘은 날씨가 좋지 않아서 헬기를 띄울 수 없어요. 내일 오전에는 예보가 좋으니 내일 헬기타고 가져오죠."
하루가 지나고 아침부터 헬기를 탈 준비를 서두른다.
겨울로 넘어가는 남극 대륙의 날씨는 정말 예측 불가다. 때문에 서두르지 않으면 드럼을 가져올 수 없을 수도 있고, 심지어 프레이기지에 몇일 신세를 져야 할 수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라센 빙붕을 가야하는 우리의 계획이 망가질 수도 있다.
긴장이 된다. 남극대륙에서 헬기는 정말 위험하다.
육지가 근처에 있어야지만 이륙을 하고, 해가 없으면 비행이 불가하며, 날씨가 조금이라도 좋지 않으면 날지 않는다.
오늘은 다행이 날 수 있는 날씨다. 만약의 사태인 조난에 대비해 옷은 최대한 껴 입고 헬기에 오른다.
파일럿이 시동을 걸자 매캐한 기름냄새가 나고, 얼마뒤 몸이 날아오른다.
유빙에 올라서 헬리캠을 띄웠을 때 화면으로 봤던 풍광도 멋졌지만 실제 헬기를 타고 직접 눈으로 남극대륙을 바라보니 화면으로 보는 것의 딱 100배 멋지다.
멋짐도 잠시, 5분도 안되어서 헬기가 프레이기지 헬기 착륙장에 내린다.
'준비는 오전내내 걸렸는데 이렇게 짧다니..'
아쉬움을 뒤로 하고 헬기에서 내리자 푹푹 들어가는 눈 아래 딱딱한 돌덩이들이 발에 밟힌다.
촬영기자를 하면서 남극대륙을 밟아 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
"우리회사에서 취재하면서 남극대륙을 밟은건 우리가 처음일걸? 세종기지 갔다온 사람은 많은데 세종기지는 섬에 있는 거라 남극대륙을 직접 밟은 사람은 우리뿐 일거야."
나만 아는 나만의 기록이 하나 더 생겼다.
칠레 프레이기지는 칠레의 남극 공군기지이다. 프레이기지 대장도 칠레의 군인!
“남극은 주변 기지들끼리 서로 친구입니다. 어려울때 돕는게 친구죠.”
군인다운 쿨함으로 대장은 우리가 필요한 깨끗한 드럼을 '그냥 주기로’ 했다.
고마운 마음에 대장에게 뉴질랜드에서 공수해 온 화이트와인을 전달했다.
“지구를 반바퀴 돌아온 와인입니다. 드럼 줘서 감사해요.”
“와인 감사합니다. 우리나라 칠레도 와인 유명한거 아시죠?”
‘아..맞다.. 와인하면 칠레인데, 칠레사람에게 와인을 주는건 남도 사람에게 서울에서 남도 한정식을 대접하는 그런 느낌인가?’
드럼을 싣고 오는 헬기에서 파일럿에게 부탁을 한다.
“프레이기지 주변 한바퀴만 돌아주세요.”
오밀조밀 모여있는 세계각국의 남극기지들.
칠레 옆에 러시아와 중국, 그리고 바다건너 세종기지와 아르헨티나 기지까지.
남극대륙의 풍광 안에 사람이 사는 컨테이너 박스와 같은 알록달록한 건물들이 이질적이다.
이런 척박한 곳에서도 사람이 ‘일부러’ 산다니..
드럼을 가지고 오고 몇일 뒤
자는데 얼음을 깨고 전진하는 아라온호의 소리가 비명같이 고막을 때린다.
눈을 감고 깨어있는 와중에 객실에 전화가 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