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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과 May 09. 2019

200점 로스터로 말할 것 같으면

커피 볶는 남자 200점

200점 로스터로 말할 것 같으면 올해 반백살이고요, 얼굴은 땅콩형에, 키 172cm, 체중이 60kg에 훨씬 못 미치는 마른 체형입니다. 그래도 애주가여서 남들이 다 가지고 있는 인격이 조금 나왔어요. 성격은 소심한 편이에요. 신혼 때 회사 동료들이 '새댁'이라고 별명을 부를 정도니 소심한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상상이 가지요. 낯가림이 심해서 친하지 않으면 말도 제대로 못 하고 그저 상대의 이야기를 듣기만 하는 사람이었지요. 나이가 들은 얼마 전까지도요.


그랬던 이 남자가 요즘 달라지기 시작했어요. 어느 누구와도 자연스럽게 대화하기를 좋아하고, 어떤 것이든 적극적으로 일을 벌이고, 가끔 부인한테 명령도 해요. 부인이 아이들에게 해야 할 얘기들을 자신이 하겠다며 말을 못 하게 하고요, 고집도 예전보다 세졌지요. 심지어 1년에 책 읽기 0권이었던 사람이 새벽에 일어나서 책을 읽지요. 커피 관련 서적을 틈틈이 읽는 것이지요. 이 모든 것이 커피를 알고부터 커피와 함께 생활하면서 달라진 것이랍니다. 드라마에 빠지는 걸 보면 갱년기(남자니까 갱놈기?) 탓도 있는 듯해요.


로스팅을 배울 때 일이에요. 치맥을 한잔 하고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 울부짖듯이 "아, 커피 볶으고 싶다." 하더라고요. 그 울부짖음이 어찌나 애절한지 숙명적으로 일을 벌일 걸 예감했지요. 그리고 서로 말은 안 했지만 상가를 살펴보고 임대료를 타진해보고 유동인구들 살펴보고 창업 수순을 밟고 있었어요.  그 울부짖음 두 달만에 가계 계약을 했어요. 그것도 소심하고 낯가림 심한 200점이 혼자서 건물주와 계약서를 썼어요. 물론 카페를 오픈하기 위해서 근 2년여를 자리를 보러 다녔고, 찜한 자리를 1년여 살펴봤어요. 뜸은 충분히 들인 상태였지요. 그전에는 이사를 하는 경우에 부인이 집을 알아보고 부동산에서 계약서를 쓰는 등 모든 것을 부인이 일처리를 다 했지요. 부인은 혼자서 척척 상가를 계약한 것을 보고 정말 깜짝 놀랐어요.


며칠 전 카페 리모델링한 것도 그래요. 일을 추진하는 것이 완전 상남자예요. 예전의 그는 꼼꼼하게 체크하고 준비해서 하는 편인데요. 그래서 시간도 오래 걸려, 계획하다 엎은 경우도 꽤 있지요.  예전의 200점이라면 절대 이 공사는 시작도 못 했을 거예요. 하지만 일을 하기로 단 하루 만에 결정해서 부인을 매우 당황케 했지요.



커피 볶는 남자의 행복

하룻밤을 꼬박 새워 공사를 했는데도 쌩쌩해요. 오히려 신나보이기까지 해요. 아마 즐거운 거 같아요. 에피쿠로스는 행복의 3가지 필수 요소를 친구(우정), 독립된 상태, 자신의 고민거리를 생각해볼 시간을 갖는 것이라고 했어요. 200점 로스터는 커피를 통해서 외로움을 달래는 친구를 찾았고, 자신만의 프로파일을 만들어 주도적으로 로스팅을 하고, 카페를 더 잘 운영하기 위해서 늘 고민하는 시간을 갖죠. 200점 로스터는 가장으로서 어깨가 무겁고, 하는 일이 힘들지라도 분명 행복한 사람일 거예요. 그렇게 보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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