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연풍이 좋다.
은은하게 솔솔 불어오는, 풀의 냄새를 그득히 안은 자연풍을 마주할 때면 제자리에 멈춰서 그 바람을 만끽한다. 자연풍이 주는 심리적 안정감은 내가 살아 있구나, 눈을 깜빡이며 들숨과 날숨을 내뱉으며 두 다리로 서서 나를 자각하고 있구나라는 것을 느낀다. 모든 것은 서로 연관이 되어 도움을 주고 서로 상생하고 있다. 나무가 주는 산소로 나는 호흡하고 내가 내뱉는 그다지 쓸모없는 이산화탄소는 나무가 흡수하여 다시금 내가 숨 쉴 수 있는 상황을 연출해 준다. 이런 메커니즘은 내일 하루 한 발짝 더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이 되어주며 하루라는 시간을 내게 선물해 준다.
왜 자연풍이 좋아졌을까. 나는 어렸을 적 엄마 밑에서 외탁으로 자라왔다. 우리가 살던 80-90년대에는 지금처럼 여성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던 시기였다. 매우 홀대받고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로 그저 혈육만을 온전히 돌보며 허드렛일을 하는 그런 사람으로 취급받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인간이기에, 언제나 변화의 바람을 만들어내고 자신의 존재를 만들어내는 것이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을 엄마를 통해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다. 어릴 적에 난 너무나도 수고스러운 자연재해에 맞서 버둥거리는 앙상한 나무 밑에 움츠린 한 작은 소년이었다. 그 나무는 폭풍우에 매우 고단했으며 매해 자라나는 나뭇잎도 금세 떨어져 버리곤 했다. 하지만 뿌리만은 더 깊게, 아주 단단하게 박혀서 소년에게 아주 모자라지만 작은 안식처가 되어주었다. 나무는 소년이 자라나기 위해서는 안식처도 중요하지만 이 소년의 미래를 위해 학교라는 교육기관을 보내야 했다. 하지만 움직일 수 없고 앙상한 나무였기에 여기저기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었고 소년은 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잦은 전학을 다니게 되었다.
2학년이었다. 서울로 잠깐 보내졌다가, 다시 제천으로 내려와서 아주 시골에 있는 국민학교(지금은 초등학교)에 전학을 갔다. 세련되고 새침한 서울 아이들의 모습만 보다 어딘가 매만져주고 싶은 천진난만한 곳에 도착하니 너무나도 극명하게 다른 환경에 무서웠다. 띵동댕동~ 딩동댕동~ 쉬는 시간이 되었다. ”너는 어디서 왔어?“ ”와 너 이쁘게 생겼다“ ”너 집은 어디야?“ ” 오늘 나랑 같이 집에 갈래?“ 처음 겪어보는 질문 세례에 그 자리에서 얼음이 되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쉬는 시간이 되자 반에 있던 모든 아이들이 우르르 달려와서 반짝거리는 눈으로, 또 일부는 코를 흘리며 질문을 던졌다. 그 당시 학교는 교실 한가운데 나무로 불을 때는 난로를 피우고 있었고 뜨거운 물을 받아서 쉬는 시간이 되면 그 물을 후후 불며 마시고 뜨거운 난로 옆에 옹기종기 모여 깔깔대곤 했었다. 공교롭게도 내 자리는 난로 옆이었기도 했다. 그렇게 하교를 하면서 몇몇 반 친구들과 신나는 걸음으로 즐겁게 하교를 했다. 아이들의 천진난만함이란, 불과 몇 시간 만에 마음의 담장을 허무는 아주 놀라운 기술이다.
그런 일들을 7번 정도 다니다 보니 스스로를 속여가며 가면을 쓰는 일이 잦아졌다. 어린 나이임에도 좋은 척, 힘들지 않은 척, 애쓰는 척. 뿌리 깊은 앙상한 나무가 뽑혀 없어질까 봐 전전긍긍, 애를 많이 썼다. 아무튼 그때의 약 3년이 넘는 계절 동안 나는 시골에서 자연을 배웠고, 자연과 함께 살았으며 자연을 호흡하는 법을 배웠다. 넉살 좋게 불어오는 자연풍에 몸을 맡길 때면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았다. 내게 자연이란 그런 존재다. 나의 가면을 벗고 순수하게 나로서 만끽할 수 있는 존재. 처음으로 천진난만한 녀석들과 함께 배운, 앙상한 뿌리깊은 나무에게서 배운 마음속에 단단한 신념.
지금도 넉살 좋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을 땐 한없이 천진난만한 미소로 맞이한다. 너와 내가 한대 섞이어 지구라는 존재가 되고,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상태. 그래서 나는 자연풍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