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려라 외톨이 디렉터스 컷
군 입대가 다가올수록 나의 알코올 섭취량은 점점 증가했다. 삶에 목적과 방향성을 잃어버린 터라 술에 기대는 것이 유일하게 지겨운 하루를 잃어버리는 가장 좋은 수단이었기에. 그래도 입대 전까지 생계를 이어나가야 했기에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고 아주 예전에 유행하던 공주 풍 카페였다. 여닫이 문이 있고 그 안에는 비밀스러운 분위기에 독립된 공간이 있는 커플들의 성지였다. 술도 팔고 안주도 있었기에 지금 생각해 보면 이런 웃기는 공간이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비밀스러운 독립된 룸을 가지고 있고 술도 팔고 안주도 파는 "공주" 풍 카페식 술집이라니. 아무튼 , 오후에 출근해서 일이 끝나면 새벽 2시가 좀 넘었다.
일이 끝나고 채워지지 않는 마음속 갈증을 풀러 자주 가던 감자탕 집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뼈 해장국 한 그릇과 소주 2병 그리고 신문을 보며,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폼을 잡았던 기억이 난다. 왜 폼이었냐면, 신문을 정독이라도 했으면 기억이 날 테지만, 글씨를 봤다기보다 그림을 보며 폼을 잡았던 기억이 나기 때문에. 마지막 소주 한잔을 목구멍에 털어 넣고는, 흔들리는 가로등을 지표 삼아 터벅터벅 걸었다. 하염없이 걷다가 아침해가 밝게 비춰 오면 그제야 의미 없이 반복한 부끄러운 마음을 들킬까 봐 서둘러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부모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게 청춘이 감당하기엔 좀 버거웠을지도 모르겠다.
돈이 필요했다. 나에게 주어진 지금의 아픔을 이겨내는 방법보다 현실의 상황이 더 급했다. 돈이 어디서 그렇게 새어나가는지도 모르는 채 마구 썼기 때문에, 돈이 필요했다. 착실하게 일하며 버는 돈 보다 단 시간에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다. 그래서 아르바이트 사이트를 하루 종일 뒤졌다. 이곳저곳. 그러던 중 나온 '강남 술집 아르바이트' 일급이 10만 원이 넘는 돈이었다. 그 당시 시급이 4,200원 정도니 엄청 큰돈이었다. 재빨리 지원을 하고 연락이 오길 기다렸다. 그렇게 약속 장소로 나갔고 선릉에서 어떤 봉고차에 타서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그 안에는 소위 말하는 '날라리' 들이 많았다. 처음 온 내게 이름을 묻길래 본명을 이야기했다. 아무것도 몰랐기에.
그리곤 습기 가득한 지하의 술집으로 들어가서 어떤 방으로 들어간다. 6명 정도가 줄을 서고 각자의 이름을 이야기한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이름에서 번쩍번쩍 빛이 나는 이름들이었다. 누가 봐도 본명이 아닌 이름들이라 나도 순간 번뜩이는 재치로 지어냈다. 현민이로 하기로 했다."안녕하세요 현민입니다" 그렇게 이름을 이야기하고 앞에 있는 여성분들께서 6명 중 선택을 한다. 그리고 자리에 앉게 되는 시스템이었다. 말로만 듣던 호스트인 셈.
처음 겪어보는 상황에 두근대는 심장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올까 봐 부끄럽고 두려웠다. 난 선택되지 않았고 다시 봉고차를 타러 올라갔다. 아마 쫄았던 모습이 들켰으리라. 다음 장소로 이동을 하는 내내 이게 맞는 행동인가, 잘하고 있는 건가? 스스로에게 되묻고 되물었다. 두 번째 장소에서도 선택되지 않았다. 그러고는 밖에 나오면서 거기 계신 담당자님께 이야기했다. "저는 못 할 것 같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그 표정들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그들의 마음속 이야기가 적나라하게 들렸기 때문이리라. "저 찌질한 새끼"
그렇게 찌질이가 되고 궁핍한 생활을 이어가도 할 수 없는 건 할 수 없다. 가난한 찌질이가 되기로 했다. 그 일로 돈을 번다는 것이 생각보다 겁이 났고 무서웠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스스로를 팔고 싶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판다는 뜻은 아니다. 나 자신에게만 국한된 이야기이다. 적은 돈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나를 파는 행위를 하고 싶지 않았다.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그러고는 어느새 청춘의 한 페이지의 상처가 다 아물기도 전에 군입대라는 새로운 시련이 다가왔다. 그렇게 입대를 준비했다.
거울을 보니 웬 민둥산이 하나 보인다. 오돌토돌 튀어나오지 않은 걸로 보아 잘 자른 삭발머리 었다. 처음 입대영장을 받았을 땐 시간이 가는 둥 마는 둥 했지만 막상 입대일이 다가오니 무섭고, 긴장되었다. 군 생활은 처음으로 부모의 곁을 떠나 생판 모르는 남들과 강제로 2년을 살아야 하는 것. 나라를 지키는 자랑스러운 생활이지만 개개인으로 따졌을 땐 그런 마음가짐으로 가는 청년들은 많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D-1 입대 하루 전 왠지 모를 설렘과 두려움 가득 한 마음을 담고 잠에 들었다. 입대 당일 큰 이모와 또 평소 친하게 지낸 친구 어머니, 그리고 입대일을 맞춰 휴가를 나와 준 몇몇 친구들과 논산으로 향했다. 훈련소 앞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이제 정말 헤어져야 할 시간이 왔다. 그곳의 분위기와 어쩔 수 없는 상황들은 점점 더 내 모습을 짠하게 만들었다. 떠나보내는 이모와 친구 어머니께서 눈물을 흘리신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이제 나는 진짜 혼자다'
부모님들을 향해 입대 인원들이 전부 절을 한다. 여기저기 헤어짐과 걱정이 섞인 울음소리들이 들렸다. 입대 인원들은 줄을 맞춰 외지인들이 안 보이는 훈련소 건물 뒤로 들어간다. 내심 친절했던 조교들의 모습에 '뭐, 군대 별거 아니네. 이 정도면 해낼 수 있겠어.'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들었다. "털털, 타박타박" 이리저리 헤매는 모습들을 보고 있자니 오합지졸이 따로 없었다. 물론 나도 그 안에 포함되었지만.
"좌우로 정렬", "좌우로 정렬!!!!", "야이 새끼들아 정신 안 차려?" 좀 전에 든 생각이 아주 편협된 생각이라는 것을 직감하게 된 순간이다. 지금은 군기를 잡기 위해 하는 일종의 세리머니라고 생각이 들지만 그 당시엔 정말 무서웠다.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엎드렸다 섰다, 사람의 혼을 쏙 빼놓기에 무서울 수밖에. 빡빡이가 된 내가 이상한 초록색, 검은색, 밤색으로 도배된 군복을 입고 있는 것도 서러운 데 말이다.
그날 밤에 생전 처음 겪어 보는 점호라는 것을 했다. 그리고 잠이 들었다. 이래저래 시달려서 많이 피곤하던 참이었고, 어느새 꿀 같은 잠이 들었다. 너무나도 행복했다. 평소 잘 꾸지도 않던 아름다운 꿈들이 퍼레이드로 펼쳐졌다. 놀이공원이었는데, 있지도 않은 여자친구와 아주 즐겁게 놀고 있었다. 그렇게 좋아하는 후룸라이드도 타고, 롤러코스터도 타면서 찍은 웃긴 사진들을 보며 한참을 웃고 있는데, 갑자기 어떤 사람이 어깨를 세게 치고 지나갔다. 그러고 다시 와서는 어깨를 잡고 흔드는 거다. 나는 속으로 "이런 미친놈을 봤나?" 하면서 한 소리하려고 자세를 잡는데 그 사람이 계속 어깨를 흔들며 "저기요!!", "저기요!!"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눈을 떴는데 어떤 사람이 실제로 나를 잡고 흔들고 있었다. 잠결에 놀라서 어벙벙하게 얘기했다."에,, 예,, 예?" 그 사람에게 듣기를 불침번이란다. 아까 점호시간에 공지되었고, 종이로 벽에도 붙어 있었는데 나는 귀담아듣지 않았던 거다. 그렇게 난생처음 새벽에 일어나서 동료들의 상태를 확인하고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는지 상태를 지켜보는 '불침번'을 서며 밤을 꼴딱 새웠다.
군대에서든 사회에서든 직감적으로 내게 불리하거나 안 좋은 상황이 올 것 같으면, 무차별적으로 화를 내고 자리의 분위기를 망치는 이른바 '파티 브레이커' 그게 나였다. 부모님이 안 계신다는 것은 내게 큰 콤플렉스였고 덧붙여 가난함도 언제나 나의 발끈 스위치였다. 나는 그런 모습들이 싫어서 불리한 상황이 오면 일을 벌였다. 저지른 후 후회하긴 했지만, 내 모습을 고치려고 생각하는 이른바 '반성'을 하지 않았다.
나의 20대 청춘의 시절은 궁지에 몰린 쥐처럼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을 치며 꿈이라고는 망상에 불과한 것처럼 삶을 이어나갔다. 그 순간이 있어 발전할 계기가 되었던 걸지도 모르겠지만, 상당히 후회스러운 나날이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야만 하는지 누군가에게 묻고 싶었고, 또 따지고 싶었다. 그렇게 나의 20대는 상처의 연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