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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영 Aug 19. 2018

괜찮아요. 제가 있잖아요.

우리 천천히 오래도록 같이 걸어요


-괜찮아요. 제가 있잖아요.

우리 천천히 오래도록 같이 걸어요






로마를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는 단연 콜로세움때문이랄까.




로마를 갈 것인가.


여행 시작부터 망설였지만 끝내 콜로세움과 바티칸을 포기할 수 없었기에 바르셀로나에서 야간비행으로 로마에 도착했다. 가기 전부터 지레 겁을 먹었던 이유는 내게 로마의 이미지가 썩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잠깐 한눈팔았다가 여행 경비를 모조리 낚아채는 소매치기의 소굴 테르미니 역, 집시들의 핫플레이스 콜로세움, 이탈리아의 여름은 그야말로 지옥이라는 소문과 해가 저물기 전 숙소로 돌아가야 할 것 같은 엄습된 분위기가 내가 생각했던 로마이다.


'빨리 이곳을 떠나버려야지'


'여행'이라는 자유로운 의미를 잠시 잊어버린 척 어쩌면 '버티다'에 가까울지 모른다는 속내를 웅크린 채.

도착과 동시에 무사히 버티다 얼른 떠나버리고 싶은 생각이 머리를 가득 메웠다.

숙소를 예약할 때마다 경비를 고려해야 하는 장기 여행자라서 130일 여행 중 한인민박에 머문 적은 손에 꼽을 정도였지만 그중 한 곳이 로마였다. 공항까지 사장님께서 픽업하러 나와주셨고 숙소 가는 내내 위험한 상황에 대해서 말씀해주셨다. 트램을 타서 꼭 가방을 앞으로 하고 해가 지기 전에 돌아오는 게 좋다고.

그렇게 숙소에 도착해 짐을 풀고 3일간의 일정을 살피다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불안감을 가진 채 미리 예약해둔 남부 투어를 가기 위해 픽업 장소로 나갔다. 패키지, 투어사, 가이드. 자유여행과 어울리지 않는 이 세 가지 제약이 지독히도 싫어서 투어는 절대적으로 피하는 편인데, 3일의 일정에 남부까지 가기 위한 욕심이 먼저였다. 친구들과 여행 온 여자 무리들, 연인에서 부부 된 지 이틀째인 신혼부부, 나처럼 혼자 여행 중인 한국인들 사이를 비집고 아무도 없는 창가에 자리 잡았다.


 

-여기 옆자리에 앉아도 될까요?

-네네.

-혼자 오셨어요?

-네. 혼자 여행 중이신가 봐요.

-저도 혼자 왔어요. 오늘 같이 다닐까요?

-좋아요!



이런저런 여행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가이드분께서 오늘 일정에 대해 설명해주셨다.



"저.. 제가 소리를 못 들어요. 입모양을 보고 눈치껏 알아들어요.

가이드 설명이 너무 빨라서 도중에 놓쳐버렸네요. 방금 뭐라고 했었죠?"



그녀와 짧은 대화를 나눌 때까지만 해도 미처 알지 못했다.

이윽고 살짝 미소를 지어 보인 후 덤덤히 대화를 이어나갔다.



"어릴 적 후천적으로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되었어요. 그래도 한 달 동안 잘 다니고 있네요!"



지금껏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부딪히면서 아픔을 설명해왔을까.

그녀의 덤덤한 말에 더욱이 가슴이 조여 오고 이내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여행을 하다 보면 길 위에서 각자의 사연을 가지고 떠나온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지만 가끔씩 나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는 인연을 만날 때가 종종 있다.

그럴 때마다 깊은숨을 들이키고 끌어 오르는 감정을 찬찬히 살펴본다.

내가 그동안 걸어왔던 숱한 길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알 도리가 없다.

거리에 울려 퍼진 잔잔한 기타 연주도, 지금 창밖과 어울리는 인디음악도, 잠들기 전 침대 위에서 듣는 새벽 빗소리도, 그리고 지금 말하고 있는 자신의 목소리마저 그녀는 듣지 못했다.


나는 자주 기차에서 습관처럼 이어폰을 꽂고 흘러나오는 음악으로 허전한 분위기를 달랬다. 그러다 지겨워질 때쯤 눈을 감고 뒷자리 연인들의 속삭임을 엿듣곤 했다. 계획 없이 길을 걷다 골목 사이 버스킹 연주가 들리는 방향으로 몸을 돌리기도 하고 LP판 음악 숍에서 마음에 드는 노래를 골라 이것저것 듣다 하루를 날리기도 했다. 여행을 더 채워주는 부수적인 요인이 어쩌면 작은 사치일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그녀는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나는 한없이 작아진다.





copyright -  all rights reserved △ insta@jj_zero



사색에 빠져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틈을 타 덜컥 답이라도 내어줄 듯 눈앞에는 푸른빛 해변이 펼쳐졌다.

아말피 해안도로를 따라 끝없이 이어진 절벽 위에 옹기종기 이뤄진 지중해 마을들.

이를테면, 초록색과 파란색 그 사이 청록색 물감을 풀었다고 표현해야 할까. 그것도 아니라면 반투명한 푸른 옥구슬을 굴린다고 말해야 좋을까.

더 마음에 드는 표현을 생각하는 데에 애를 쓰다 보니 어느새 어제의 걱정은 잊어버리고 말았다.




copyright -  all rights reserved △ insta@jj_zero



투어를 할 때 가이드의 설명은 단순히 귓가에 맴도는 배경 소리일 뿐 크게 집중하지 않는 편이지만, 오늘 하루는 그녀가 놓친 부분을 알려주기 위해 조금이라도 귀를 기울이기 위해 애를 썼다. 설명이 따가워질 때쯤 버스에서 잠시 내려 소렌토 전망대를 바라보았다. 사진을 찍고 다시 조금 더 이동하자 포지타노라는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도시보다 마을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렸던 그곳. 온통 레몬사탕, 레몬맥주, 레몬 비누, 방향제 등 이름처럼 어울리는 상큼한 레몬향으로 물들어 있었다.



copyright -  all rights reserved △ insta@jj_ze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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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예뻐요 정말. 언니 저기 봐봐요! 절벽에도 사람들이 사나 봐요"

"날씨가 너무 좋아서 시간만 더 있었다면 해변에 뛰어들었을 텐데..!"


그렇게 우리는 한참을 그란데 해변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조용한 세상에 어쩌면 무례한 불청객 일지 모르지만 잠깐 들어가 숨죽여 바라보는 시간이 좋았다. 바닷가 바로 앞 두오모도 아기자기한 상점이 즐비한 물리니 광장도 우리의 시간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copyright -  all rights reserved △ insta@jj_zero



예술가들이 사랑한 도시라 불릴 만큼 거리 작품들의 색채에 시선을 빼앗겼다. 아슬아슬한 절벽에 자리 잡고 있는 파스텔톤 집들을 한 폭에 그대로 담고 있었다. 우리는 포지타노에 간다면 꼭 먹어야 한다는 페로니 레몬맥주를 먹기 위해 설렘을 안고 상점으로 향했다.   



copyright -  all rights reserved △ insta@jj_ze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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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좋다"


왜일까, 오늘은 맥주의 농도보다 레몬향에 더 취하고 싶었다.

해 질 녘 드리우는 노을에 못 이기는 척 마셨던 술보다 오늘은 따가운 햇빛이 미울 법도 한데 코끝을 스치는 레몬맥주에게 기꺼이 내 시간을 주고 싶다. 뜨거운 그날의 온기를 식혀주는 것도 모자라 한 모금 마신 후 짧은 웃음으로 우리는 행복을 나누었다. 그것으로 서로에게 설명하기 복잡한 무언의 위로가 되었으리라 나는 믿는다.

그동안 사람이 좋아서 다치는 날도 허다하고 사람을 믿어서 내면의 한 조각을 잃은 날도 있었다.

허나 오늘만큼은 사람이어서 감사할 뿐이다. 결국 여행도 사람인 것을.








2017.05.25 일기장


언제부터였을까. 골목이 참 좋다.

이 좁은 길만 지나면 당신을 볼 수 있는 설렘도 좋고

거기서 바라보는 마을은 더없이 아름다웠으므로.

햇볕 위에 그늘이 드리우는 것보다 골목 사이 햇살이 스며드는 시간이 좋았다.

아마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서일까.

햇빛을 피하기 위해 서있던 사람들 사이 나는 온전히 내게 스며들기를 기다렸다.

골목에서의 여느 날처럼 그렇게 따스히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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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에 오길 참 잘한 것 같아요. 언니를 만났으니 이미 그걸로 충분한걸요"

찬찬히 내 입모양을 살피다 다시 시선은 내 눈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여린 목소리로 하나씩 대답해주었다.

"내가 더 고마운 하루였어. 한국에서도 꼭 만나자 우리"



copyright -  all rights reserved △ insta@jj_ze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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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에서 포지타노로 가는 길 버스 안에서 들었던 노래 김동률의 출발.

나는 노래를 듣고 그녀는 가사를 보았다. 한국에서 볼 날을 약속하며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다.

여행 내내 그동안 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곱씹으며 위태로운 길 위에서 삶의 무상함을 탓했다.

그릇이 채 만들어지기도 전에 세상이 던진 질문을 담느라 바빴던 지난날을 애석해하면서 생각의 꼬리는 늘 비극으로 끝이 났다. 나는 꽤 마음의 그늘이 가득 찬 사람이었고 그것들로 인해 늘 조급해하고 불안했다.

훗날 여행이 끝나고 지나간 나라를 떠올렸을 때 숱한 감정이 사람으로부터 왔다면 열병이라도 난 듯 오래도록 그곳을 앓았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여름만큼이나 뜨거웠던 7월의 한국에서 1년 만에 다시 그녀를 만났다. 비로소 여행은 스스로를 비워내고 또 지워내는 것이라고 내게 가르쳐주었다. 그래도 아직 여행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허나 이탈리아 남부 포지타노, 그곳은 내게 참 고마운 곳임은 잊지 않을 것이다.


비록 그날의 대화는 조금 느렸지만 그렇게 오래도록 천천히 같이 걸어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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