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공무원이라니
여느 평범한 대학생활을 거쳐 아무 이상 없이 졸업을 마친 후 어떻게 그 당시 그렇게 어렵다는 공무원이 갑자기 되었나.
일생을 자리에 앉아 공부만 하고 사회생활이라고는 기껏 해봐야 대학교 주변 공강시간에 맞춰한 알바가 다인 나는 생각보다
나약한 온실 속의 화초와 같았다.
졸업을 앞두고 나는 학점을 채워야 하며, 수업을 잘 들어야 하고, 완벽한 이력서를 만들고 싶다느니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무시무시한 취업전선을 뛰어들지 못했다.
사실 이 당시 리먼브라더스 사태(2007년)로 기억하고 알고 있을지 모르겠으나 그 여파로 전 세계가 불안정한 시기였으며 굴지의 기업들에서 다량의 해고자들이 쏟아졌으며 취업대란이 일었던 시기였다.
이때부터였던 거 같기도 하다 평생직장이라는 말이 사라지기 시작한 게...
나는 취업전선의 주변만 맴돌며 이도저도 하지 못하고 있었고 이를 본 부모님은 서울에서 고생하는 딸을 더 이상 볼 수가 없었는지 그동안 고생했다며 당분간 아무 생각 없이 같이 지내는 것이 어떻겠냐 제안했고 나는 속으로 쾌제를 부르며 신나게 엄마아빠에게 달려갔다.
그렇게 한 학기를 남겨두고 휴학을 했다.
사실 10대 때부터 힘든 내색 하나 없이 생활했지만 사실은 너무 지쳐있었다. 그렇지만 내색할 수도 말을 꺼낼 수도 없었다. 우리 부모님은 나를 위해 그들의 인생을 희생하며 밤낮없이 열심히 일을 하셨고, 그 결과 삼시세끼 좋은 음식들과 브랜드 옷들을 사서 깔끔하게 입혀주셨다.
나는 편하게 앉아서 공부만 했으면 됐다. 그런 내가 그 어떤 내색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여느 평범한 가정의 딸처럼 말 잘 듣고 손이 가지 않는 마음 깊은 착한 딸이 되고 싶었다.
부모님 집 방구석에서 나는 사업자가 되어 한 달에 천만원 이상 수익을 내고 엄마아빠를 호강시켜 주는 착한 딸을 상상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현실은 아무것도 모르는 허우대 멀쩡한 백수 딸이었다.
실제로 사업자 등록도 하는 등 나름 진지하게 사업 준비를 했으나 확신이 없던 나는 하루하루 시장조사만 하다 세월을 무의미하게 보내고 있었고 그런 나를 우연히 발견한 친척이 “요즘엔 공무원이 최고다. 네가 머리는 좋으니 한번 해봐.”라고 했고 그 말 한마디로 나의 전공과 외국생활이 바탕이 되는 직군을 골라 8개월 공부했으며 거짓말 같이 붙었다.
평범한 삶을 사는 것을 목표로 정한 뒤 어떤 직업이 좋을까 고민하던 그 당시에는 공무원만큼 적합한 직업이 또 없을 것 같았다. 되기만 한다면 월급이 밀릴 일도, 내가 정말 큰 잘못을 하지 않는 이상 정년까지 누가 날 짜르지도 않을 것이며 업무도 기존의 업무를 복붙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사실 나는 외국회사를 다닌 부모님 영향으로 이곳저곳 이사를 많이 다녔으며 부모님 또한 번갈아가시며 한국에 들어오는 환경에서 내가 대한민국의 공무원이 된다면 한국에서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적 느낌으로 공무원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당시 경쟁률이 기본 100:1이었지만 그 경쟁률이 크게 마음에 걸리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다른 대기업들도 경쟁률은 비슷했고 나는 이미 초등학생때부터 무한 경쟁과 각자도생의 사회에 익숙해져 지금까지 하던 대로 묵묵히 공부를 했고
그렇게 나는 2015년, 공무원이 되었다.
.
.
.
내가 공무원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