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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홍 Nov 04. 2024

1화  프롤로그 (1)


               

나는 오늘 죽는다.      


차가운 바닥에 쓰러진 채 옆으로 흐르는 붉은 액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내 몸이지만 내 것이 아닌 듯 손을 움직이려 해봐도, 머리를 들어보려 해도 소용이 없다.

처음 보는 남자가 나보다 더 놀란 듯 눈과 입을 크게 벌린 채 뛰어온다. 나를 친 차량 운전자일까. 눈에 익은 남자도 보이는데 누구더라, 울고 있는 것 같은데...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점점 아득해진다. 피곤하다. 이렇게 죽긴 너무 억울하단 생각도 든다.


내가 잘못한 것이 대체 뭘까. 아버지의 말대로 내가 운 나쁜 인간이라 그런 걸까.      

좋게 말하면 투자, 나쁘게 말하면 투기를 좋아하던 아버지는 어린 내게 계속 복권 번호를 찍어보라고 했는데 십 원 한 장 당첨된 적이 없었다고 했다. 내가 태어난 이후 부유하던 집안의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고 엄마에게 하소연하는 것을 들은 적도 있었다.

아버지의 무능함이 내 탓이란 말인가.  

죽기 전에 지나간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더니 과거가 스쳐간다.  


영화사 다니던 시절이 갑자기 떠오른다. 그때는 몰랐는데 꽤 괜찮은 시절이었다.

홍보일로 시작해 하고 싶었던 기획일을 할 때까지 일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결국 결혼을 선택했다. 홍감독과 같이 만들었던 영화가 실패한 후 안정적인 ‘취집’을 택한 것인데.

앞날이 불투명한 영화 일은 네 아버지가 하는 투기나 마찬가지라고 잔소리하던 엄마의 잔소리가 먹힌 건지도 모른다.      

시어머니는 내가 남편 운 갉아먹는 사주라며 결혼을 반대했지만 남편이 고집을 피웠다.      

“인공지능 시대에 사주는 무슨! 미신 같은 소리 하지 마세요.”


신혼 때는 그나마 행복했었던 것 같다. 남편과 서로 사랑한다고 믿었으니까.

결혼 후 남편의 영화 투자회사는 점점 하락세를 걷다가 빚만 잔뜩 지게 되었고, 시어머니는 그 모든 것이 아들의 무능함 때문이 아니라 내 탓인 양 날 미워했다.      

“이래서 집안에 아무나 들이면 안 된다는 거야!”      

시어머니는 돈 잘 버는 남편의 남동생과 동서에게 나 들으란 듯 큰소리로 하소연하곤 하셨다.


남편이 집안 돈을 빌려다 쓰는 바람에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었던 나는 경기도에서 크게 만두 전문집을 하는 시어머니를 자주 도우러 가야 했다. 가난한 친정의 힘을 빌릴 수도 없었기에.  

종가집 맏며느리였던 시어머니의 혀와 손은 요리에 단련되어 빠르고 정확했지만 서투르기만 한 나는 계속 혼날 수 밖에 없었고, 그러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결혼을 선택한 것도, 남편을 선택한 것도 운 나쁜 나의 선택이었기에 그 선택에 책임을 지고 싶었던 것 같다.    

  

‘견디다 보면 좋은 날이 올 거야, 언젠가 인정받게 될 거야...’       


남편은 이런 나의 고충을 알면서도 일이 안 풀려서 그런지 이기적으로 변해갔고, 모른 척 했다. 아니 원래 그런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자손이 중한 종가집에 손자 손녀라도 턱턱 안겨주면 좋았겠지만 삼신 할머니는 운 나쁜 나에게 아기를 점지해 줄 생각이 없는 듯 했다. 이쯤 되니 시어머니의 입장이 이해되기까지 했다. 나 같은 며느리를 만나서 속이 많이 타시겠구나.     

그러다 어렵게 사십 살 넘어 임신에 성공했을 때, 비로소 쓸모 있는 사람이 된 기분이 들었다! 눈물만 그냥 줄줄 흘러내렸던 기억만 난다.

하지만 만삭이 될 때까지 밭을 맸다는 시어머니는 설 명절날에도 나에게 종가집 제사 준비와 식당에서 쓸 만두를 빚게 했다. 그런 날에도 바쁜 남편은 옆에 없었다.


아, 그날은 절대 잊을 수 없지. 바로 남편과 이혼하기로 결심했던 날이었다.

시어머니의 정갈하고 고풍스러운 식당 TV에서 명절용 영화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픈 팔을 주무르며 만두 빚다가 보니 내가 영화사 다녔을 때 참여해서 만든 영화였다.      

‘젠장, 한때는 재능있는 작가, 감독과 일을 했는데, 지금은 식당 구석에서 만두 만들다 죽게 생겼구나... 남편이란 인간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속으로 욕하는 것조차 아기에게 나쁜 영향이 갈까 봐 ‘좋게 좋게 생각해자’ 하고 마음을 다스렸다.


그때 식당 안으로 지저분한 모습의 폐지 줍는 할머니가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할머니는 일주일에 한 번씩 나타나시는데, 고향의 사투리를 써서 그런지 외할머니를 떠오르게 했다.   

깔끔 떠는 시어머니 눈에 띄면 좋은 소리 들을 일 없기에 얼른 다가가 “할머니, 만두 몇 개 챙겨드릴 테니 이쪽으로 오세요!” 라고 말했다.

가끔 가게에서 나오는 폐지를 모아 놨다가 할머니가 보이면 전달해 드렸지만 고맙다는 인사 한번 하지 않는 무뚝뚝한 스타일이었다. 그런데 그날 할머니가 내 손목을 탁 잡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      

“어머, 왜요, 할머니?”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 측은함과 안쓰러움이 가득 담겨 있어 적잖이 당황했다.      

“내 인제 못 온다.”

“네?”

“선물이다!”             

할머니가 건네준 물건은 낡고 작은 비단 주머니였다.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야 된다. 알긋나?”

“네에? 아, 네...”     

낡은 주머니를 금붙이처럼 소중하게 건네주셨지만 당황한 나는 빨리 보내 드려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화’는 ‘복’하고 오고, ‘복’은 ‘화’랑 오는 법이다. 잊지 마래이?”     

결연해 보이기까지 하는 할머니의 눈빛에 압도된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할머니가 가신 후 주머니를 열어보니 그 안에 꼬깃꼬깃하게 접힌 부적 한 장이 들어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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