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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홍 Nov 05. 2024

1화 프롤로그 (2)

“아 진짜 무속의 왕국이야 뭐야...”    

 

투덜대면서도 할머니의 강렬한 눈빛이 잊히질 않아 비단 주머니를 버리려다 망설이는데     


“둘째는 언제 온대니? 아직 연락 없었어?”      


시어머니의 목소리에 놀라 비단 주머니를 얼른 옷 속에 집어넣었다. 아직 연락 없었다고 하자 “쯧쯧, 마누라 복이 없으니 명절날 일 핑계 대는 거겠지.” 하고 내 속을 긁으셨다.

남편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식당 밖으로 핸드폰을 들고 나가자 폐지 싸고 있는 할머니가 보였다. 도와드릴 겸 다가가자     


“니 남편이나 감시 잘 해라. 동네 카펜지 뭔지에서 여자랑 만나고 있더라.”     


그 말을 듣자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 들었다. 임신한 와이프가 시댁에서 생고생 중인데 자기는 여자랑 시시덕거리고 있다고? 내가 누구 때문에...! 참고 참았던 인내의 끈이 뚝 하고 끊어지는 기분이었다.     

어디서 봤는지 물어본 후 밀가루가 묻은 옷을 그대로 입은 채 슬리퍼를 신고 정신없이 뛰었다. 할머니가 내 남편을 어떻게 알지? 궁금한 생각도 잠시, 튀어나온 돌부리에 발이 세게 찍혀버렸고, 넘어지는 순간 바로 아래 개천으로 데굴데굴 굴러가 버리고 말았다.      


눈을 떠보니 병원이었다. 고개를 푹 숙인 남편의 심각한 정수리가 보였다. 울었는지 눈덩이가 부은 남편을 다그쳐 아이가 무사한지부터 물었다. 사실 마음의 각오를 했다. 나는 운이 나쁜 인간이니까.

아이가 떠나버린 걸 알게 된 나는 침대에 누운 채 끓어오르는 용암 같은 마음으로 눈처럼 하얀 천장을 바라봤다.      


“이혼하자.”     


무표정한 얼굴로 정확하게 말했다. 남편의 하얗게 굳은 얼굴이 떠오른다. 그 얼굴을 보며 통쾌했던 기억이 나고, 남편이 당황해 뭐라고 했는데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남편은 이혼에 동의하지 않았다. 돈 있는 집안에서 자란 ‘엄친아’였고, 십 년 넘게 같이 살았으니 위자료를 꽤 뜯어낼 수 있었지만 그 집안과 일분일초도 엮이고 싶지 않았다. 참고 참았던 인내심의 우물이 말라버렸기에 빨리 이혼하는 조건으로 맨몸이나 마찬가지인 상태로 나와 버렸다.


돌아가신 엄마가 알았다면 그런 나를 바보라고 욕했겠지. 엄마는 영화 투자일을 하는 남편과의 결혼을 원래 반대했었다. 투자하다 돈을 날려버린 아버지 때문에 사모님에서 하루아침에 보험설계사가 되어 가장 역할을 했던 엄마였다. 스트레스가 많이 쌓여서 그런지 일찍 돌아가신 엄마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 아프다.      

기억이 더욱 희미해진다. 추워서 얼어붙을 것 같은 감각조차 점점 사라진다. 그런데 내가 왜 길에서 사고를 당했지? 맞다, 아르바이트하던 카페에 홍감독이 나타났었지!


노예 해방의 날을 맞아 자유로움을 누리는 기쁨도 잠시, 이혼 후 생계 문제로 또다시 고민에 빠졌다. 십 년 동안 결혼생활을 유지했지만 내게 남은 게 아무것도 없었다. 돈도, 젊음도, 심지어 아이도 없었다. 시어머니의 비법을 전수 받아 만두집이라도 열면 좋겠지만 마음에 안 드는 며느리에게 비법을 전수해 줄 분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먼저 ‘경단녀’가 된 현실을 자각해야 했고, 은행 대출을 받아 작은 카페라도 차릴 요량으로 작은 카페에서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사십이 넘은 나를 알바생으로 받아줄 카페를 찾아 경기도 외곽까지 가야 했는데.     

거기에 홍감독과 오PD가 나타났던 것이다! 영화사에 다닐 때 홍감독과 친한 나를 눈엣가시처럼 거슬려 했던 오PD였다. 두 사람이 최근에 만든 영화가 천만 관객을 동원했다는 뉴스는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기에 내 모습이 더욱 초라하게만 느껴졌다.

     

“진... 미래씨? 오랜만이네요!”  

   

놀란 홍감독이 주문받으려고 서 있는 나에게 다가왔다. 오PD의 눈도 놀라 커지더니 얼굴에 기분 나쁜 미소를 띠었는데.   

   

“어머, 이런 촌구석에서 다시 만날 줄 몰랐네?”

     

무표정한 척 그들을 바라봤지만 심장이 빠르게 뛰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그 누구보다 내가 먼저 홍감독의 재능을 알아봤었는데, 이런 결과를 맞이하게 될 줄이야.

한숨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여기서 카페하는 줄 몰랐네요. 왜 그렇게 연락이 안 되요? 결혼하면 그냥 끝인가?”     


홍감독은 원망과 반가움이 섞인 표정이었다. 할 말이 아주 많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그런 표정. 뭔가가 들끓는 눈으로 날 똑바로 바라보자 당황해 눈을 돌려버렸다.

그때 마뜩잖은 표정으로 지켜보던 카페 사장이 다가와     


“기다리는 손님들 안 보여요? 빨리 주문부터 받아요!”     


라고 한소리 했다. 피식하고 비웃는 오PD의 표정이 아주 거슬렸는데, 홍감독도 당황한 듯 보였다. 어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달아나고 싶었다.

괜찮은 척 주문을 받으려는 순간 카페 안으로 뛰어 들어오는 남자를 보고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는데, 바로 전남편이었다!     


“이혼하고 하는 일이 기껏 이런 거야?”      


저 인간은 대체 전생에 나와 무슨 악연으로 엮인 걸까. 나는 두 눈을 감은 채 이를 악 다물었다.      


“저런... 이혼했어요?”      


불꽃축제라도 온 듯 신난 오PD의 면상을 후려갈기고 싶었다. 당황해 어쩔 줄 모르는 홍감독을 발견한 전남편은 치켜 올라간 눈꼬리를 갑자기 기죽은 강아지 꼬리처럼 내려버렸다.      


“엇, 홍... 감독님 아니십니까?”      


그 와중에 명함을 꺼내 홍감독에게 잘 보이려는 전남편을 있는 힘껏 밀어버린 후 카페 문을 열고 뛰어나가 버렸다.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쪽 팔린다’는 것이 이런 말이구나. 참담하고 비참했다. 저런 남자와 결혼해 살아온 나 자신이 너무 한심스러웠다.      

비가 내리는 줄도 모른 채 뛰다가 눈앞이 보이지 않아 눈물인지 비인지를 닦아냈다. 후회라는 단어가 내 온몸을 가득 채웠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홍감독의 손을 놓지 말았어야 했다. 한번은 다시 만나보고 싶었던 사람을 가장 최악의 타이밍에 최악의 모습으로 만나버렸다. 상념에 잠겨 있던 그 순간 도로 한가운데 서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지만 이미 늦어 버린 것이다!  

  

  

나는 점점 어두워지는 의식을 끝까지 붙잡고 매달렸다.

움직이지 않는 내 손 옆에 뭔가 보이는데, 폐지 할머니가 줬던 비단 주머니인가...?

이렇게 끝나긴 너무 억울해!잘 보이지 않는 눈을 찡그리며 시력을 모아보지만 확실치가 않았다. 손을 뻗어보려고 남은 힘을 있는 힘껏 쥐어짰다.

그 순간 필름이 끊어지는 것처럼 모든 것이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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