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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홍 Nov 08. 2024

2화 눈 떠보니 영화사 신입(2)

대기업 자본이 싹 쓸어버린 지금의 영화계와는 달리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제작자의 힘이 강해서 뚝심 있는 제작자가 밀어붙이는 작품은 작품성과 흥행성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기적이 자주 일어나곤 했다. 한마디로 한국 영화의 전성기였는데.


영화사 벽에는 청순한 외모에 연기까지 잘하는 안주연의 멜러 영화와 청춘스타로 급부상한 정지우의 영화 포스터 액자가 걸려 있었다.

 나는 정지우를 보는 순간,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외모가 너무 뛰어난 바람에 연기력을 인정받지 못했던 그는 새로운 도전을 할수록 흥행에 참패했다. 어쩔 수 없이 스테레오타입의 연기만 하게 되었고, 인기가 갑자기 떨어진 후 약물 중독 문제 등으로 자살해 버린... 한때 내 최애 배우. 정지우의 영화 포스터를 쓰다듬으며 울컥해지는 순간,        

   

“미래씨, 시나리오 얘기 좀 더 할 수 있어요?”      


홍감독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뒤돌아보았다. 갸름한 얼굴에 안경이 잘 어울리는, 새삼 엘리트 느낌이 드는 스타일이었다.       


“진미래! 따라와!”      


현팀장이 눈에서 레이저를 쏘며 끼어들었다. 완벽주의였던 현팀장은 어리버리한 신입이었던 날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던 시절이었는데.

아쉬워하는 홍감독을 뒤로 한 채 회사 옥상으로 불려간 나는 현팀장의 잔소리 세례를 한바탕 들어야 했다.

막내 주제에 회의 시간에 졸고 앉았다, 일 많다고 시위하는 거냐, 왜 혼자 시나리오 좋다고 해서 분란을 만드냐 등등... 현팀장은 용가리가 불을 뿜듯 담배 연기를 뿜어 댔지만 난 딴 생각에 빠져 기분이 좋았다.


현팀장을 다시 만났구나... 과거로 돌아오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거지? 과거의 나로 환생한 건가? 평행 우주 어쩌고 그런 건가?

잘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다시 잘 살아볼 기회가 생겼다는 사실이었다. 히죽 웃는 날 본 현팀장은 더욱 기분이 나빠져 소리쳤다.      


“웃어? 내가 웃겨?”     


담배 연기가 내 얼굴로 마구 뿜어졌지만 하나도 속상하지 않았다. 현팀장의 잔소리는 시어머니의 잔소리보다 달콤했고, 되살아난 희망으로 들렸다.      


‘나 사실 억세게 운 좋은 여자였나?’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모르겠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참여한 영화마다 다 흥행이 되게 해서 돈과 명예를 마구 끌어당기는, 억세게 운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망이 끓어올랐다.     


‘이번엔 제대로 된 선택을 하자. 연애, 결혼 다 필요 없고, 내 능력을 세상에 널리 떨치자. 우울한 삶은 이제 끝이라고!’     


잔소리 폭격에도 끄덕하지 않고 온화한 표정을 짓는 날 본 현팀장은 지친 얼굴이 되었다.      


‘이 녀석 만만해 보여서 뽑았는데, 보통 내공이 아닌 거 아냐?’     


“팀장님, 배고파요.”     


내 말에 현팀장이 질려버린 듯 할 말을 잃어버렸는데.     


*     


충무로에 있는 회사 근처 식당으로 달려가 김치찌개부터 주문한 후 정신없이 퍼먹었다. 해외 여행보다 더 길고 긴 시간 여행을 하고 온 사람처럼 허기가 느껴졌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처럼 식욕이 미친 듯이 돌았다. 기름진 고기와 매운 김치가 쉴 새 없이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공기밥을 하나 더 추가하는 순간, 엄마 생각이 났다. 두툼한 삼겹살을 넣은 엄마의 김치찌개는 진짜 끝내줬었는데.      

주머니를 여기저기 뒤져보니 폴더폰 형태의 핸드폰이 나왔다. 폴더폰을 다시 보니 한 손에 쏙 들어오는 것이 귀여웠다. 뚜껑을 닫을 때 괜히 턱으로 쳐서 닫곤 했었지.

연락처를 뒤져 부산집이라고 된 전화번호로 전화를 거는데 가슴이 두근 두근거렸다. 엄마는 70살을 넘기지 못한 채 지금으로부터 15년 후에 돌아가시게 된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세상에 하나뿐인 의지처를 잃고 더욱 외롭고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이때만 해도 한창 건강하고 힘이 넘쳤던 엄마가 진짜 살아계실까? 내 전화를 받을 수 있을까?   

 

“여보세요.”

“어, 엄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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