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우의 매니지먼트 사무실. 지대표와 담당 매니저가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정지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우야, 너 갑자기 왜 그래?”
대표가 당황한 것처럼 물었다.
“<자객> 주인공 캐릭터가 어떤 것 같냐는데... 왜요?”
“형, 대표님 말은 그런 질문을 왜 이제 하냐는 말이지.”
“내 말이. 그런 질문은 선택하기 전에 하는 거 아니냐.”
잠시 생각에 잠긴 정지우가
“그럼 그 캐릭터에 내가 어울려?”
“당연하지! 너 평소에 남자 냄새나는 액션 영화 찍고 싶다며? <자객>이 딱이지.”
“대표님, 남자 냄새나는 액션 영화는 ‘느와르’ 장르 아닌가? 남자의 복수든 성공이든 그 사연에 공감 가서 다 부숴버려도 되는. <자객>은 잘빠진 검술 무협이 될 거잖아요.”
이해가 안 가는 듯 멍한 얼굴로 정지우를 바라보는 담당 매니저의 통통한 볼살이 흔들렸다.
“두 개가 뭐가 다른 건데?”
답답한 듯 매니저를 바라보며 혀를 차는 정지우.
“내가 시나리오는 볼 줄 몰라도 감 하나는 좋거든. 다르지, 아주 달라.”
“그니까 네가 원하는 영화가 <자객> 아니냐고. 꽃미남 청춘스타만큼 멋있는 검객에 잘 어울릴 수가 있어? 그 좋은 이미지 사라지기 전에 잘 뽑아먹어야지. 게다가 변수성 감독 액션 비쥬얼 하나는 끝내주잖아.”
정지우가 뭔가 거슬린 표정으로 대표를 쳐다본다.
“내가 원하는 게 아니라 대표님이 원하는 거 아녜요?”
“뭐? 야아... 너 많이 달라졌다? 언제는 무조건 내 말만 듣겠다더니!”
분위기가 이상해지자 대표와 정지우를 번갈아 쳐다보며 어쩔 줄 모르는 담당 매니저.
“<자객> 잘 나오면 중국은 물론, 아시아 시장까지 싹 쓸어버릴 수 있어. 너 차세대 아시아 스타가 되는 거라고.”
“아, 머리 아파. 아직 구두계약이잖아요. 잠깐 생각할 시간 좀 줄 수 없어요?”
정지우가 심각한 얼굴로 바라보자 같은 표정이 되는 대표가 잠시 생각하더니
“좋아. 대신 한 주 만에 결정해. 더 이상 끌면 장대표하고 관계 빠그러지니까.”
라고 답했다. 복잡한 표정으로 입을 다무는 정지우.
*
정지우가 아무도 없는 회의실 의자에 앉아 콘 아이스크림을 공격적으로 핥아먹는다. 시나리오를 갖고 안으로 들어오던 안주연이 순간 멈칫한다.
“깜짝이야... 아이스크림 먹는 거 보니까 고민 있나 본데?”
도로 나가려는 그녀를 정지우가 불러세우는데.
“잠깐! <자객> 시나리오 읽어봐달라는 거 어떻게 됐어?”
잘못 걸렸다, 귀찮은 표정으로 그의 맞은편에 털썩 앉는 안주연.
“스터디팀 만들어서 시나리오 분석하고 그럴 땐 지났잖아. 나 엄청 바쁜 사람이라고!”
튕기듯 말하는 안주연을 마음에 안 드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정지우.
“네 고민 내가 한두 번 들어줬냐? 야, 사람이 어떻게 이래?”
안주연은 내뱉은 말과는 달리 정지우가 부탁하는 게 솔직히 기분 좋다. 관심 없는 척 하면서 다리를 꼬더니
“그 작품 하기로 했어?”
라고 물었다. 정지우는 고민에 빠진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 일주일 안에 결정해야 해.”
“아직 다 안 읽어서 그렇긴 한데...”
눈을 반짝이며 매달리는 정지우.
“읽긴 했네! 어땠어?”
“음... 느낀 대로 솔직히 말하면...”
애가 타는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정지우, 안주연은 이 순간을 즐긴다.
정지우가 의자를 바싹 당겨 앉는데.
“주인공 캐릭터에... 공감이 안 돼.”
정지우가 놀라 할 말을 잃은 채 안주연을 바라본다. 당황하는 그녀.
“왜, 왜 그래?”
“똑같은 소릴 하네. 그 여자랑.”
“여자? 누구...?”
이번에는 안주연이 궁금한 듯 의자를 당겨 앉는다.
“영화사 홍보팀 막내 직원인데, <자객>이 안 될 영화라고 막 떠들어대더라고.‘
”그래?“
”제 정신이 아닌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그 여자가 한 말이 자꾸 맘에 걸려.”
“무슨 말?”
“네가 한 것과 똑같은 말. 너 시나리오 잘 보잖아.”
“남의 것만 잘 보지..”
’특히 네 거.‘ 안주연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녀와 정지우는 똑같이 어려운 가정 환경 속에서 생계 때문에 연기까지 하게 된 공통점이 있었다. 둘 다 외모 때문에 발탁되긴 했지만 연기 공부를 한 적이 없어 데뷔 때 혹평을 받았다. 그 이후 자발적으로 같이 연기 스터디를 했고, 잠을 줄이면서 치열하게 노력한 결과 발연기 논란에서 벗어났을 뿐 아니라 차세대 유망주로 떠올랐다.
안주연은 둘만 있는 시간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정지우에게 빠져들었다. 어떨 땐 바보처럼 순수한데, 어떨 땐 여우 같은 종잡을 수 없는 매력이 있었다. 지우가 자신에게 의지할 때마다 그를 소유하고 있는 것 같은 쾌감을 느꼈는데, 이상한 여자가 자신의 영토에 끼어든 것 같은 위험 신호를 느꼈다.
정지우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는 안주연이 질문했다.
“그 여직원 이름이 뭐야?”
“응?”
왜 그런 걸 묻는지 이해가 안 되는 정지우의 눈과 거슬리는 표정의 안주연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
나는 회사의 유명인이 됐다. 정확히 말하면 오PD의 성난 코털을 건드린 유일한 직원으로 ‘이 구역의 미친년’쯤 되려나?
어떻게 해야 <더 키친>이 영화화 될 수 있을지 본격적으로 궁리하기 시작했는데, 홍보팀 업무도 소홀히 할 수 없어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현팀장은 내 패기를 인정하게 됐는지 예전처럼 마구 닦달하지는 않았다. 현팀장도 내심 제 맘대로 구는 오PD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계속 고민하다가 결국 하나의 결론에 이르게 됐다.
“팀장님, <자객> 투자사가 어디예요?”
투자사가 관심을 보이면 장대표도 작품을 무시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물을 걸 물어라. ‘시네마펀치’잖아.”
“그 회사에서 <더 키친>은 검토 안 했어요?”
나는 이때만 해도 투자사에 대한 궁금증이 어떤 파장을 가져올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