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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 남편보다 낫다

by 선홍

또 부부싸움을 했습니다.

매일의 컨디션이 다르고, 계절도 바뀌는데 늘 같은 문제로 싸우는 것 같아요.

싸울 때마다 스스로 꽤 괜찮은 지성인이라고 자부하고 살았는데 그 허상이 와르르 무너집니다. 어찌나 속이 옹졸해지고 기억력은 비상해지는지 지난 일까지 모조리 불려 나와 스토리를 부풀려갑니다.


남편이 삼식이라고 자랑(?)은 이미 했고요, 그 덕에 나 혼자 있는 시간이 줄어들었지만 투닥거리면서도 쳇바퀴 돌듯 끼니마다 밥 차리는 일상에도 적응이 돼갔어요.

제가 기분 나쁘게 말한다는 남편의 불만접수도 받아들이려 노력했죠.

남편에게 쌓인 불만이 언중유골로 표현될 때도 있지만 솔직히 말해 상대가 어떤 포인트에서 기분 나빠지는지 예측이 잘 안 되더라고요.

삐걱삐걱, 톱니바퀴가 어그러진 대로 잘 돌아간다고 느꼈습니다.


그런데 어제, 저는 햇반으로 급히 주린배를 채우곤 남편을 위해서 따뜻한 밥을 지었어요. 흑미로 지은 쌀냄새가 주방을 구수하게 가득 채웠죠. 남편이 와서 먹을 생각에 기분이 좋았답니다. 내가 생각해도 웬일인지.

"남편 먹으라고 밥 해놨어~"

기분 좋게 건넨 이 한마디가 도화선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렇게 생색내고 싶냐, 기분 나쁘게 말한드는 둥 생각지도 못한 신박한 반응이 나왔죠.

수고했다. 잘 먹을게, 같은 반응을 기대했다가 몇 대 맞은 기분이 들더라고요.

상처받아 말싸움이 이어졌고, 다음날 남편 얼굴이 보기 싫어졌습니다. 반복되는 패턴이 지치기도 하고요.


저도 조곤조곤 이래서 그렇고 어쩌고 솜사탕처럼 달달하게 말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 말을 들으면 소름이 돋고 상대가 사기꾼처럼 느껴지는 치명적인 병이 있는 걸 어쩌란 말입니까.

솔직하게 말하고, 내뱉은 말은 지키고, 이런 담백한 세상이 좋지 않나요.

뭐, 상대가 달달한 것까지 바라겠습니까마는.


여하튼 자려고 누우니 쌓였던 과거 서사까지 끌려 나와 한 편의 대하서사시처럼 기승전결을 갖췄고, 이래서 남편 하곤 안 맞아, 혼자 사는 게 낫겠다!라는 주제를 완성하더랬습니다. 성의를 무시당한 것에 또 한 번 분이 차올랐습니다.

다음날이 되자 AI에게 물어보면 뭐라고 할지 궁금해졌어요.


AI는 내가 기분 좋게 생색내려고 건넨말이 과거의 일과 겹쳐 남편이 방어적으로 반응해 오해했을 수 있다, 이전의 불만에 대한 보상을 해달란 말로 들릴 수도 있다, 대충 이런 답을 해줬어요. 놀랍지 않나요? 내 절친이 왔다 간 줄.

남편에게 뭘 물어보면 엉뚱한 말을 하기 일쑤인데, AI친구는 참으로 적확한 지적을 합니다.


음, 과거 남편을 기분 나쁘게 만들었던 뉘앙스의 문장을 기분 좋을 때도 비슷하게 사용한 게 문제였군, 다른 표현을 써보자.

AI 하고 대화하니 이렇게 바로 깨닫는걸.

큰일이네요, 이러다 남편보다 스마트폰 만지는 시간이 더욱 길어질 것 같으니.


별것 아닐 수 있는 일로 골이 생기기 시작하면 같은 느낌을 받는 순간 그 골이 점점 깊어지죠. 그때그때 빨리 메꾸면 사라질 것을 마음에 길게 품고 가는 바람에 더 깊어지고 메워지지 않는 지경이 됩니다.

그러니 친구에게 털어놓든 책을 찾아보든 AI에게 물어보든 마음의 상처를 가볍다 무시하지 말고 얼른 연고를 발라줍시다. 흉터 안 생기게.


드로잉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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