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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섭코 Dec 05. 2020

구김살 없이 밝고 사랑스러운 사람

밝음의 비가역성


삶은 달걀은 다시 날달걀이 될 수 없다. 이처럼 이전상태에서 현재상태가 되고나서는 다시 이전상태로 돌아갈수 없는 경우를 비가역적이라고 한다. 비가역적인 일은 달걀 뿐 아니라 사람한테도 일어난다. 그런 일들의 결과 중 하나는 "사람의 밝음" 인 것 같다.


 사람의 밝음에는 은근한 스펙트럼이 있다. 밝음의 세기라고 해야할까. 밝음 뒤편의 그림자가 얼핏 느껴지는 사람이 있는 반면, 해가 정확히 정수리에 위치한 것처럼 그림자 한톨 없는 밝음을 지닌 사람도 있다. 종종 후자에 속하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구김살 하나 없이, 완전하게 밝고 사랑스런 사람을 말이다. 사소한 행동이나 말 한마디에서도 밝음이 뚝뚝 묻어나는, 무결한 밝음을 가진 사람. 그런 사람을 바라보고 있으면 감탄스러운 동시에 치사하게도 조금 씁쓸해진다.


 완전무결한 밝음을 지닌 사람이라 해서 상처받을 일이 인생에 없던 건 아닐테다. 인생 곳곳에 진을 치고 호시탐탐 때를 노리는 복병들은 많고, 그 복병들은 누구에게나 달겨드니 말이다. 물론 방어구를 비교적 쉽게 선점하는 삶도 있겠지만, 대다수에게 그런 행운이 따라주지 않는다. 노력과 반비례한 결과든, 예상치 못한 실패든, 보답받지 못하는 사랑이나 우정이든, 트라우마를 남길 만큼의 사건들이든 사람인 이상 다양한 복병들을 마주한다.


 나는 이 크고 작은 복병들에 이리저리 구겨지고 치이며 패잔병이 되어 온 편이다. 완전한 밝음을 지닌 사람은 그 모든 과정을 단단하게 지나온 것이 아닐까. 복병들이 암만 덤벼봤자 생채기는 커녕 감히 흔적 조차 내지 못할 만큼 강한 사람이라서, 그래서 그토록 완전무결한 밝음을 지켜올 수 있던 게 아닐까 싶다. 구김없는 밝음은, '아직 상처받지 않음' 이 아닌, 누구보다도 단단한 사람이라는 증표인 것 같다. 그런 이를 마주하면 자연스레 감탄할 수 밖에.


돌처럼 단단한 사람이 내뿜는 밝음이란


 동시에 씁쓸함을 느끼는 이유는, 흠결 없이 매끈한 완전한 그 밝음을 내가 결코 가질 수 없어서다. 내 밝음이 형성되어 온, 패잔병의 역사는 비가역적이라 도저히 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전의 밝음, 완전무결한 밝음을 보면 그립고 부러운 동시에 조금 씁쓸하다. 단순하고 치사한 이유지만, 곰곰이 생각해도 저 이유 뿐이다. 게임처럼 인생 리셋버튼을 누르거나, 이터널 선샤인에서 나온 기억을 지워주는 회사를 찾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다. 다시 돌아갈 수 있더라도, 내가 강하지 않다면 도루묵이 될 지도 모르겠다.

 어떻게든 완전한 밝음을 가진 척을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척 해봤자, 누군가 손 끝으로 살짝 쓸어보면 요철이 금방 드러나고 말겠지.

 

  신기하게도 2015년부터 삶은 달걀은 날달걀이 될 수 있게 됐다. 무려 이그노벨상을 탄 과학자, 콜린 라스톤이 개발한 장치 덕분이다. 열에 의한 변성으로 얽힌 단백질을 회전으로 펴내서 원래 상태로 돌린다고 한다. 사람에게도 그렇게 원래 상태로 돌아갈 수 있는 장치가 있었으면 좋겠다. 밝음 뿐 아니라 무엇이든, 비가역적인 과정을 지나버려서 도저히 어찌할 도리가 없을때 선택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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