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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섭코 Feb 06. 2022

나는 너의 열여섯번째다

프랑스에서 온 남자, 라기에는 애



 매직 넘버(Magic Number) 이제까지 성관계를 가진 상대방의 숫자를 말하는 슬랭 (물론 사용되는 문맥에 따라 다른 의미일수도 있다). 나는  애와 서로의 매직 넘버를 말했다. 당시 우리는 친구보다는 아주 쪼끔 더 가까운 사이 즈음이었고, 그렇다보니 판도라의 상자를 연다는 긴장감도 없었다. 어떤 숫자가 나와도 기분이든 감정이든 상할 이유가 없는 관계였으니까.  오래 사귀는 연인들은 대체 어떻게 그럴  있냐며 신기해하고, 우리는   Trust issue  뼛속 깊이 자리잡은 인간들이라 찐사랑같은건   거라며 서로 농담조로 동정했고, 술을 마시면 섹드립을 치며 낄낄대고,  취한 날에는 자는 사이였다. 서로의 매직넘버를 늘려준 사이. 아무튼 우리는 서로의 매직 넘버를 말했고, 나는  애의 열여섯번째였다.


 어...너 진짜 열심히 살았구나.

 나보다 세살이나 어린데도 나를 훨씬 웃도는 숫자에 아주 쪼오금 자존심이 상했다고 해야 하나. 내 매직넘버를 쪼금 뻥튀기려다 관뒀다. 자존심이 상한 기분은 스칠 뿐이었고 총 열여섯 중에서 내가 과연 몇등쯤이나 하는지가 궁금해지는 동시에 이 관계가 진지해질 일은 없겠구나 생각했다. 너는 성욕이 아주아주 강한 사람, 섹스 자체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 섹스가 아닌 연인 관계는 제대로 가져본 적이 딱 한 번 뿐인 사람, 그 한번의 관계를 망친 이유마저 섹스였던 사람. 너하고는 지금의 이 거리가 가장 안전한 거리이자 최대로 가까워질 수 있는 거리겠구나. 이게 그 애의 매직 넘버에 대한 내 감상이었다.



친구 : 야 너네집 함뜨할때 분위기 좋겠다



 파트너 치고는 조금 가깝고, 밖에서 만났을땐 그냥 친한 친구같은 관계로, 킬링타임용 로코에 조연 커플쯤으로 나왔을 법한 관계로 지내던 중이었다. 그 애가 어느날 밤  대뜸 우리집에 찾아와도 되겠냐고 물었다. 그냥 같이 자고싶어, 섹스 안하고. 친구 집에서 술을 마시던 중이라 안된다고 하자 '그럼 넌 나를 싫어하는 거야?' 하는 식의 불안형다운 소리를 했다. 기와 결만 있는 사고 흐름이 황당하면서도 어쨌든 나는 그 애가 잠들기 전까지 나를 끌어안고 있는 것도 좋아했고, 그때 그애에게서 나는 체취도 좋아했고, 그 애가 목덜미부터 뒷통수의 중간께까지 손끝으로 머리를 천천히 손빗질을 해주는 것 역시 좋아했기 때문에 그 억지에 못이기는 척을 했다. 그래서 나도 그 애도 각자 있던 위치에서부터 우리 집으로 향했다. 다른 날처럼 누워서 장난을 치고 스킨십을 주고 받다가, 잠이 살풋 올 즈음이었다. 그 애가 불쑥 말했다.


너가 다른 사람을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 요즘에 너밖에 안만나는데?

아니 그것보다 더, 그러니까 너가 다른 사람을 만날 기회를 열어두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건 뭐 사귀자는건지, 그런거면 확실하게 말을 하던지. 등을 돌려 너를 마주보며 누웠고, 탁상등 때문에 네 눈동자가 초록색은 아니었다.


이렇게 있는건 나랑만이었으면 좋겠어. 너가 다른 사람을 안만졌으면 좋겠고 또 다른 사람이 널 안만졌으면 좋겠어. 내 말은, 너만 괜찮다면, 우리가 더 진지한 사이가 됐으면 좋겠다는 말이야. 왜냐면 난 그러고 싶으니까.

그래? 음. 그래!


딱히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너를 애닳게 좋아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굳이 아니라고 말할 이유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 애는 팔을 주욱 뻗어 핸드폰을 주섬 주섬 찾아 잡더니 날짜를 확인했다. 오늘은 3일이고, 이 날이 우리의 1일이라며 중얼거리면서 다시 나를 꼼꼼하게 안았다.


 나보다 체온이 훨씬 높은 그 애의 팔에 둘러싸인 공기가 훈훈해지는걸 느끼던 중 문득 궁금해졌다. 너는 열 다섯명의 모든 파트너들에게도 저런 말을 했을까? 제대로 된 관계는 첫사랑 하나였다는걸 보면, 그럼 나머지 열네명은 다 거절한걸까? 그 애가 자기의 등을 손끝으로 긁듯이 쓰다듬어달라고 칭얼댔다.

 너 그냥 파트너들하고도 이렇게 해달라고 해? 나한테 하는 것처럼 이런 커들링도 해주고?

 관계가 진지해진다는건 질문이 많아진다는 것 같은 말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등을 지고 누워도 끈질기게 끌어안고, 내가 그 애의 등과 팔을 긁듯이 쓰다듬는 등의 다정한 행위들이 오갈때마다 애인이랑 다를게 뭐가 있나 싶었었다. 그 애는 파하, 하면서 웃었다.

 절대, 전혀. 그냥 섹스 하고 옷입고 인사만 하고 갔지.

그 대답에 기분이 은근히 좋아지는걸 느끼면서, 나는 어쩌면 너와의 안전거리 따위는 무시하고 독점적으로 다정한 사이가 되고 싶어하는 마음을 키우고 있던게 아닐까 생각했다. 아니라고 대답할 이유가 없어서라던지, 너가 해주는 토닥임이나 체취가 그저 맘에 들어서가 아니라, 조용히 자라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연인이 되자는 네 말에 그러자고 선뜻 말할 수 있었던 거라고. 너가 어젯밤 대뜸 찾아와 연인이 되자고 말하지 않았더라도, 내가 다른날 너를 찾아가 말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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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결국 쓰레기 걸레가 되버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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