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섭코 Feb 14. 2022

전애인과 친구하겠다는 개소리

프랑스에서 온 남자, 라기에는 애




 생각보다 깊게 만났던, 나도 모르게 내 생각보다 마음을 많이 내어 준 상대와 갑작스럽게 헤어지는 것은 일상생활에 큰 타격을 주는 일이었다. 이제까지 해왔던 이별을 꽤나 무덤덤하게 해왔던 나로서는, 내가 이렇게까지 힘들 일인가 신기할 정도였다. 그 애는 술을 마시고 황당한 실수를 했고, 나는 바로 그 다음날 헤어지겠다고 통보했다. 말이 좋아 통보지, 사실 나는 헤어짐을 당한 쪽이었다. 그쪽은 실수를 용서해달라는 말과,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하며 울었고, 나는 호구답게 그 애를 달래고, 눈물을 닦아주고, 토닥이고, 너가 뿌리는 향수 냄새를 정말 좋아했고 이게 그리울 것 같다고 구질구질한 말도 물론 덧붙이고, 그리고 헤어졌다.

 

나의 이별 극복 연대기는 4주 짜리 코스였다. 주중을 빈틈없이 바쁘게 만들었다. 마침 커리어의 변화도 생기던 찰나라 집 근처 스터디카페를 끊었고 퇴근하면 곧장 2차 출근을 해서는 밤까지 공부를 했다. 금, 토요일에는 술약속을 빠짐없이 잡았다. 다음날 오후 다섯시까지 술냄새가 날 정도로 퍼마셨고, 그렇게 주말을 술과 숙취로 날려야만 시간 많은 주말에 그 애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물론 술을 퍼마신 새벽, 술친구들이 떠나고 혼자 집에 남고 나면 슬픈 노래를 틀어놓고 꺼이 꺼이 우는 청승을 부렸다. 울다 잠들 정도로 만취하지 않은 날은, 다 울고나선 머쓱하게 스윽 일어나 눈물 콧물을 주섬주섬 닦고는 양치질까지 하고 잠들었다. 연락을 하고 싶어 죽겠을때는 그냥 메모장을 켜고 말을 쏟아냈다. 원망이든, 들리지 않을 널 붙잡을 노래든, 추억 회상이든, 청승이든, 채팅창 근처에는 가지도 못할 이야기들을 쏟았다. 그렇게 쏟아내고 나면 조금 나았다. 탁상에 진통제를 볼때마다 감정 진통제는 어디 없을까 하는 감성적인 생각따위를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놀랍게도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꺽꺽 목을 쥐어 짜게 하던 슬픈 노래들을 들어도 별 감흥이 없고, 친구에게 헤어진 이야기를 풀때 오열은 커녕 기꺼이 '술안주' 로 이야기를 내놓았고, 하루에 한장씩은 빼곡히 채웠던 메모장은 켤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게 되네? 싶은 순간이었다.


3주쯤 되니, 나도 내 친구도 나의 이별을 풍자와 해학으로 소비했다



그리고 그렇게 이별과 그럭저럭 잘 지내던 중, 그 애의 생일이 오고 말았고, 와인 반병쯤을 비운 뒤 약간 취했던 나는 얼레벌레 그 애에게 연락을 해버렸다. 이별을 최고점을 지난 후였기 때문에 다시 그 애와 뭔가를 해보고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아주 조금은 있었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분명하게 남은 마음은 아니었다), 그 애는 어떤지, 힘들기는 했는지, 뭐 이런 것들이 조금 궁금하기는 했다.

너가 생일에 큰 의미 안둔다고 말한거 기억하지만, 생일축하해.

보낼까 말까 할땐 보내자 하며 보내버렸고, 다시 읽어보니 내 연락에 미련은 묻어있지 않은 것 같아 마음에 들었다. 아. 나 너무 담백했는데 이거. 술기운에 조금 들뜬 정신으로, 스스로의 멘트가 괜찮았다고 끄덕이며 남은 와인을 줄줄 따르고 있는 찰나 답장이 왔다.

고마워. 생일 재밌게 보냈지.

청포묵도 이것보단 간간하겠다. 더 담백한 답장에 녀석 생각보다 칼같은 녀석이었구나, 역시 술취하고 전애인한테 연락은 하면 안돼, 하면서 다시 넷플릭스를 재생하려던 찰나 하나가 더 도착했다.    

왜 아직 안자?

남녀노소 만국공통, 전애인과 하는 연락은 다 거기서 거기인 것 같다. 내 연락 역시 괜찮긴 개뿔 거기서 거기였겠지. 전애인으로부터 온, 미련이 은근슬쩍 묻어나는 연락 딱 그거였겠지 뭐.


그 연락이 계기가 되어 그 애를 다시 마주했다. 그 애는 내 무릎을 베고 비스듬하게 누웠고, 나는 그 애의 곱슬머리를 만지작거리며 그간의 근황을 나눴다. 이상한 느낌이었다. 나는 너에 대한 애틋한 감정, 사랑같은 감정은 더이상 남아있지 않음을 감각했지만, 4주의 헤어짐따윈 없었던 것처럼 너와 대화하고, 너에게 만져지고, 너를 만지는 일은 놀랄만큼 익숙하고 자연스러웠고 또 좋았다. 4주동안 우리는 서로를 각자의 방식으로 그리워하고, 힘들어하고, 여전히 좋아한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보고 나니 그 시간동안 감정이란게 희미해져 버렸음을 깨달았다. 이별을 극복하려는 각자의 시도가, 어쨌든 서로를 향했던 마음을 희석시킨것이었다.


 한동안의 근황을 나누고, 혼란스러운 마음을 서로 털어놓고, 이게 뭔지 고심하다가, 끝내 우리는 친구로 지내보자는 개소리로 결론을 내렸다. 다시 돌아가기에는 희석된 마음을 무시하진 못했고, 다시 쌩판 남이 되기에는 우리는 여전히 서로를 놓고 싶지 않아했다. 그게 애매하게 남은 애정인지, 정인지, 인류애인지 뭔지는 모르겠는 무언가가 명 우리 사이에 남아있었다. 지난 4주처럼 연락조차 하지 못하는 사이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우리가 고작 택한 것은 친구였다.    '친구' 라는 개소리의 결말이 뭐가 될지는 모르지만, 일단은 해보자고 동의했다. 키스도 안돼,  둘이 사적인 공간에 있는거 안돼, 서로 감정에 솔직하기야. 이게 우리의 협의사항이었다. 어느 모로 봐도 개소리다. 우리는 관계를 끊어낼 강단도, 관계를 다시 이어 붙일 용기도 자신도 없는 겁쟁이들인 동시에, 서로를 잃기는 싫어하는 바보들이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