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 때 친구와 모의면접을 할 때였다. 친구는 "인생에서 제일 행복했던 기억을 말해보세요."라는 질문을 했고, 나는 잠시 고민하다 떠오른 하나의 기억을 말했다.
내 나이가 아마 한자릿수였을 즈음의 기억이다. 친언니와 하루 종일 사이좋게 한 번도 싸우지 않고 논 날이었다. 언니랑 싸우지도, 엄마한테 혼나지도 않았기 때문에 기분이 무척 좋았다. 엄마는 기분 좋은 목소리로 안 싸워서 기특하니까 진미채랑 고기반찬을 꺼냈다고 말했고, 엄마의 그 기분 좋은 목소리에 더더 기분이 좋아졌었다. 저녁을 먹으며 뭘 하고 놀았는지 재잘거리던 중, 퇴근하고 돌아온 아빠가 베스킨라빈스써리원 봉투를 한 손에 들고 문을 여셨다. 언니와 나는 동시에 와아 아빠다, 아이스크림이다, 하며 환호했다.
그 행복의 순간. 너무 사소하고 별 거 없는 기억인데도 이토록 선명한 행복으로 기억된다는 게 신기할 정도로 별 게 없는 한 순간. 그럼에도 그 순간의 기억을 지켜온 내가 기특할 정도로 여전히 행복으로 기억되는 순간. 왜 내 뇌는, 그 순간을, 이게 최고로 행복한 순간으로 기억될 거라는 걸 알지 못했을 텐데도 기억한 것일까.
기억의 흔적, 잠재적 기억상이라고도 불리는 뇌 안의 인지 정보 구성단위인 "엔그램"이 있다. 기억 엔그램은 특정 뉴런들이 선택되어 경험을 인코딩하고, 이 뉴런들 사이에 장기 강화(Long-term Plasticity: LTP)가 일어남으로써 형성된다. 기억 엔그램에 참여할 수 있는, 선택받은 뉴런들은 특정 단백질(CREB)이 과발현 되거나, 흥분성이 증가 상태의 뉴런들이라고 한다. 경험의 순간, 몇몇 뉴런들이 신나게 흥분해준 덕분에, 우리는 비로소 뇌 곳곳에 분포되는 기억 엔그램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어린 내 뇌 속에 있던 뉴런들을 신나게 만든 건 무엇이었을까? 고기반찬? 엄마의 기분 좋은 웃음소리? 베스킨 라빈스 31 로고? 당시 내 세계의 전부였던 사람들이 모두 모였다는 그 감각? 그 모든 것들이었을 수도 있겠다. 어쩌면 별거 없는 사소한 순간에도 뉴런이 흥분할 만큼 어렸기 때문에 나는 행복의 기억을 지켜낼 수 있었던 것 같다.
가장 행복한 내 엔그램은, 아빠가 신발을 벗고 들어오는 것이 느려지고, 내가 1인칭으로 바라보던 그 모습들이 해리포터에 나오는 신문 속 사진처럼 움직이는 사진처럼 납작해지고, 어느새 넓어져있는 시야 사방을 채우고 있는 검은 물에 그 사진이 끄트머리부터 적셔지며 끝이 난다. 그 기억이 발린 종잇장이 찢기는 순간 막을 내린다.
그 친구는 내 대답을 듣다가 별안간 울기 시작했다. 대성통곡을 한 건 당연히 아니고, 주르륵 울었다. 그 애는 자기가 왜 우는지 모르겠다면서 어이없다고 웃으며 울었다. 우리는 춘추복을 입고 있었고, 그 애가 쓰고 있던 검은 뿔테 안경과, 앞머리를 야무지게 집어 정수리 쪽에 꽂고 있던 노란색의 집게핀 역시 기억난다. 그 기억은 왜이렇게 또렷하게 남아있는 걸까. 당시 내 세계의 전부였던 학교라는 장소, 가장 친한 친구의 눈물,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행복을 회상하며 느낀 아린 감각들이 뉴런을 흥분시켰던 것 같다.
내가 가지고 있는 기억 엔그램들을 모아 나열하면, 그 무엇보다도 나라는 사람을 잘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지금의 내가 그걸 왜 기억하고 있지? 싶더라도, 당시의 내가 그 기억을 인코딩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때 그 세계가 전부여서든 행복이든 불행이든 내 뉴런을 극도록 흥분시킨 순간들만이 기록된 것일 테니까. 내가 인지하는 나는 내 기억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