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룸매거진 동남아리포트 아카이브
* 본 내용은 투룸매거진 25호(2023년 1월호)에 수록된 기사입니다. 투룸매거진 앱에서 더 많은 사진과 예쁘게 디자인 된 기사로 볼 수 있습니다.
독일에서 8kg 배낭을 챙겨서 태국으로 떠났습니다. 동남아시아를 제대로 여행하는 건 이번이 처음인데요, 매일 익숙하고, 낯설고, 놀랍고, 즐거운 일들이 뒤섞여 심심할 틈 없이 꽤 재밌는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기껏 가져온 커틀러리를 미처 챙기지 못한 여행 둘째 날 아침이었다. 유로를 태국 밧으로 환전하려고 은행을 찾아다니다 우연히 들어간 슈퍼마켓에 먹기 좋게 손질된 잘 익은 망고 두 개와 파파야 반 통이 들어있는 패키지가 진열되어 있었다. 어제 차이나타운에서 사 와 숙소에서 어설프게 까먹은 망고 두 개보다 가격이 훨씬 저렴했다. 유혹을 이기지 못한 한국인은 과일 팩을 집어 들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독일인은 별안간 불안감을 느꼈다. 먹고 나면 손이 끈적함으로 엉망이 될 것이 뻔한 달콤하고 부드러운 과일이다. 그걸 지금 사면 언제 먹으려고? 계산하고 나가서 먹을 거야. 한국인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독일인은 종종거리며 일회용 포크가 있는 곳을 찾아다녔다. 그는 백 개, 이백 개씩 대용량 포장만 있는 패키지 앞에 멀뚱히 서서 고민했다. 안 사도 돼, 한국에서는 계산대 근처에 하나씩 포장된 포크나 숟가락이 있어서 필요한 사람한테 주거든. 여기도 아마 포크를 줄걸? 걱정 마. 한국인이 아무리 말해도 독일인은 자신이 경험해본 적 없는 서비스의 존재가 여전히 의심스러웠다. 한국인과 독일인은 셀프계산대 세 대가 양옆으로 지키고 있는 출구 쪽으로 걸어갔다. 외국인 두 명이 미처 헤매기도 전에 다가온 직원은 빠르게 계산을 도와주고는 묻기도 전에 담아갈 봉지와 포크를 건넸다. 한국인은 내가 말했지? 하는 표정으로 독일인을 쳐다보았다. 그는 안도와 놀람이 뒤섞인 표정으로 독일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며 아시아의 고객 서비스에 크게 감탄했다.
내 해외 경험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영어권 서양 국가에서 나는 다짜고짜 아 유 차이니즈? 재패니즈? 혹은 니하오, 곤니치와 하는 백인들의 무례함에 지겹도록 시달렸다. 반면 서양에서 만난 젊은 아시아 여성들은 내가 한국인이라는 걸 신기하게도 잘 알아보았다. 아시아 사람들이 한국 드라마를 많이 본다는 이야기도 자주 들어서 나도 모르게 아시아는 뭔가 다르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를 했던 것 같다. 태국 여행 선배인 친구 타샤가 '저는 한국사람 입니다'가 태국말로 '콘 까올리'라고 알려주었다. 타샤는 태국에서 누가 묻기도 전에 먼저 콘 까올리라고 말하는데 그러면 대부분 자기가 아는 한국말을 하나둘씩 하면서 다들 좋아한다고 했다. 성격상 나는 어디서 왔냐고 묻기 전에 먼저 콘 까올리라고 말하지 않았는데 나를 보고 태국말로 말을 거는 사람들이 적잖았다. 어떤 숙소 주인은 나를 보더니 베트남 사람이냐고 했다. 아니라고 까올리라고 했더니 예뻐서 그랬다며 얼버무렸다. 한 마사지사는 나보고 일본인이냐 그래서 까올리라니까 쏘리쏘리 하더니 계속 자기는 내가 일본인인 줄 알았다느니, 일본인 같이 생겼다느니 하며 끝까지 재미없는 장난을 쳤다. 걸어가며 지나친 길거리 가게의 어떤 젊은 남자는 내가 중국인이라고 생각했는지 중국말로 뭐라 뭐라 중얼거렸다. 생각해보면 한국 사람들도 백인들한테는 다 미국인이냐고 하고, 호주에서는 다짜고짜 중국말로 말을 걸어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결국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은가보다.
람캄행 국립공원에 당일치기로 하이킹하러 갔다. 경사가 얼마나 급하던지 등산 시작부터 땀이 뻘뻘 나고 숨이 찼다. 앉을 곳만 보이면 쉬었다. 내 생에 중간에 포기하고 싶은 산행은 처음이었다. 중간 뷰 포인트에 도착하니 신나게 사진을 찍던 타윈네 그룹이 있었다. 그들은 마주치는 사람들마다 인사를 건넸다. 시끌벅적하게 웃고 떠들다 먼저 간 그들을 지나쳐 우리가 먼저 정상에 도착했다. 초록초록한 캠핑장은 햇살에 아름답게 반짝였다. 금강산도 식후경. 챙겨간 비건 라면과 밥을 먹고 앉아 쉬고 있으니 타윈네가 도착했다. 그들은 산지기와 이야기하더니 티켓과 돈을 주고받았다. 다들 여기서 자고 가는 듯했다. 캠핑장 근처로 펼쳐진 트래킹 코스를 다 돌아보는데 서너 시간, 여기서 내려가는 데 두세 시간이 걸리는데 어두워지기 전에 내려가려면 한두 시간 뒤 하산해야 한단다. 이왕 온 김에 둘러보고 싶은 마음, 올라오느라 지쳤는데 또 그 급경사를 내려가야 한다는 아득함, 평화로운 캠핑장에 머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우리에겐 아무것도 없었다. 망설이는 우리에게 태국 사람들은 자고 가라고 했다. 뭐가 문제냐며 주섬주섬 뭔가를 하나씩 내밀었다. 처음엔 코코넛 찹쌀 간식과 말린 바나나, 다음엔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일회용 칫솔 치약 세트, 여분 수건, 샴푸랑 비누를 건넸다. 자고가지 않을 수 없었다. 텐트와 이불을 빌리고 잠시 쉬었다 근처 산길을 걸었다. 그들은 멋진 경치가 나올 때마다 매번 수십 장의 사진을 찍고, 노래를 부르고, 깔깔대며 산에서 놀았다. 어쩜 그리 다들 천진난만하고 즐거운지 덩달아 웃음이 번졌다. 같이 밥을 먹고, 별도 보고, 새벽엔 일출도 봤다. 어제 만난 사람들인데 오래 알고 지낸 이모 삼촌들 같았다. 타윈과 렉은 영어를 잘해서 통역도 해주고, 그동안 궁금했던 것들도 알려주었다. 영어를 잘 못하는 다른 사람들도 눈물이 날 정도로 친절하고 다정했다. 자꾸 이렇게 챙겨주는데 어떻게 보답할 수 있냐는 물음에 타윈은 태국에 온 걸 환영한다고, 즐거운 여행을 하면 그걸로 됐다고 했다.
<투룸라운지> 19. 태국 치앙마이에서 만난 카오쏘이와 초콜릿케이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