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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리 Feb 24. 2019

여행의 끝에 만난 보물상자, 샹티이

33일: 프랑스 샹티이, 샹티이 성과 콩데 미술관

33일을 꽉 채운 부모님과의 중유럽 여행 마지막 날이다. 중유럽이라고 했지만 파리에서 시작해서 크로아티아까지 내려갔다 왔으니 서유럽과 남유럽도 걸친 부지런한 여행이었다. 부모님의 한국행 비행기 시간이 저녁이어서 짐을 다 싸고 숙소를 체크아웃하고도 몇 시간 여유가 있었다. 마지막 날이라고 쇼핑을 하거나 느긋하게 쉬다가 공항에 가는 건 우리 가족의 모습이 아니었다.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다. 33일간 체력 소진하지 말고 여유롭게 다니자고 다짐했지만 그런 여행은 우리 가족에게는 너무 어려운 거였다. 볼 수 있는 것 다 보고 갈 수 있는 곳 다 발도장을 찍어야 직성이 풀린다. 힐링, 여유, 그것은 똑같은 곳에 두세 번 갈 때나 누릴 수 있는 거였다.  


오후 6시까지 샤를 드골 공항에 리스카를 반납하기로 되어 있었다. 오후 나절까지 남는 시간을 어찌할까 며칠 전부터 고민이었다. 과감하게 파리 시내에 진입해서 루브르 미술관에서 몇 시간 보내다가 갈까, 에펠탑 근처 공원에서 마지막으로 피크닉이라도 시도해 볼까 생각도 했다. 아무래도 파리 시내는 내키지 않았다. 너무 복잡하고 주차가 불안하기도 했다. 정든 리스카를 마지막으로 타는 날인데 시내 주차장에 세워놓기만 하기보다는 좀 돌아다니고 싶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일단 파리를 들어가면 볼 게 너무 많아서 공항 가는 길에 아쉬움이 많이 남을 게 분명했다. 구경하다 말고 허겁지겁 가는 모양새가 될 것 같았다. 딱 하루 가볍게 구경하고 깔끔하게 마무리할 만한 작은 관광지면 족했다. 문득 샤를 드골 공항이 위치한 동북쪽 외곽으로 좀 더 나갔다가 오면 파리 주변으로 재진입할 필요가 없으니 교통도 복잡하지 않고 여유 있게 이어질 것 같았다. 그렇게 구글맵을 눌러보다가 눈에 띈 지명이 샹티이(Chantilly)다. 샤를 드골 공항에서 북쪽으로 30분 정도 떨어져 있는 작은 도시였다.

샹티이 성의 주인들은 사냥 광이었던 게 분명하다.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은 이름이었지만 그리 익숙하지는 않았다. 알고 보니 '샹티이 크림'이라는 디저트 크림 재료로 이름이 알려진 곳이었다. 구글맵에서 이름을 찍자마자 대표적인 장소로 어떤 멋진 성 사진이 나왔다. 어쩌다 검색해서 걸린 것 치고는 상당히 매력적으로 보였다. 지금은 미술관이었고 주변에 호수와 어우러진 정원도 넓었으며, 가까이 '말 박물관'과 지금도 운영하는 경마장이 있다. 몇 시간 내로 깔끔하게 보고 나오기 좋을 것 같은 직감으로 그곳으로 행선지를 정했다. 베르사유 근처 숙소를 떠나 파리 외곽을 빙 돌아 한 시간 이십 분 정도 걸렸다. 샹티이 성은 경마장을 사이에 두고 시가지와 떨어진 공원에 있었다. 넓은 공원 중간에 호수로 둘러싸인 섬에 있고 다리로만 연결된다. 작지만 매우 화려한 성이다. 넓게 트인 공원은 성 정원을 개방한 것일 터였다. 기대 없이 찾아왔는데 주변 공원과 성이 어우러진 경치부터 눈 호강이 시작되었다.


홈페이지 홍보문구는 "루브르 다음으로 큰 고전 명화 컬렉션"이었다. '콩데 미술관(Conte Museum)'이라 부르는 그림 갤러리가 자랑이었다. 작은 성의 갤러리가 루브르 다음을 자처하는 것은 너무하지 않나 생각했다. 입장료는 말 박물관과 기획전시까지 포함한 종합권만 팔았는데 일인당 17유로로 비쌌다. 루브르 미술관 개인 입장료가 17유로다. 여기까지 왔는데 안 볼 수는 없어서 툴툴거리며 입장권을 샀는데, 결과적으로는 수긍하게 되었다. 성의 주인은 정말 열정적인 수집가였다. 오를레앙의 헨리라는 이름의 오말 공작(Henri of Orleans, the Duke of Aumale) 한 사람의 수집품이었다. 프랑스 왕정이 끝난 19세기의 왕족인데 이런 방대한 수집이 가능했다는 게 신기하다. 마지막 왕인 루이 필립의 다섯째 아들이었다고 한다. 1822년에 태어나 8살에 샹티이 영지를 상속받은 부유한 왕자였다. 대대로 콩데 공(Prince of Conde)이라 불린 부르봉 가의 대귀족이 그의 대부였는데, 자녀 없이 죽으면서 대자에게 상속했다고 한다. 샹티이는 중세부터 여러 번 개축되고 확장된 영지였지만 프랑스혁명 때 메인 성은 파괴된 상태였다. 부르봉-콩데 계보가 끝나면서 남은 부동산을 받은 거고, 그 콩데라는 이름을 평생 추앙하며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미술관으로서의 성 이름은 콩데 미술관이다.

샹티이 성의 일부는 콩데 미술관이고, 그 외에도 고서를 소장한 도서관과 화려한 생활공간이 함께 남아있다.
샹티이 성 내 콩데 미술관은 그리 크지는 않지만 벽마다 소장 미술품을 빼곡하게 전시한 보물상자 같다.

지금 성과 미술품들은 콩데 계보와는 사실 상관이 없다. 오말 공작이 평생 수집한 미술품들이고, 그걸 보관하려고 성도 다시 지은 것이다. 1848년 혁명으로 왕정은 끝났고 영국에서 1871년까지 오랜 망명 생활을 했다. 그 세월 동안 돌아갈 날을 기다리면서 미술품 수집으로 인생의 의미를 찾은 것 같다. 망명 중에 아내도, 자녀들도 먼저 죽고 혼자가 되어 엄청난 수집품을 가지고 돌아왔다. 1885년에 성을 완공해서 수집품을 정리하고는 바로 1886년에 학사원(Institute de France)에 기증했다. 자신이 죽은 후에 미술관으로 공개하도록 했다고 한다. 1897년에 그가 죽은 후 다음 해인 1898년부터 공개 미술관이 되었다. 그림 말고도 서적과 조각, 소품도 많다. 고서들도 보물급이 많고 도서관 자체도 작품이라 소중하게 관리하고 있다. 생활공간도 보존하고 있는데, 19세기에 제국으로 확장 일로에 있던 프랑스의 부유함이 겹친 덕분인지 내부 장식이 웬만한 왕궁보다 더 화려했다.


콩데 미술관은 조각과 그림이 너무 많아서 벽마다, 복도마다 촘촘하게 걸고 세워놓았다. 하나하나 귀한 작품인데 바로 옆에 다른 게 있다 보니 돋보일 수가 없다. 다른 데로 옮기지 않는다는 것도 기증할 때의 조건이었다고 한다. 작품 배치도 19세기 이후로 거의 바꾸지 않았다는 거다. 즉 이 작품들은 계속 다닥다닥 붙어있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제일 귀하게 대접받는 그림이 15세기 이탈리아의 Piero di Cosimo 작품 'Simonetta Vespucci' 초상화인데, 그쯤 되니 겨우 로툰다의 벽에 조금 간격을 두고 걸려 있다. 구석구석 미로처럼 갤러리가 계속되고 다양한 작품이 나와서 자세히 보다가는 헤어 나오지 못할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헤어 나오지 못하고 감상에 매진하는 아빠를 끌다시피 해서 미술관을 빠져나왔다. 성의 부엌에 해당하는 아래층에 레스토랑이 있다. 디저트로 샹티이 크림을 얹은 아이스크림을 먹는 걸로 미술관 투어를 마무리했다.

샹티이 성 지하에서 만난 샹티이 크림. 성에서 오백 미터쯤 떨어진 말 박물관은 오래된 경마장의 마구간이다.

샹티이 성과 콩데 미술관은 왕족으로 태어나 권력은 누리지 못했지만 재력은 있었던 수집가가 프랑스에 남기고 간 보물상자였다. 자녀가 없어서 가능했던 것일 수도 있지만, 아무튼 대단한 일이다. 처음에는 우리나라에 간송 미술관을 남긴 수집가 전형필 선생이 생각이 났다. 귀한 미술품을 열정적으로 모으고 조심스럽게 보관해서 나라의 자부심이 된 것은 비슷하다. 물론 배경과 의미는 전혀 다르다. 간송 선생은 우리나라의 위기가 계속되던 시절에 우리 미술품들을 열정적으로 수집해서 한국 민족문화 보존에 큰 공을 세웠다. 오말 공작의 열정적인 수집은 프랑스의 민족문화 계승과는 별 상관이 없다. 프랑스는 잘 나가는 제국이었고 루브르를 채운 작품 대다수도 프랑스 것이 아니다. 유럽 귀족의 예술품 수집에 국가는 별 의미가 없었다. 콩데 미술관에 프랑스 작가 것도 많지만 대표적인 작품은 이탈리아 등 다른 나라 작가 것이다. 출처 무관하게 당시 기준으로 글로벌한 수집력을 발휘해서, 프랑스만이 아니라 유럽(과 세계) 미술사에 의미 있는 유산을 남겼다는 게 자랑이다. "망명 중에도 나라를 생각했다"는 식의 민족적 동기는 전혀 아니고, 그냥 개인의 귀족적인 수집 취미를 낙으로 삼았고 그걸 공익에 환원하고 간 것으로 충분했다.

1836년 샹티이의 경마 경주를 그린 그림 (말 박물관)

샹티이는 그런 귀족적인 취미와 삶이 보존되다가 개방된 곳이었다. 대대로 콩데 공들은 사냥이 낙이었던 모양이다. 샹티이 성을 둘러싼 조각품 중에도 유난히 사냥개나 사슴 같은 사냥 기념 동물상이 많다. 성에서 오백 미터쯤 떨어진 곳의 '말 박물관(Horse Museum)'이 티켓에 포함되어 있어서 가봤다. 남은 시간에 살짝 들여다보고 가려고 했는데, 이게 평범한 박물관이 아니었다. 말 박물관 자체는 그리 인상적이지 않다. 2013년에 열었다는데 말과 관련한 간단한 역사와 예술품을 전시하고 있다. 원래 있던 거대한 마구간의 일부를 전시실로 바꿔서 말과 승마, 경마의 아름다움에 대한 소개를 하는 거다. '유럽 최대의 마구간'이라는데, 완전히 말들의 성이다. 18세기 초에 집주인이었던 콩데 공이 매일의 일과였던 사냥을 위해서 지었다고 한다. 지금도 훌륭한 말을 많이 기르고 있다. 거대한 경마장도 시즌마다 성황이라고 한다. 표를 끊고 들어가는 입구에 축사 냄새가 진동했는데 진짜 마구간이었다. 칸칸이 말들이 있었는데 모르긴 해도 진짜 좋은 말 같아 보였다. 경마 팬들에게 샹티이는 프랑스의 경마 수도였다. 경마 말고도 관광객들을 위해 말 타고 공연을 하는 둥근 공연장도 있다. 과거 프랑스 귀족들만의 사냥터가 이제 세계 누구나 올 수 있는 박물관, 승마 공연장, 경마장으로 바뀌었다.


말 냄새를 떨궈내며 거대한 경마장을 뒤로하고 차를 돌려 공항으로 향했다. 샹티이는 아직 한국 사람들에게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한국어로 검색하면 다녀간 사람들이 없지 않지만 인지도가 낮다. 잘 모르다가 마지막 날 예상치 못하게 기대 이상의 볼거리를 만나서 뿌듯하게 시간을 채웠다. 동시에 아쉬운 마음도 커졌다. 이렇게 숨어있거나 몰라서 지나친 수많은 볼거리들이 남아있는데 여행이 순식간에 지나간 느낌이 들어서다. 여기도 미리 알았다면 승마 공연이나 경마 스케줄을 알아보았을 것이다.


33일 동안 부모님과 함께 참 부지런히 다녔는데 여전히 여행은 부족한 듯 아쉽게 끝나고 있었다. 누구 하나 아프지도 않고 뭘 잃어버리는 사고도 없이 무사히 마친 것은 감사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었다. 거의 6시에 정확히 푸조 308을 반납하고 샤를 드골 공항에서 부모님을 배웅했다. 리스카로 7600km를 달리고 도시마다 체력이 다하도록 구경을 다닌 부모님과의 여행은 끝까지 시간 꽉 채워서 끝났다. 뭔가 대장정을 마치는 느낌과 동시에 아쉬움도 많아서 '다음에 한 번 더?'를 외쳐볼까 잠시 생각했으나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부모님은 한국까지 가는 긴 비행을 통해 여행을 마무리하실 것이다. 나는 리투아니아로 돌아가는 비행기가 다음 날 있어서 하루 머물러야 했다. 혼자 여행이 하루 추가되었다. 일단 33일어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오는 것 같아 숙소에 드러누웠다. 리스카와 부모님과 급히 이별하고, 갑자기 원래대로 혼자 두 다리로 여행하는 상황이 되었다. 차이를 극명하게 느껴볼 겸, 혼자 뒤풀이 겸, 다음 날 비행기 시간 전에 파리 시내를 다녀오기로 마음먹었다. 다시 나 홀로 뚜벅이로, 허전함이 클지 해방감이 클지, 어떤 소감이 크게 다가올지 스스로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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