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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리 Feb 27. 2019

세종시에서 혼자 다니는 주말여행을 시작하다

한국, 세종특별자치시

리투아니아 생활을 접고 한국에 돌아온 지 5개월이 좀 넘었다. 갑작스레 결정된 귀국으로 지난 9월부터 한국, 그것도 세종시에 집을 구했다. 다시 직장과 집을 왕복하는 생활이 시작됐다. 오랜만이라 새롭기도 하지만 여전하기도 한, 똑같은 시간도 더 빠르게 흐르는 한국 생활에 다시 적응했다. 세종으로 오면서 1인 가정으로 세대주가 되었다. 그걸 실감할 새도 없이 바쁘게 겨울이 지나갔다. 봄이 다가오면서 미세먼지도 더해가는 2월, 바쁜 생활이 다시 쳇바퀴처럼 갑갑하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한국에서도 해외 체류하던 때처럼 하루하루 흥미진진할 수는 없는 것일까? 조금이라도 그럴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세종시에 몇 년 살다가 서울로 옮겨간 친한 언니와 대화 중에 "세종시에 사는 동안은 여기서 남쪽 여행을 다녀야지~"라는 가벼운 조언이 스쳤다. 그러고 보면 서울에서 두 시간 남쪽으로 내려온 세종시는 남한 중남부 여행에 좋은 거점이다. 시간과 여유가 부족한 한국 생활, 짧은 나들이는 효과적인 응급처치다.


리투아니아에 있을 때는 주말마다, 또는 하루 이틀이라도 시간 날 때마다 열심히 돌아다녔다. 시간과 교통편이 허락하는 대로 갈 곳을 검색해서 순서를 정했다. 리투아니아 내에서 만만한 곳은 당일에 다녀오기도 하고, 버스나 기차, 저가항공으로 쉽게 갈 수 있는 다른 유럽 도시로 짧은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언제까지 머물지 모른다는 생각, 다시없을 기회라는 생각으로 더 많이 다니려는 조급함이 있었다. 어디를 가도 흥미롭고 구경에 재미가 쏠쏠했다. 한국은 '집'이라는 의식이 강해서 다 익숙할 것만 같고, 언제가 되든 돌아다닐 시간도 많은 것 같다. 그리 열심히 다니려는 의지가 나지 않는다. 안 가봤으면서 마치 다 아는 척, 좀처럼 호기심이 일지 않는다. 사실 한국도 항상 여행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갑자기 리투아니아에 갔던 것처럼 언제 떠나게 될지 알 수 없다. 새삼 '한국학' 교수로 강의를 했으면서도 한국 곳곳을 유럽 곳곳처럼 계획 세워가며 구경 다닌 적이 별로 없다는 걸 깨달았다. 서울에서 두 시간이나 남쪽으로 내려온 세종시에 살게 된 건 그걸 만회할 기회다. 이 주변부터 충청, 전라, 경상도 곳곳을 다녀보자는 마음을 먹었다.

작년 11월 가을날 세종시 호수공원. 몇 안 되는 '세종시 가볼만한 곳' 1순위다.

새 거주지인 세종시부터 일단 살펴봤는데, 여행지로서는 아직 영 아니다. 물론 '세종특별자치시'는 특이한 도시다. 그 특이함을 한 번 보러 올 만은 하다. 행정수도, 국가균형발전을 강조하며 아직도 조성 중인 신도시다. 주민 대부분 정부부처나 공공기관, 국책기관에 근무한다. 그 누구에게도 고향이 아니다. 첫인상은 개성공단 같았다. 모든 조형물이 새 것인 거대한 모델하우스로 보였다. 여기저기 건설현장이고 비포장 공터도 많다. 개성공단 같다고 했더니, 그래도 많이 나아져서 도시 모양을 갖춘 것이란다. 몇 년 전만 해도 허허벌판에 아파트 공사장만 보였다고 한다. 장기적인 도시 계획은 도넛 형의 '환상 복합도시'라는데, 그렇다면 아직 절반 정도의 부채꼴만 개발된 셈이다. 남은 도넛이 개발되면 산업과 문화가 공존하는 도시가 될지 모르겠다. 지금은 공무원만 살고 그들의 생존에 필요한 서비스업만 있는 모델 시티 느낌이다.


세종시에 이주를 시작한 지 6년이 넘었으니 정부청사 쪽은 상가도 제법 형성되었고 식당과 카페도 많아졌다. 그래도 아직 '도시'의 복작복작하고 다양한 면모는 찾기 어렵다. 게다가 내가 집을 구한 '3 생활권'은 가장 최근에 개발되어 입주를 시작한 금강 남쪽이다. 아파트에서 살기만 할 뿐 주말을 즐길 만한 장소나 시설은 찾기 어렵다. 물론 몇 개월 안돼서 잘 몰라서 그럴 수도 있다. 주민 대다수가 상대적으로 젊은 공무원이나 공공기관 직원이고 아이들이 어린 경우가 많다. 전국 대비 평균 연령이 낮고 어린이 비율이 높다. 그래서 어린이집, 유치원, 초중등학교, 병원 등의 시설이 빨리 들어섰다. 아이들을 키우는 젊은 부부가 살기에는 좋다고들 한다. 내가 그런 주민이 아니라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언젠가 날씨 좋은 휴일에 호수공원에 갔다가 깜짝 놀랐다. 그 공원 전체에 유모차나 텐트 없이, 남편이나 아이들 없이 혼자 걷는 여자는 나밖에 없는 것 같았다. 혼자 사는 젊은 직장인들은 주말마다 서울이나 다른 도시로 가는 거다. 1인 가정이 주말을 즐길 공간을 바라기는 무리다. 깔끔하고 안전하지만 그래서 다양성이 없다.

세종시 '3 생활권'에서 바라본 금강은 보행자 다리와 공원 조성이 한창이다.

즉, 세종시는 아직 여행지는 아니다. 주말에 나들이 모드로 채비를 마치면 세종시는 출발 거점일 뿐이다. 이 거점을 발판으로 어디를 갈 수 있나 알아보기 시작했다. 예상보다 훨씬 많은 정보가 쏟아졌다. 한국 곳곳을 즐기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고, 정부부터 민간까지 그걸 독려하는 분위기는 캠페인에 가까웠다. 단편적으로 쏟아지는 여행정보와 추천글에 따라다니기만 하기는 왠지 싫다. 내 여건에 맞추어서, 내가 즐기고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주제와 규칙을 정하고 싶었다. 왜 혼자 돌아다니느냐고 누가 물으면 이래서 다녀보기로 했다고 답할 이유가 필요했다. 거창하거나 심오할 필요는 없고 휴식과 자유로운 활동으로 하루 채우면서 약간의 배움이 곁들여지면 된다. 세종시를 거점으로 하는 나 홀로 한국 곳곳 주말 나들이, 생각해본 이유는 이러하다.


(1)  한국 여행도 해외여행처럼 흥미진진할 수 있을 것 같다.

해외여행을 갈 때는 가이드북을 사거나 웹서핑을 열심히 하면서 사전에 정보를 모은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생각이 확고해서 열심히 공부하고 다니는 편이다. 그런데 한국은 그렇게 다녀본 적이 별로 없다. 한국이라고 다를 리는 없다. 문제는 이미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해서 사전에 공부할 의욕이 안 난다는 것이다. 조금 성의를 가지고 찾아보면 흥미로운 배경 설명도 많고 더 잘 구경할 수 있는 정보가 많다.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시리즈를 뒤늦게 읽었다. 그런 전문적인 답사는 흉내조차 낼 수 없지만, 좀 알고 가면 많은 것이 보이리라는 점은 확실하다. 옛 문화재를 보는 안목은 없으니 고대와 중세 문화재는 감상과 휴식에 중점을 두면 될 것 같다. 그보다는 지금의 한국과 더 직접 연결되는 근현대의 흔적과 장소들을 좀 자세히 보고 싶다.


(2) 혼자 사는 데서 생기는 여유 시간을 보람차게 채울 수 있다.

남편도 아이도 없는 1인 가정이라면 주말은 오롯이 내 시간이다. 시간을 알차게 쓰는 데는 대단히 많은 방법이 있는데, 여행은 그중에서 매우 밀도 높은 방법 중 하나다. 일단 집을 떠나 낯선 곳으로 가면 순간마다 긴장이 생겨서 시간을 허투루 보낼 수가 없다. 다른 의미 있는 일이 생긴다면 그 일을 하겠지만, 딱히 없을 때는 누구에게 맞출 필요 없이 자유롭게 떠나서 스스로 의미를 찾고 밀도 높은 시간을 보내면 된다. 세종에 와서 몇 달 동안은 대부분 주말에 서울 부모님 댁에 갔다. 지금도 자주 가고 계속 그럴 거지만, 아무래도 부모님 댁에 가면 천상 딸내미가 되어서 그저 쉬고 먹고 자고 오게 된다. 적절한 간격으로 혼자만의 주말과 가족과의 주말을 조화시킬 방법을 찾아야 했다.


(3) 돈은 없고 자동차는 있다.

현실적이고 개인적인 요건이다. 여행비용이 충분하다면 주말에 해외여행이나 럭셔리 휴양시설도 갈 수 있다. 일본이나 중국, 동남아로 주말여행을 다녀오는 사람도 적지 않다. 직장을 다니고 있어도 주말에 자주 해외를 나갈 정도로 풍족하지는 않다. 짧은 주말에 해외여행은 비용 대비 너무 아깝고, 20대 체력도 아니라서 근무에 타격이 없을 수 없다. 국내 여행도 숙박을 할 경우 비용이 커진다. 숙소 대부분 2인실 이상인데 혼자 쓰니 더 아깝다. 한국도 여행 물가가 싼 나라는 아니다. 일단 숙식은 최소화해야 부담이 덜하다. 다행히 나에게는 자동차가 있다. 리투아니아에 있는 동안 팔아버릴까 고민했었는데 놔두기를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서울에서 단거리만 다니다가 세종에 온 지난 5개월 동안 갑자기 장거리를 뛰고 있는 내 아반떼다. 덕분에 자유로운 여행을 할 수 있다. 가능한 한 당일치기로 토요일에 다녀오고 일요일은 쉬는 부담 없는 패턴을 만들어보려 한다.


(4) 나만의 기록을 남기는 동기부여에는 여행이 제일 좋다. 

일기 취미를 잃어버린 지 오래되었다가, 리투아니아에서 일하고 살고 구경한 이야기를 끄적이기 시작했다. 이게 의외로 재미있는 일거리가 되었다. 하루하루 그냥 보내고 남는 것 없는 듯한 허무감을 미연에 방지하는 게 글로 남기는 일인 것 같다. 요즘 나오는 책들을 보면 아무 일이 없어도 생각들을 잘 써낸다. 나는 그런 창의성이나 용기는 부족하다. 명확한 대상이나 사건이 있어야 기록을 하는 수준이다. 제일 확실한 소재가 여행 기록이다. 여행 기록은 그 여행의 진정한 기념품이 된다. 유럽을 다니면서 그때마다 조금이라도 써두려고 노력을 했었다. 물론 너무 지치거나 바빠서 사진만 찍어두고 '사진 보면 다 생각나겠지'하고 묵혀둔 곳들도 있다. 좀 지나고 나니 많이 잊었고, 영영 뭔가 잃은 것처럼 아쉽다. 기록을 남기고 다시 보는 것과 사진만 보는 것은 너무 차이가 난다. 기록해둔 여행이 너무 좋아서, 기록을 하려고 여행을 마음먹은 측면도 있다. 기록하는 시간을 꼭 포함하려 한다. 일찍 출발해서 어디든 이른 시간을 잡아 구경을 하고, 오후 나절 몇 시간은 카페를 물색해서 쓰는 시간을 가지는 거다. 너무 구경을 많이 해서 지치는 것도 방지하고, 차분하게 쉬기도 하는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을 것 같다.


쓰고 보니 주말여행에 이유라 봤자 별 것 없다. 세종시에 혼자 심심하게 있기는 싫고, 혼자니까 비용 아끼고 다니면서, 그래도 의미와 여유를 찾는 호사를 누려보겠다는 얘기다. 조금 탐구적인 이유를 굳이 붙이자면, 한국에서 여자 혼자 다니면서 과연 해외에서 다니는 것처럼 부담 없이 즐길 수 있을까 경험해 보는 취지도 있다. 요즘 세계 어딜 가나 혼자 용감하게 여행 다니는 한국 사람들을 볼 수 있다. 해외에서는 그게 전혀 어색하지 않다. 그런데 유난히 한국에서는 왠지 혼자 관광지 입장하고, 혼자 밥 먹고, 혼자 숙박을 하면 좀 어색하다. 그게 여자 혼자라면 조금 더 어색하다. 혼자 영화 보는 사람도 늘었으니 홀로 다니는 관광도 늘어날 것 같기는 하다. '호캉스' 상품 중에 혼자 즐기는 것도 있으니 조금씩 트렌드가 바뀌고는 있다. 주말의 지방 여행도 그렇게 다니는 게 자연스럽게 수용이 되는지, 나는 그런 어색함을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 있는 사람인지도 알게 될 것이다.

세종시 남쪽으로 10분만 차를 몰면 갈 수 있는 '소소루' 카페에서 보이는 충청도 경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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