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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리 Feb 27. 2019

3.1 운동 100주년 맞이, 조용한 독립기념관

천안 독립기념관, 유관순 기념관과 생가

혼자 자동차로 주말 당일치기 여행을 하겠다는 계획은 별거 아닌 것 같아도 나름대로 용기를 낸 도전이다. 처음부터 먼 곳을 잡아 무리하면 쉽게 포기할 것 같아 세종시 주변부터 살폈다. 세종시 경계는 충청남도의 동쪽을 꽤 넓게 차지하고 있다. 행정구역상 남쪽으로 대전과 만나고, 동쪽은 충청북도 경계와 닿아 있다. 북쪽으로 길게 올라가 조치원이 전부 세종시인데, 그 위 이웃은 다름 아닌 천안시다. 혼자 운전해서 자유롭게 다니면서도 의미와 휴식을 다 누리겠다는 주말 나들이, 첫 행선지를 고민하다가 천안 독립기념관을 낙점했다. 마침 2월의 마지막 토요일이고, 다가오는 금요일이 3.1절이다. 보통 3.1절도 아닌 3.1 운동 100주년이 되는 2019년 3.1절이다. 어찌 보면 독립기념관은 이때가 대목이었다. 너무 시즌에 맞춰 찾아가는 게 아닌가 생각도 들었다. 동시에 이럴 때 좀 북적북적한 모습을 봐도 좋겠다 싶었다. 텅 비어 있으면 그것도 참 별로일 것 같아서다.


천안이라지만 독립기념관은 외곽의 목천에 자리 잡고 있다. 항상 독립기념관 이야기만 나오면 위치가 불만이었다. 이렇게 접근성이 안 좋은 곳에 지은 이유가 이해가 안 됐다. 국립박물관이나 전쟁기념관처럼 도심 속의 공원을 겸하면서 만들어도 좋았을 텐데, 여기는 천안시민이 아닌 한 작정하고 여행을 떠나야만 올 수 있다. 당시에 지역균형발전 개념이 강했던 것도 아닐 텐데 굳이 이곳에 지었을까. 물론 넓은 부지를 확보할 수 있었을 테고, 지척에 유관순 기념 사적지가 있어서 명분이 없지는 않다. 그래도 외진 곳에 조성해놓고 방문을 강요하는 느낌을 받는다. 1987년 광복절에 개관했을 때는 국가적으로 홍보가 대단했었다. 몇 달 뒤 1988년 양력 설날에 외가 친적들과 같이 와본 기억이 있다. 한복을 입은 채로 왔고 그날은 사람이 굉장히 많아서 줄도 섰던 것 같다. 어릴 때라 임시정부 요인 밀랍인형 군상이 무서웠고 고문실이 충격적이었던 기억만 난다. 그러고 나서는 한 번도 굳이 올 일이 없었다. 무려 31년 만에 방문할 작정을 한 거다.

겨레의 집은 거대한 건물이지만 멀리서 보면 뒤편의 산을 동산으로 삼은 기와집으로 보인다.

백 번째 3.1절 바로 전 주말이니 이벤트도 많고 사람도 꽤 많을 거라 짐작을 했다. 혼자 둘러보려면 호젓한 편이 나을 것 같아 사람이 덜한 오전을 택했다. 9시 30분 개장 시간에 맞추려다 10시 즈음 주차를 했다. 진입로는 매우 잘 되어 있고 주차장도 넓다. 맑고 따뜻한 날씨였지만 미세먼지 '최악'의 뿌연 공기 때문에 멀리 보이는 풍광은 또렷하지 않았다. 이런 한적한 곳조차 최악의 공기라니, 먼지로부터 독립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겨레의 집'까지 직선으로 뻗은 진입로를 걸었다. 진입로에서 만나는 '겨레의 탑'도 엄청나게 크고, '겨레의 집'도 기와집이라기엔 너무 거대하다. 그 안에 있는 '불굴의 한국인' 대리석상도 크다. 문득 초창기에 작품의 군상이 전부 나체여서 한국인 같지 않고 외설스럽다는 비판이 있었던 기억이 났다. 어릴 때 정말 커 보였는데, 지금 봐도 컸다. 주변이 한적해서 더 커 보인다. 대목을 맞은 주말임에도 오전은 매우 한적했다. 같이 진입 중인 몇 안 되는 관람객의 반 정도는 복무 중인 장병들이다. 알고 보니 장병들이 휴가 때 독립기념관을 방문하면 휴가를 하루 더 주는 제도가 운영 중이었다. 방문증 같은 걸 받고 전시관 곳곳마다 도장을 찍어서 완성해야 하는 모양이었다. 방문자 수를 늘리는 효과적인 방법이기는 하다. 군복을 입고 온 경우도 많고, 사복을 입고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온 경우도 눈에 띄었다.


겨레의 집 앞은 온통 공사 중이었다. 대형 가설무대를 설치하느라 분주해서 빙 돌아서 계단을 올라야 했다. 3.1절 전후로 기념행사가 있을 것이니 이해는 되었다. 그래도 이왕이면 관람객이 비교적 많이 오는 주말을 피하고 다음 주초에 설치하면 좋지 않을까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3.1절 100주년이라고 해서 특별한 추가 전시나 이벤트는 보이지 않았다. 당일 전후 기념행사가 있을 뿐인 듯했다. 기획전시관인 7관은 아예 셔터가 내려져 있었다. 3.1절 100주년, 임시정부 1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는 연초부터 전국적으로 정부나 지자체, 민간에서 다양하게 진행되고 있다. 대중문화도 좋은 소재로 삼아 작년부터 '미스터 선샤인' 드라마도 있었고 일제시대 배경 영화도 많다. 올해도 조선어학회 사건을 다룬 '말모이', 곧 개봉하는 '항거'(유관순 이야기), '자전차왕 엄복동' 같은 영화 홍보가 한창이다. 독립기념관은 그런 일제시대 이야기가 전부 모여있지만 특별한 이벤트 없이 조용했다. 심지어 3.1 운동을 중점적으로 다루는 3관은 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리모델링을 했는데, 3월 1일 기념행사를 기다렸다가 그때 재개관한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기념행사 때 테이프 끊는 이벤트를 하려고 둔 것 같다. 100주년이 당일만 해당되는 것도 아닌데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리 열어서 그전에 오는 관람객들도 보게 하고, 당일에 주요 인사들도 같이 관람하면 될 텐데.

1관은 고대부터 조선까지, 2관은 개화기와 국권 피탈, 무단 통치까지 전개가 빠르다. 모형으로 잘 꾸며놓았다.
어린 시절 충격이었던 고문실은 많이 축소, 완화되었다.

거대한 대리석상이 있는 겨레의 집을 지나면 뒤로 일곱 전시관과 어린이 영상관까지 여덟 개의 건물이 부채꼴로 둘러 서있다. 주차료 외에는 입장료가 없어서 여러 번 나누어 방문하면서 천천히 봐도 좋겠다. 물론 너무 멀다는 게 문제지만. 조성된 지 30년이 넘어 나무도 많이 자라고 공원이 갖추어져서 계절별로 소풍도 올만 했다. 닫혀있는 3관과 7관을 제외하고 다섯 개의 전시관을 순서대로 둘러보았다. 80년대 말부터 있었음직한 전시물도 있지만 대부분 업그레이드되었다. 1관은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쏜살같이 전개된다. 군사적인 승리나 외세의 침략에 대한 항쟁을 주로 다루면서 민족적 자부심을 강조하는 내용이다. 2관은 개항과 개화, 제국주의 침략, 일제시대 초기 10년의 험한 시절을 다룬다. 모형과 그림, 영상, 소리까지 다양하게 배치해서 화려하게 느껴질 정도다. 아이들과 학생들이 지루해하지 않도록 설명을 간소화하고 비주얼을 살린 노력이 보였다. 31년 전에 쇼킹하게 다가왔던 고문 재연 전시가 2관에 있다. 기억보다 내용이 적었는데 많이 축소(순화)된 듯했다. 벽을 들여다보면 고문 장면을 재연하는 마네킹들이 조금씩 움직이는 게 비슷하게 남아있지만 오래된 티가 났다.


3.1 운동을 다룬 3관의 굳게 닫힌 문을 아쉬워하며 건너 들어간 4관은 가장 현대적인 전시관이었다. 유물이나 설명이 아니라 이미지와 영상만 감상하는 '감성관'이라고 되어 있다. 큼직하게 구획을 잡아 글귀나 영상을 비추고 소리와 색깔을 이용한다. 물론 등장하는 글귀나 영상은 모두 투지와 결기가 가득한 내용이다. 그래도 험악한 이야기가 계속 나오는 전시를 계속 보는 중간에 쉬어 가는 페이지가 되었다. 5관은 주로 만주 등 해외의 대일 군사 항쟁, 폭탄 투척 등 의거, 탄압받은 사건들을 다루고, 6관은 독립운동의 중심이 되었던 모임과 단체를 설명한다. 한글 보존을 위한 조선어학회나 교육 운동, 스포츠, 예술 쪽의 활동은 전부 6관이다. 김구 선생과 임정의 활동이 비주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무서웠던 임정 요인들의 밀랍인형 군상은 조명과 컬러가 더 선명해졌다. 일일이 읽지는 않고 어떤 내용을 어떻게 다루는지 보면서 지나다 보니 다섯 개 관에 두 시간 정도 걸렸다. 6관 마지막은 순식간에 광복과 대한민국의 발전으로 마무리하는데 출구 부분은 하필 G20 정상회의(2010년)로 끝난다. 옛날에는 88 서울 올림픽으로 끝났을 텐데, 마지막 리모델링이 이명박 정부 때였던 모양이다.


관람하면서 5관과 6관 전시가 궁금했었다. 워낙 독립운동의 면면이 다양했고 지금도 성향에 따라 평가가 갈리기 때문이다. 독립투사들 개인의 이야기는 거의 없고 단체별 활동, 전투, 사건 위주로 간략하게 설명하느라 공들인 모습이다. 1920년대 이후로 피할 수 없었던 사상적인 분화와 대립은 최소한만 언급한다. 물론 민족주의 계열과 임시정부 활동이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만주와 연해주의 다양한 그룹과 단체도 언급은 되어 있다. 아주 작게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이라는 코너도 있긴 있어서 조금 놀랐다. 물론 사람 이름이나 구체적인 활동은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붙어 있는 사진 한 장은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의 젊은 유학시절 단체사진이라 누가 누군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사진에는 박헌영도 있다. 사실 독립운동 시절은 분단과 냉전 이전이고 사회주의 계열의 활동도 큰 부분이다. 언젠가 그에 대한 설명이 조화롭게 추가될 수 있을까?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다. 어쩌면 독립기념관이 접근성 떨어지는 외진 곳에 있는 덕분에 전시물에 대한 괜한 논쟁을 덜 겪는지도 모르겠다.

4관은 이미지와 영상 위주의 감성관, 5관은 해외 거사와 사건 위주의 투쟁사, 6관은 그룹과 단체별 활동을 다룬다.
6관 한 코너에 사회주의 계열도 살짝 나온다. 임시정부 요인 군상은 6관 후반부에 등장했다.
조선 총독부 철거 부재 전시 공원은 로마 유적 분위기가 난다.

나오면서 공원 남쪽에 있는 '조선총독부 철거 부재 전시 공원'에 들렀다. 1995년에 총독부 건물 철거 장면을 TV로 봤다. 더 어릴 때 그 건물이 국립박물관이었을 때는 무슨 궁전 같아서 좋아했던 기억도 있다. 총독부 건물도 당연히 문화재적 가치가 있었고 엄청 공들인 건물이었으니 아깝기도 하다. 그렇지만 지금도 그 자리에 경복궁 대신 이 건물이 있었다면 그것도 갑갑한 일이었을 거다. 청동과 유리조각이 남아있는 돔 꼭대기 부분을 중심으로 철거된 조각들을 가져다 놓았다. 사진만 잘 찍으면 여기가 이탈리아나 그리스라고 해도 믿을 것 같다. 자세히 보면 다르게 생겼지만 코린트식 비스름한 기둥머리나 대리석 박공 등 영락없이 그리스나 로마 신전 잔해다. 고대 유물 감상하듯 구경하고 나오다가 정문 앞 롯데리아에서 점심 요기를 하고 있자니 뭔가 안 어울리는 느낌이었다. 롯데리아에 갑자기 사람이 많다 싶었는데 점심 나절을 지나면서 부쩍 입장객이 늘어나고 있었다. 오전에 들르기를 잘한 거였다.


내친김에 지척에 있는 병천의 유관순 기념관을 내비에 찍었다. 병천은 순대 거리가 유명해서 그쪽은 붐비는 것 같았다. 아우내 장터를 지나 유관순 기념관으로 향하는 길은 여유로웠다. 추모각과 작은 기념관은 봉화대가 있는 산자락에 따로 조성한 것이다. 기념관에는 유 씨 집안 계보가 있었는데 상당수가 1919년 4월 1일의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 사상자 명단에 있다. 19세로 사망한 유관순 열사가 제일 유명하지만, 부모님도 그 날 사망했고 형제와 친척 중에도 죽거나 고초를 겪은 사람이 많았다. 온 집안과 마을 사람들이 같이 준비한 시위였던 거다. 유관순 추모각 옆으로 나머지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 사망자 추모각과 추모비가 새로 조성되어 있다. 지금까지도 새로 발견되는 기록이 계속 나와서 명단도 보완되고 설명이 바뀐다. 유관순 열사의 나이와 사망 일시, 아우내 장터 운동 발생 날짜도 최근 연간에 바뀌어서 추모비나 동상의 설명을 정정해 놓았다.

유관순 추모각과 그 옆에 조성한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 사망자 추모각, 추모비
유관순 기념관 근처 지경리의 유관순 생가와 교회

산 너머 지경리라는 마을에 유관순 생가도 있다. 생가 자체는 당연하게도 전형적인 초가집을 재현해 놓은 것이다. 마네킹으로 만세운동 준비 모습을 방 안에 꾸며 놓았다. 인상적인 것은 바로 옆의 교회였다. 목사 사택도 아닌데 동네 교회와 유관순 생가가 딱 붙어있다. 지금 교회는 80년대에 새로 지은 건물이지만 당시에도 유관순 집은 교회 옆집이었다. 그러고 보면 그 시절에 이 시골에서 서울의 이화학당까지 딸들을 유학 보낸 집안이다. 기독교가 일찍 뿌리내린 마을이고 유 씨 집안은 교회를 설립하고 운영하다시피 한 독실한 집이었다. 교회 지하에도 전시실이 있었다. 3.1 운동에 참가했다가 이화학당이 문을 닫아서 집으로 내려온 유관순은 여기서 가족, 친척과 마을 사람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준비했다. 동네에서 아우내 장터까지는 거리가 꽤 되는데 설마 그때 차가 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4월 1일 장날에 태극기 만든 걸 다 들고 온 가족과 마을 사람들이 함께 걸어갔을까? 그 날 부모님을 포함하여 결과적으로 19명 사망, 130명 부상이라는 기록을 남기고 가족과 마을이 풍비박산 났다. 19세의 어린 여학생이었던 유관순이 한국 독립운동의 상징이 된 데에는 이런 환경의 영향과 주위 사람들이 있었다.


아침부터 독립기념관, 이어서 유관순 기념관과 생가까지 부지런히 돌아보고 나니 오후 세 시쯤이다. 병천에서 세종으로 돌아오는 중간 즈음 발견한 카페에서 감상을 정리하며 한참 쉬었다. 토요일의 늦잠을 포기하는 것은 애석한 일이지만, 일찍 움직이니 한 걸음 빨리 구경을 시작할 수 있었다. 목적지가 어디든 가능하면 이른 개장 시간에 방문을 하고, 점심 전후로 주위를 좀 돌아보다가 늦은 오후는 카페 즐기기로 채우면 알맞은 나 홀로 주말 나들이가 될 것 같다. 최근에 자가용 운전자가 가기 좋게 호젓한 위치에 창고형 카페나 전망을 내세우는 카페들이 늘어나는 것은 너무 반가운 일이다. 오늘 오후를 쉬게 해 준 카페는 넘버 투웰브(No. 12)라는 곳이었다. 글램핑을 표방하는 캠핑장을 연계해서 운영하는 모던한 카페였는데, 바로 앞에 가기 전까지 도무지 카페가 나올 것 같지 않은 시골길을 가야 한다. 운영이 잘 되는 건지 궁금했지만 나로서는 이런 곳이 많아지길 바랄 뿐이다. 풀어야 할 과제는 식사였다. 병천 순대거리를 도전해볼까 했다가, 굳이 혼자 맛집을 찾아가며 붐비는 골목에 주차를 시도하기 꺼려져서 롯데리아로 해결을 했다. 꼭 노포나 맛집을 가야 좋은 여행이 되는 것은 아니니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지만, 조금 용기와 요령을 내볼 필요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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