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에 사용할 단 하나의 헤드폰
대부분의 운동 경기에는 체급이 나뉘어져 있습니다. 뛰어난 선수라도 본인과 체급차가 크게 나는 선수와의 대전에서 이기기는 건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일상 생활에서 물리적인 격차가 크게 나는 두 대상을 비교할 때에 흔히 체급이 맞지 않는다는 말을 사용하면서 비교할 필요가 없음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오늘 소개할 제품이 그렇습니다. 어느 누구와 비교하더라도 체급이 맞지 않습니다. 이어폰과 비교하는 것도, 그렇다고 헤드폰과 비교하기에도 딱 맞아 떨어지지 않습니다. 출시된 지 벌써 2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상황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오디지의 LCDi4 이야기입니다.
굳이 어느 하나에 끼워 맞추자면 저는 LCDi4를 이어폰보다는 헤드폰 계열에 두겠습니다. 이어폰에 놓기에는 반칙에 가까울 정도의 성능이니까요. 사실 여느 헤드폰들과 견주어도 뒤떨어진다는 느낌이 그리 들지 않습니다. 그러니 초대형 이어폰이라기보다는 초소형 헤드폰이라 부르렵니다. 아마도 오디지에서 후속 기기를 만들기 이전까지는 소리 면에서도 사이즈 면에서도 유일무이한 초소형 헤드폰 LCDi4, 느지막한 리뷰를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오디지 궁극의 역작 탄생
몇 년 전 동사의 iSINE20 리뷰를 진행한 적 있습니다. iSINE은 매번 어마어마한 무게를 자랑하는 평판형 헤드폰을 만들던 오디지에서 처음으로 내놓은 인이어 헤드폰입니다. 당시 처음 제품을 만졌을 때 뭐 이렇게 생긴 이어폰이 나왔나 싶었습니다. 어색함에서 불편함으로 이어지는 착용감에 한 번 놀랐고 소리를 들은 이후에는 이렇게 작은 녀석이 오디지다운 음색을 그대로 유지했다는 데에 다시 한 번 놀란 기억이 납니다.
평판형 방식이 가지는 특유의 음색에 거부감을 가지지 않는다면 iSINE만 하더라도 비슷한 가격대 이어폰과의 비교에서 우위를 점할 수준의 제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깨끗한 음선을 기반으로 한 중고역대 재생 능력이나 풍성하고 부드러운 저역은 iSINE20이 가지는 장점이었습니다. 다만 냉정하게 말해서 이어폰이라 부르기에는 너무나 거대한 사이즈와 조금은 불편한 착용감, 그리고 세미 오픈형 타입으로 외부에서의 사용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단점들을 뛰어넘을 만한 소리는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조용한 실내에서 사용할 용도라 하기에는 다른 헤드폰들과의 경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으니 자연스럽게 제품의 포지션이 애매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오디지에서 참신한 시도를 했구나 싶은 정도로 넘어가던 도중 등장한 제품이 바로 LCDi4입니다. 아마 저 외에 많은 분들이 제품의 네이밍에 적잖이 당황하셨을 겁니다. 생김새는 분명 iSINE과 유사한데 자사의 풀사이즈 헤드폰에 붙이는 ‘LCD’라는 명칭을 당당하게 이어 받은 것도 모자라 직전에 출시한 플래그십 LCD4를 그대로 계승한, 말 그대로 LCD4의 In-ear 버전으로 출시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제품 가격도 iSINE 제품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올라가 버렸습니다만, 어찌 되었든 어지간한 자신감 없이는 할 수 없는 라인업 배치였습니다.
자신감의 이유를 알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제품 출시 이후 LCDi4는 전세계 유명 웹진을 비롯한 수많은 리뷰어들에게 극찬을 받았고 각종 상들을 휩쓸었습니다. iSINE 때의 반응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 겁니다. 저 역시 호기심에 제품이 국내에 출시되자마자 청음샵으로 달려가 들어봤는데 모양만 비슷할 뿐 iSINE과는 전혀 다른 기기로 느껴지더군요. 오디지에서 이제야 진정 인이어 ‘헤드폰’이라는 단어가 어울릴 만한 제품을 만들어냈습니다.
오디지의 속사정을 정확히 알 순 없지만 제가 느끼기에 오디지는 LCDi4를 만들기 위해 오랜 기간 차근차근 준비를 해온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LCD 시리즈는 버전업이 진행되면서 페이저를 비롯하여 평판형 드라이버 구조가 점점 완성화되어갔고, 이와 함께 iSINE 시리즈를 개발하면서 소형화의 가능성을 엿보았습니다. 그리고 내부 구조와 소형화 모두 일정 수준 이상에 다달았다고 판단한 결과 야심차게 선보인 것이 바로 LCDi4라고 짐작한다면 너무 과장된 추측일까요? 적어도 LCDi4의 완성도 측면에서는 과언은 아닌 것 같습니다. LCD4를 통해 더욱 얇고 가벼워진 다이어프램과 강력해진 Fluxor 마그넷을 그대로 계승했고 iSINE의 기틀을 사용했지만 마그네슘 소재로 하우징을 제작하여 더욱 가볍지만 불필요한 진동을 줄인 멋들어진 제품을 세상에 선보였으니 말입니다.
이어폰과 비교하는 것은 반칙에 가깝다
이 모든 노력은 좋은 소리로 보답합니다. LCDi4의 소리를 이야기하기 전에 잠시 엔벨롭 그래프를 살펴볼까 합니다. 엔벨롭 그래프는 소리의 발생부터 소멸까지의 변화 과정을 어택(Attack), 디케이(Decay), 서스테인(Sustain), 릴리즈(Release)의 네 단계로 구분합니다. 음의 발생 이후 음압 레벨의 최대치까지 도달하는 시간(A), 최대 레벨에서 안정 구간으로 이어지는 시간(D), 안정 구간이 유지되는 시간(S), 음이 소멸하는 시간(R)으로 이에 따라 악기(및 오디오)의 음색이 결정된다고 합니다.
LCDi4는 빠르고 정확한 리듬감이 일품입니다. 보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빠르고 간결하게 치고 들어와서 은은하게 사라집니다. 군더더기 없는 타격감과 정확한 타이밍의 리듬감은 누가 들어도 LCDi4가 잘 만들어진 헤드폰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만드는 요소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택감이 두드러지게 강한 유형은 아닙니다. 원래 오디지 제품들이 강력한 타격감을 자랑하는 스타일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빠르지만 부드럽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아마도 짧은 어택과 디케이에 이어 상대적으로 길게 이어지는 릴리즈 구간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부드러움 속에서도 미세한 질감 표현이 살아있는 것 역시 이와 같은 이유일 것입니다.
제품을 청음하면서 들었던 여러 곡들 중 이것만큼은 꼭 들어보라고 추천하고 싶은 곡이 있습니다. 다프트펑크의 <Random Access Memories>에 수록된 ‘Giorgio By Moroder’입니다. 디스코의 전설 지오반니 조르지오의 나레이션으로 시작하는 이 곡은 나레이션이 끝난 뒤 본격적으로 신시사이저가 사용되는 지점부터 곡이 끝나는 순간까지 완벽에 가까운 곡 구성이란 것이 무엇인지 들려줍니다. 특히 곡 후반부에는 우측 채널에서 머릿속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듯한 느낌이 드는 멜로디가 등장하는데, LCDi4는 다른 이어폰에서는 절대로 느낄 수 없는 넓이의 스테이징과 입체적이지만 또렷한 정위감으로 곡의 매력을 독보적으로 끌어올립니다. 정확한 타이밍이 무엇인지, 깔끔하게 떨어지는 리듬감과 높은 해상력이 넓은 스테이징을 만났을 때 어느 정도의 음악적 쾌감을 전달할 수 있는지에 대한 모범 답안에 가깝습니다. <Random Access Memories>야 워낙 명반으로 유명한 앨범이니 많이들 들어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만 LCDi4로도 꼭 한번 다시 들어보시길 바랍니다.
30mm 직경의 거대 다이어프램이 만들어내기 때문인지 LCDi4의 표현력은 스케일이 굉장히 큽니다. iSINE과 동일한 직경임을 감안하면 비단 사이즈만의 덕은 아닐 것입니다. 청음하면서 독특한 재생 방식에 초점이 맞춰집니다. 보컬 등 중역대 소리는 노즐을 통해 귀에 전달되는 데에 비해 저역과 고역은 마치 귀 전체를 뒤덮는 듯한 느낌으로 재생된다는 점입니다. LCDi4의 거대한 공간감에 이러한 재생 특성이 단단히 한 몫 할 것입니다. 특히 풍만하지만 입자 고운 저역은 곡을 안정적으로 이끌어가는 데에 일조합니다. iSINE20과의 가장 큰 차이점이 이 부분입니다. 넓은 무대를 제대로 채워줄 만한 질 좋은 저역이 있고 없음으로 인해 청각상으로는 몇 단계 이상의 수준차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언제나 말하지만 오디오의 음질에 있어서 저역의 재생 능력이 차지하는 비중은 굉장히 큽니다. 저역이 든든하게 받쳐주면서도 다른 음역대로 침범하지 않아야만 소리 전체가 안정감있게 표현될 수 있습니다.
앞서 민첩한 어택 및 디케이를 언급하는 바람에 혹시나 오해하시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LCDi4는 전반적으로 풍성하며 부드러운 음선으로 재생하는 타입입니다. 조금은 따뜻한 성향의 밸런스가 좋은 음색이지만 간혹 곡을 듣다보면 특정 음역대에 묘한 음색이 느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가 들었을 때는 주로 보컬 파트에서 느껴졌는데 원래 조그마한 변화에도 민감하게 느껴지는 부분이라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보컬 위주로 감상하는 분들은 미리 이 부분을 체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LCDi4는 악기의 수가 많아질수록, 연주되는 공간이 넓어질수록 강점이 드러납니다. 이런 면에서는 대편성 오케스트라에 최적화된 헤드폰이라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궁합이 잘 맞는 장르가 바로 재즈입니다. 릴리즈 구간이 길게 잡힌 듯한 음색은 예를 들어 드럼 심벌 타격 후 소리의 확산을 자연스럽게 끌고 나갑니다. 고운 질감과 부드러운 울림이 더해져 곡에 윤기가 흐르는 고급진 소리이지만 고역의 뻥 뚫린 시원함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이 계절 헤드폰의 음질을 포기할 수 없다면
LCDi4는 만져볼수록, 들어볼수록 비싼 가격이 이해되는 헤드폰입니다. 특히나 본격적으로 더워지기 시작하는 요즘 헤드폰을 대신할 만한 제품으론 LCDi4가 거의 유일할 듯합니다. 이어폰으로는 도저히 느낄 수 없는 수준의 압도적인 공간감과 입체감을 요만한 제품이 들려준다는 것이 기특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다만 아쉬운 점도 분명합니다. 소리가 헤드폰을 닮은 것만큼 활용도 역시 헤드폰이 가지는 제약과 비슷합니다. 우선 세미 오픈형이라 하지만 오픈형으로 봐야 할 제품 디자인은 차음성이 제로입니다. 착용한 채로 음악 볼륨만 좀 줄인다면 의사소통에 아무런 무리가 없습니다. 따라서 아웃도어는 불가, LCDi4를 제대로 사용하려면 주변이 조용한 실내에서 들어야만 합니다. 다음으로 LCDi4를 울려줄 만한 든든한 조력자가 필요한 것도 부담이라면 부담일 수 있겠습니다. 여느 오디지 헤드폰들과 마찬가지로 LCDi4 역시 저역 재생 능력을 오롯이 발휘하려면 고출력의 앰프와 함께 듣는 것이 좋겠습니다.
실내 용도로 제한되는 점은 구조상 어쩔 수 없는 부분, 이 정도 가격대의 기기를 단지 스마트폰 직결로만 사용하려는 분이 몇이나 될까 싶으니 이 문제도 가볍게 넘어간다 하더라도 오디지에서 LCDi4의 후속기를 개발할 때 꼭 신경써줬으면 하는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착용감 개선입니다. LCDi4 대여 이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서 이제는 한 손으로도 제법 잘 착용하는 경지에 이르렀지만 여전히 이어 클립의 걸리적거리는 압박감으로 인한 불편함은 가시지 않았습니다. 이어폰의 전체적인 만듦새에 비하면 조금 조악한 편이 아닌가 싶습니다. 장기간 귀를 꽉 잡아주는 역할인 만큼 어느 정도 쿠션감이라든지 모양 변형을 통한 핏감 개선은 필수적으로 이루어져야할 부분입니다.
쉴 새 없이 신제품이 쏟아지는 가운데 여러모로 독보적인 위치를 유지하는 LCDi4가 다시 인기를 끌 만한 계절입니다. 이만 리뷰를 마치고 아쉽지만 LCDi4를 얼른 샵에 되돌려 놓을 테니 아직 들어보지 못한 분들은 청음해 보시길 바랍니다. 덧, 여러분의 목 건강은 소중하잖아요. 목 건강까지 지킬 수 있는 액정 사운드라니 이것만으로도 일단 매력 넘치지 않나요?
*이 글은 셰에라자드의 지원을 받아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