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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삼숙 Feb 12. 2020

나를 위로하기 위하여

나는 로펌 변호사다. 그래서 회의를 하거나 재판을 가는 시간 외에는 주로 검찰이나 법원에 제출할 서면을 쓴다.


드라마나 영화에서와는 달리 우리나라는 일반적으로 수사기관이나 재판에서 변호사들이 열변을 토하는 경우는 많지 않고, 대부분 서면 제출로 대신한다. 원고가 소장을 법원에 내면 피고는 원고의 소장에 대한 답변서를 제출하고, 원고는 또 그 답변서에 대한 답변을 '준비서면'이라는 제목으로 제출하고, 피고는 또 그 준비서면에 대한 답변을 준비서면으로 낸다. 재판에서는 제출한 서면 내용을 간략히 설명하고(이 마저도 하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다. 재판부가 "원고가 낸 서면, 피고가 낸 서면은 오늘 진술한 것으로 합니다" 라고 하고 다음 기일로 속행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더 하고 싶은 말은 다음 서면으로 낸다.


아무튼 요지는 나는 평소에 거의 매일 무엇인가를 아주 지긋지긋하게 지겹도록 계속해서 쓰고 있다는 것이다. 의뢰인을 위하여.  

지겹도록 써대는 서면 안에는 의뢰인이 소송에서 주장하고자 하는 바가 담기게 되는데, 법리싸움이 주된 쟁점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의뢰인이 하고 싶어 하는 말을 소송에 적합하게 정제된 형태로 작성한다.


작년에 며느리가 치매 걸린 시어머니의 유일한 재산인 아파트를 증여받은 사건이 있었다. 나중에 이를 알게 된 딸이 의뢰하여 며느리를 상대로 아파트의 명의를 돌려놓으라는 취지의 소를 제기한 적이 있는데, 딸이 올케한테 하고 싶었던 모든 말들 "나쁜년, 네 년이 인간이냐" 등등의 말을 살짝 바꾸어 "피고는 원고가 치매 질환을 앓고 있음을 이용하여 원고의 유일한 재산인 부동산을 탈취하여 갔는바, 원고가 이를 회복하여 정신적,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상황에서 남은 노후를 치료활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부디 원고의 청구를 인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소송서류에 적합한 방식으로 작성하는 것이다.


의뢰인, 즉 치매 걸린 어머니의 딸은 판결이 선고되기 전이었음에도 '변호사님이 쓴 서면만 읽어 보아도 속이 후련하다, 감사하다'라고 고마워 했다. 아마도 글이란 것은 하고 싶었던 말을 하면서 그간의 힘들었던 감정을 배출시키는 그런 묘한 힘이 있는 것 같다(결국 이 사건은 우리가 승소했다).

이렇게 나는 매일 남들의 싸움을 대신하여 글을 쓰면서, 그들의 울분 배출의 창구이자 대리인으로서의 삶을 살고 있다. 그런데 정작 나를 위한 글을 쓰거나(아, 물론 나 자신이 소송에 휘말리고 싶다는 얘기는 절대 아니다) 내 얘기를 써본 적은 한 번도 없다. 그 치유의 힘을 잘 알면서도 말이다.

먼 훗날 인생을 되돌아 봤을 때 손에 꼽을 만큼의 힘든 일을 작년에 몰아서 겪었다. 한동안 시체처럼 누워만 있었다. 차츰 정신이 들면서 가까운 사람들에게 나의 고통에 대해서 한탄을 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갑자기 글을 써보는게 어떨까 생각이 들었다. 그간의 나의 경험과 감정, 그리고 생각들을 정리하고, 원인을 분석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해보기도 하고. 그냥 내 얘기를 좀 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오로지 나를 위한 글을 써보기로 했다. 그 누구를 대신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나를 위해서. 초안을 보내서 컨펌을 받을 필요도 없고, 의뢰인의 눈치가 보여 써야 할 말을 못쓰거나 불필요한 말을 써야 할 일도 없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를 쓴 Elizabeth Gilbert는 자기 자신을 위로하기 위하여 쓴 글이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게 되었다고 했다. 이 글들이 언젠간 40대, 50대의 나에게 위로가 되기를 바라며 , 나아가 나와 비슷한 처지의 이들에게 위로가 되기를 바라며 시작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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