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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삼숙 Mar 16. 2020

결혼소식처럼 이혼소식도 널리 알려주세요

이혼을 하고 난감했던 것 중 하나는 (그들 입장에서 당연한 일이지만) 사람들이 내가 결혼한 것을 전제로 대화를 한다는 것이었다.


"변호사님, 오랜만이네요. 신혼 재미는 좀 어때요?"

"내년에 유학 가는 건 남편도 같이 가나?"

"자네, 신혼집이 어디라고 했지?"


처음에는 '이혼'이라는 단어를 내 입 밖으로 꺼내는 것 자체가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아서, 또 웃으며 내 안부를 물어 주는 상대를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억지 웃음을 지으며 멀쩡하게 잘 사는 것처럼 거짓말을 하곤 했다.


"네, 신혼재미 좋아요^^"

“사정이 있어서 저 혼자 가요^^"

“신혼집은 OOO동 입니다^^"


그러나 내 솔직한 성격에 반하는 이런 가식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그가 싫었던 만큼 그와 결혼 중에 있다고 더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그와 1도 결부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아, 모르셨구나, 저 이혼했어요 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누가 되었건 상대는 언제나 급 당황하였고,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나에게는 이를 수습하기 위한 메뉴얼까지 생겼다.


[회식 중]

파트너 변호사 : (본인의 와이프가 음식 솜씨가 없다며 한참을 흉을 본 후) 너는 집에서 요리 좀 하니? 아니면 남편이 하나?

나 : 아, 변호사님들 모르셨죠? 저 이혼했어요 ^^ (일동 정지 및 동공 지진) 네, 다들 이런 반응이신데요 이제 몇 달 지나서 저 진짜 괜찮아요 ^^ (이때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활짝 웃는 것이 중요하다).

파트너 변호사 : 어...그래... 미안하다... 그래 뭐 인생은 길고 안 맞으면 뭐 할 수 없지 (횡설수설) ...


그들은 대체 뭐가 미안하다는 것인지 난 아직도 잘 모르겠다. 사람들은 내가 고백을 하면 다들 미안하다고 하면서 자기 지인도 이혼을 했는데 지금은 너무나 잘 산다거나 넌 그래도 애가 없어서 다행이라는 등 애써 위로의 말을 찾아 건넨다. 그 와중에 그들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고 있노라면 오히려 내가 미안해질 지경이었다(불편하게 해서 미안합니다ㅜㅜ).  특히 본의 아니게 몇 번의 청첩 모임과 결혼식에서 나는 폭탄선언을 하게 되었는데, 갑자기 대화의 주인공이 내가 되어 버리는 바람에 난감했고(난 그저 묻는 말에 대답했을 뿐인데ㅜㅜ), 남의 잔칫집에 재 뿌리는 느낌이라 죄스러운 마음까지 들었다.


그런데 나는 이런 일을 수십번, 수백번 반복해야 했고, 그건 앞으로도 상당 기간 계속될 것이었다. 나는 큰 맘 먹고 A에게 말하면, A가 절친인 B에게 전달하여 어느 정도 나의 수고를 덜어줄 것이라 생각했는데, 사람들은 생각보다 남 일에 관심이 없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오랜만에 누군가와 마주치는 것 자체가 꺼려지게 되었다. 회사 엘레베이터에서 다른 층에 근무하는 변호사를 몇 달 만에 마주친다거나 결혼식에서 대학 또는 연수원 동기들을 몇 년 만에 보게 되면, 나는 혹시나 그들이 나의 근황을 묻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불편한 마음으로 대화를 나누다가 얼른 도망가기 일쑤였다. 우리 동네 풍년슈퍼 사장님이 연 집 근처 순댓국집을 참 좋아했는데, 왜 혼자 왔는지 물어 볼까봐 거기도 못 가고 있다(간이 이 정도로 맛있는 집이 잘 없는데...코로나19 사태를 핑계 삼아 마스크를 쓰고 일단 입장한 후 벽을 보고 먹고 나올까도 생각해 봤다). 정말 피곤한 일이었다.




문득 연예인, 재벌, 정치인 이런 유명인들이 부러워졌다. 그들은 언론에서 알아서 전국 방방곡곡에 그들의 이혼소식을 전해주지 않나. 나처럼 굳이 한 명 한 명에게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지는 그 식은 땀 흐르는 상황을 견뎌가며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고, 남들은 자연스럽게 그들을 배려해 줄텐데. 나는 대체 언제까지 이 귀찮고 불편한 근황토크 및 단골집 피해 다니기를 계속해야 하는걸까. 회사 전체메일로 “안녕하세요? 저 18층에 근무하는 누군데요. 저 이혼했으니 참고 부탁 드립니다.” 라고 알릴 수도 없고, 카톡 프로필에 “나 최근 이혼” 이렇게 써 놓기도 그렇고.


그러던 중 우연찮게 회식자리에서 한 셀럽을 만나게 되었다. 우리 로펌에서 이혼소송을 진행한 분이었는데, 나는 사건을 함께 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우연히 초대 받아 참석하게 되었다. 대한민국을 떠들썩 하게 했던 그의 이혼소식을 나도 기사를 통해 접했었고, 시기적으로 나와 비슷했다. 그는 쏟아지는 언론보도가 자신을 평소에 얼마나 괴롭게 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였는데, 나는 술이 좀 들어간 김에 용기를 내어 초면에 묻지도 않은 나의 근황을 고백한 후 말을 이어 갔다.


“전 사실 언론기사 보면서 OO님이 항상 부러웠어요.”

“(어이 없다는 듯) 네? 제가요? 대체 왜요?”

“이혼했다는 걸 언론에서 전국민한테 다 알려주잖아요. 저는요 수도 없는 사람들한테 제가 하나 하나 다 말해야 해요. 웃으며 저의 안부를 물어 주는 사람들한테요. 그게 정말 힘든 일이더라구요.”


그는 깜짝 놀라며 자기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정말 그럴 수 있겠다고 끄덕였다. 그리고는 덧붙였다. 몇 달 전에 어머니와 함께 TV를 보고 있었는데, 우연히 전처가 등장하는 바람에 어머니가 속상해 하셨고, 그걸 본 자신도 마음이 너무 아팠다고.


아, 그럴 수 있겠구나. 나에게는 수백명한테 몇 년에 걸쳐 말해야 하는 수고스러움이 있지만 앞으로 두 번 다시 그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되는 다행스러움이 있는 반면, 그는 하루만에 전국 및 해외 동포들에게 이혼소식이 알려져 만인의 배려를 받을 수는 있겠지만 전처를 우연히 보게 될 위험을 늘 안고 살아야 한다. 어쩌면 평생. 그것도 편안하게 집에서 TV보며 뒹굴대는 꿀 같은 휴식 시간에. 역시 신은 공평하다.




결혼식을 하면 청첩장을 돌리고, 카톡 프로필을 웨딩사진으로 하고 날짜와 시간까지 구체적으로 공개한다. 회사에도 공지가 돈다. 변호사들은 법률신문에 결혼 알림기사를 내보내기도 한다. 또 사람들은 누가 돌아가셔도 신문 부고란이나 문자를 통해서 알린다.


이혼도 좀 이런 문화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결혼식이나 장례식처럼 특정한 날에 식이 거행되는 것은 아니지만 어차피 시간의 문제이지 어떠한 방식으로든 알려지게 될 텐데. 본인이 직접 하기 좀 그렇다면 부고처럼 지인들이라도 대신 해주면 좋을 것 같다.


미국의 심리학자인 토머스 홈스 박사와 리처드 라히 박사는 사람의 스트레스 지수를 분석한 적이 있다고 한다. 100점 만점에 배우자 사망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100점, 이혼 73점, 구속 63점, 본인의 상해 53점, 해고 47점, 결혼 중 배우자 가족과의 갈등 29점.


이혼한 것 자체만으로도 감방에 가는 것보다, 회사에서 짤리는 것보다 더 큰 스트레스를 받는다는데 ‘알림' 정도는 누가 대신 좀, 가능하다면 한 번에 해주면 좋지 않을까. 그렇다면 스트레스 지수가 조금은 낮아질 수 있을텐데. 제 소식을 아는 여러분, 널리 널리 알려주세요. 뭐, 이미 좀 늦은 것 같긴 하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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