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삼숙 May 06. 2020

결혼은 후회해도 이혼을 후회하는 사람은 없다

이혼 후 지인들에게 일일이 내 근황을 알려야 하는 것 만큼이나 처음 만나게 된 사람들에게 이혼경력을 알리는 것도 참 피곤한 일이었다. 아니, 피곤한 일이다(현재 진행형). 그 전까지는 신경을 안쓰고 살아서 잘 몰랐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업무상이든 사적으로 만난 사이이든 간에 상대의 결혼 여부가 늘 궁금한 모양이다.


처음에는 "결혼은 하셨나요?"라는 질문에 어떻게 답을 해야 할지 정말 난감했다.


이 질문을 처음 받게 된 것은 어떤 재판이 끝나고 난 후였다. 그 사건의 의뢰인은 형사재판의 피고인이었고, 구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재판이 끝난 후 교도관을 따라 구치소로 돌아갔다. 나는 방청을 왔던 의뢰인의 처와 법정 밖에서 잠시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변호사님은 아직 어리신 것 같은데, 벌써 이렇게 자리도 잘 잡으시고 대단하세요. 아직 결혼도 안하셨죠? 우리 애들도 변호사님처럼 공부도 잘하고 훌륭하게 자랐으면 좋겠어요. 변호사님 부모님이 참 부럽네요."


네, 저 공부 잘한 거는 솔직히 맞는데, 이제 어리지도 않고 무엇보다 최근에 이혼까지 해서 훌륭과는 거리가 멀어요. 그래서 굳이 우리 부모님을 부러워 하실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라고 말씀 드리고 싶었지만, 잠시 망설이다가 그냥 "네, 감사해요."라고 짧게 답했다. 처음 만난 사람인데  TMI인 것 같았고, 감사인사를 하고 있는 그분께 민망함을 안겨드리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회사로 복귀하는 차 안에서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왜 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걸까. 이게 숨겨야 할 만큼 부끄러운 일인 건가. 나는 타인을 배려한답시고 내 기분을 배려하지 못했다. 앞으로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




이혼한 부부의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 <연애시대>를 다시 보게 되었다. <연애시대>는 10여년 전 티비에서 본 이후 따로 다운을 받거나 검색을 한 적이 없는데 갑자기 유튜브에 자동추천으로 떴다. 유튜브가 내가 이혼을 한 걸 어떻게 알고 갑자기 이혼 드라마를 추천한 걸까 잠시 소름끼치게 무서웠는데, 생각해보니 몇 달 전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에 제대로 입덕하여 윤세리 동무를 폭풍 검색했던 것 때문인 것 같다(약간 삼천포로 빠지는 감이 있는데 그래서 내 브런치 필명도 최삼숙이 되었다. 윤세리 동무, 즉 손예진이 극중에서 사용한 가명이 최삼숙이다).


<연애시대> 초반부에 어린 시절 친구였던 손예진과 오윤아가 성인이 되어 재회를 하고 서로의 근황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오윤아 : 결혼은?
손예진 : (활짝 웃으며) 했었어 한번.
오윤아 : 나도 이제 그렇게 말해야겠다. 구구절절 귀찮았는데. 나도 했었어 한 번.


오 이거 괜찮은데? 깔끔하고 담백하다. 게다가 뭔가 쿨해 보여. 나도 다음부터는 이렇게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드라마와는 달랐다. 결혼은 하셨냐는 질문에 내 나름 최선을 다해 밝게 웃으며 "네, 전 했었어요. 한 번 ^^" 이렇게 답을 하였는데, 상대는 백이면 백 "괜한 얘기 꺼내서 미안합니다."라고 하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리고 급작스럽게 화제가 전환되었다.


내 말주변이나 표정연기가 예진언니에 미치지 못해서 였을까 아니면 그냥 픽션과 현실의 차이인 것이었을까. 드라마처럼 쿨하게 받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상대방이 너무 당황하니까 나도 덩달아 당황하게 되면서 할 말을 잃게 되고 결국 불편한 침묵이 흐르기 일쑤였다.


화가 나기도 했다. 대체 뭐가, 왜 미안하다는 거냐고 되묻고 싶었고, 이렇게 감당하지 못할 거면 앞으로 이런 질문 어디가서 다시는 하지 말라고 쏘아 붙이고 싶었다. 하지만 이렇게 성질이 더러우니까 이혼했다고 생각할까봐 실행에 옮기진 못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슬펐다. 상대방이 저런 표정을 지을 만큼 내가 불쌍해 보이는 걸까. 자격지심이겠지만 그들의 난감한 표정을 보고 있노라면 나 스스로가 몹시 불운하고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안타깝고 불행하며 가엽고도 처연한 그리고 외로운 비련의 여인네가 된 것만 같은 그런 초라한 기분이 들었다. 진정 이번 생은 망한 것인가 하는 생각에 사로 잡힐 때도 있었다. 핵인싸까지는 아니었지만 항상 적당한 인싸로 살아온 내가 처음으로 아싸의 입장에서 느껴보는 인싸들의 시선이었다.




그런데 사실은 이혼이 곧 불행과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괴로웠던 시간은 이혼을 결정하기 까지의 시간들과 행정적인 서류처리 과정 그리고 그 직후이고, 그 시간이 지나면 오히려 평안에 이르게 된다. 결혼 못함에 대한 공포감이 완전히 사라졌고 혼자만의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된 후 주어진 시간이기에 그런지 결혼 전보다도 행복도가 상승했다(요즘 같은 심심함이 눈물나게 그리웠다).


더 이상 구구절절 설명하자니 구차해 보일 것 같고, 사회에서 당연시되는 것이 행복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뻔한 얘기로 밖에 설명할 수가 없는데, 삶이란 설명될 수 없고 다만 경험될 뿐이므로 이젠 그러려니 한다.


예전 직장 동기였던 언니와 몇년만에 통화를 하게 되었다.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언니는 결혼생활에 대해 물어 왔다. 잠시 망설이다가 얘기했다.


“언니, 모르셨죠. 저 작년에 이혼했어요."


언니는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야, 나도!!!! 뭔진 모르겠지만 자~~~알 했어!!"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깔깔대고 웃었다. 구체적인 사정까지는 서로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서로가 행복해지기 위하여 용감한 결단을 내렸고 지금 후회 없이 행복하다는 것을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최근 3일만에 정주행한 일본 드라마 <최고의 이혼>(왓챠플레이에서 볼 수 있습니다)에서 남편과 이혼한 유카는 자신을 좋아하는 준노스케와 식사를 하던 중 망설이다가 자신이 이혼했음을 밝히는데, 이를 받아주는 준노스케의 대사가 압권이다.


(유카가 주문한 맛없는 낫또 파스타를 준노스케가 가져가서 대신 먹고 있다)
유카 : 나 최근에 이혼했어.
(유카는 준노스케가 대신 먹어주고 있는 파스타를 다시 가져오려고 하는데 준노스케는 내어 주지 않는다)
유카 : 뭐야 동정하는거야?
준노스케 : 야냐. 너는 이제 행복해질 일만 남은 거네.
유카 : 뭐?
준노스케 : 결혼도 이혼도 행복해지려고 하는 거잖아.


맞는 말이다. 결혼도 이혼도 행복해지려고 하는 거다. 나는 지금까지 결혼을 후회하는 사람은 많이 봤어도 이혼한 걸 후회하는 사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이건 나를 포함해서 하는 말이다. 이 말인 즉슨, (내 주변 표본집단이 너무 적어서 성급한 일반화일 수도 있겠지만) 결혼해서 행복할 확률보다 이혼해서 행복할 확률이 훨씬 더 높다는 것이다.


그러니 무경험자들이여, 유경험자가 유경험자라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더라도 걱정하거나 동정하지 말지어다. 그냥 기쁜 마음으로 그들의 새로운 시작을 축하해주면 된다. 이제 행복해질 일만 남았으므로. 물론 유경험이 고강도의 고통을 수반했던 것은 맞겠지만 처음 본 당신에게 커밍아웃을 할 정도라면 투병기간은 이미 한참 전에 지났다는 것이다. 그러니 당신의 뒤늦은 애도는 이제 필요없다.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문유석 판사님은 저서 '쾌락독서'에서 자신은 사회에서 인간관계로 인하여 피로할 때 '걸리버 여행기'를 떠올린다고 했다. 자신이 소인국 릴리퍼트에 표류한 걸리버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저 많은 소인들이 뭐라뭐라 지지배배 짹짹거리며 자기들끼리 나를 놓고 찧고 까불고 있는데, 난 어차피 여기 속하지 않으니까 그건 어차피 그들의 문제일 뿐 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이들끼리 왕이니 대장이니 자신이 보기엔 소꿉놀이 같은 구분짓기를 하며 그들만의 소인국에서 경쟁하고 싸우고 있는데 그냥 내버려 두자는 거다. 어차피 내가 속하지도 않은 남의 나라에서 이들에게 인정 받으면 뭐할거고 미움을 받으면 또 어떻겠나. 하물며 '소인국 역사'에 이름을 남기려고 용을 쓴다는 건 또 무슨 짓이겠냐는 것이다.


어차피 무경험자들이 유경험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고 그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건 그냥 냅두자. 그들에게 내가 온전히 잘 살고 있다는 것을 인정받아 무엇하겠는가. 어차피 나는 무경험자들의 세계에 속하지도 않는데.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말든 내 문제가 아니다.


아직도 나는 "결혼은 하셨나요?" 질문에 대하여 쿨한 태도로 팩트를 알려주되 너무 가볍지는 않은, 그리고 너무 진지하지는 않으면서도 격이 떨어지지 않을 만한 대사가 무엇일까 고민에 빠져있다. 그래서 만나는 이혼남녀들을 상대로 "결혼은 하셨나요?" 질문에 뭐라고 답하는지 사례를 수집 중이다. 굳이 말하지 않거나 이혼했다고 답하고 불편한 분위기를 감내한다는 답변이 다수였는데, 인상 깊었던 답변이 하나 있었다.


그는 "저 갔다 왔는데요?"라고 답하고 나서 상대방의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을 보는 걸 즐긴다고 했다. 본인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초조 불안에 떠는 상대방의 모습이 웃긴다나. 소인국 사람들을 관전하는 걸리버의 마음이 바로 이런 것일까. 나도 다음 번부터 써 먹어 보련다. 관중은 소인국의 무경험자들이 아니라 나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다. 세련된 대사 찾기는 이제 그만해도 될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혼 후에 오는 것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