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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삼숙 Feb 12. 2020

변호사도 셀프 이혼은 힘들다

사건을 하다 보면 복잡한 사실관계를 정리해야 하고, 찾아도 잘 나오지 않는 적절한 법리와 판례, 때로는 논문을 어떻게든 발굴해야 하고, 그러다 보면 써야 할 서면은 쌓여가고, 이러한 부담감을 잘 극복하고 일목요연하게 논리적으로 서면을 잘 정리하여 검사와 판사를 설득해야 하고... 이런 것들이 참 힘들다.


하지만 가장 힘든 것은 의뢰인을 대하는 것이다. 새벽이고 밤이고 갑자기 전화를 해서 이미 몇 번이나 설명한 내용을 수차례 다시 물어보면서 걱정을 늘어 놓거나 결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솔직히 얘기해 달라고 계속 물어보아 난감하게 하기도 한다(특히 예상되는 결과가 부정적일 때 매우 난처하다). 구치소에 구속되어 있는 의뢰인은 접견을 자주 와주지 않는다고 않는다고 화를 내는가 하면 예상되는 형량을 솔직하게 말해주었더니 내 앞에서 2시간 동안 펑펑 우는 경우도 있었다.


솔직히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큰 일을 겪는거니까 그렇겠지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무리 그래도 이 시간에 전화를 해서 물어 볼 정도로 그렇게 급한 일인가. 그것도 내가 수십번은 설명해 드린건데. 왜 이렇게 똑같은 질문을 반복하는 것일까. 아무리 송사에 휘말렸다고 해도 그렇지 생업도 있는 분이 하루종일 이 생각만 하나. 사회적으로 이렇게 지위도 있는 사람이 자기보다 훨씬 어린 내 앞에서 이렇게 무너지다니 원래 멘탈이 약한 사람인가. 멘탈이 약한데 어떻게 저기까지 올라 갔지.


그런데 겪어보니 송사란 원래 그런 것이더라. 수년간 재판을 직업으로 해온 나도 나의 일이 되니 그들과 똑같이 무너졌다. 그리고 깨달았다. 절망에 빠진 의뢰인들을 대하는 것이 힘들었던 것은 내가 그들을 머리로만 이해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내가 그들을 대신하였던 싸움(재판)은 그들이 겪어 내고 있는 거대한 전쟁통 중 일부 전투에 불과하였다. 법정 밖에서도 그들은 나름의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비공식적인 전투들은 더 길고 견디기 어려웠다.




주말 새벽 트렁크 몇개에 급한 대로 짐을 챙겨 부모님 댁으로 돌아온 후 이틀밤을 꼬박 새고 출근을 했다. 오전에는 서울서부지방법원, 오후에는 의정부지방법원에 재판이 있었다. 하나는 제약회사한테 리베이트를 받은 의사 선생님 사건, 또 하나는 검찰의 위법한 압수수색을 이유로 무죄를 다투는 환경사건. 법정에서 멍하니 앉아 재판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는데 갑자기 헛웃음이 났다. 내 꼴 좀 보라지. 내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는게 무슨 남의 인생을 돕겠다고. 그렇게 3일을 꾸역 꾸역 출근해서 재판도 나가고 회의에도 참석하고 서면도 썼다. 메일을 몇 개나 잘못 보냈고(심지어 의뢰인한테), 만성 두통으로 어디에도 집중을 할 수 없었다. 한번은 동료들과 육개장을 먹다가, 한번은 상사와 면담 도중에 눈물이 터졌다.


목요일 아침, 신혼집에서 계속 살고 있는 그에게서 '빨리 짐을 빼라'라는 메시지가 도착했다. 급한대로 휴가를 내고 트렁크 몇개를 끌고 그 집으로 갔다. 먼저 곳곳에 걸려 있던 결혼사진들을 액자에서 꺼낸 후 박박 찢어서 종량제 봉투에 담았다(그대로 지내고 있었던 그가 참 놀라웠고, 그 종량제 봉투 안에서 그날 아침에 먹고 나간 것으로 추정되는 보약 봉투를 발견하고 이 와중에도 건강식품을 챙겨먹을 정신이 있다는게 또 한번 놀라웠다).


그리고 업체를 불러서 TV, 소파, 냉장고, 스타일러, 침대 등 부모님이 해주신 모든 가전과 가구를 다 버렸다(아, 신속하고도 편리한 대한민국의 서비스. 그날 불렀는데도 바로 온다). 아깝긴 했지만 다시 가져오고 싶지 않았고, 아깝고 자시고를 계산할만한 정신상태도 아니었다. 내 옷과 책, 그리고 화분 이렇게만 작은 용달차에 싣고 돌아왔다. 짧은 결혼생활 동안 내가 얻은 건 고무나무 화분과 아이스톤 화분 뿐이었다. 나머지는 내가 가져 갔던 그대로 다시 가져온 거니까. 엄마랑 둘이 아파트 주차장에 서서 친정집으로 떠나는 용달차의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하늘이 정말 맑고 파랬다. 지금도 그날의 공기가 생생히 기억날 정도로.


이왕 이번 주 말아 먹은(?) 거 이번 주에 다 끝내자는 마음으로 다음 날도 휴가를 내고 법원에 이혼조정신청서를 접수하기로 했다. 나도 가사소송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서 전날 동기한테 받아 놓은 이혼조정신청서 양식을 참고해서 작성했다.


조정신청서에는 신청인과 피신청인, 즉 나와 상대방의 가족관계증명서, 혼인관계증명서 등의 서류가 첨부되어야 하는데, 정확히 무슨 서류가 필요한지, 몇 통이 필요한지, 동사무소 아니면 구청 어디에서 떼어야 하는지 교과서도 찾아보고, 동기들 몇 명에게 더블체크도 해보고, 인터넷 검색도 다시 해 봤다. 원래 이런 거구나. 이렇게 몇 번씩 확인하고 싶은 거구나. 마음이 불안해서 그런 것인지 혹시 내 눈이 잘못된 것은 아닌가 계속 의심이 들었다.


예전 방식으로 종이소송으로 접수하기로 하고(요즘은 공인인증서만 있으면 대한민국 국민 누구나 전자소송으로 재판이 가능하다. 즉, 인터넷 접수가 가능하다. 나는 법무법인(로펌) 소속이라 전자소송 아이디가 법무법인 소속 변호사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별도의 개인 명의의 아이디를 발급받아야 했는데, 도저히 그걸 등록할 수 있는 정신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아날로그적 방식을 택했다) 작성해 둔 조정신청서를 들고 가정법원으로 갔다. 동기들이나 선후배들, 사법연수원 교수님들, 같은 회사 변호사들이나 송무 직원들...... 법원에서 마주칠 가능성이 있는 수 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고, 피차 당황스런 그런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 9시에 법원 문 열 때 맞춰서 갔다. 엄마가 굳이 같이 가시겠다고 해서 함께 갔다. 이제 서른 조금 넘은 딸이 제 손으로 쓴 이혼조정신청서를 들고 가 법원에 낸다는데 옆에 서 있기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아침 일찍 신청서는 접수되었다. 늙은 엄마를 옆에 세워 두고 이혼조정신청서를 접수하는 딸의 마음이란. 다시는 느껴보고 싶지 않은 감정이었다.


문제는 이 때부터 시작이었다. 사건 배당은 언제 되는지, 담당 판사는 누구인지, 서류 송달은 잘 되고 있는지 궁금했고, 상대방이 일부러 송달을 안 받을까봐 걱정도 되었다(조정신청서를 제출하면 법원에서는 그걸 복사해서 상대방에게 보내는데, 상대방에게 송달이 되어야 재판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나의 일과는 '대법원 나의사건검색' 사이트에 들어가는 것으로 시작되었고, 썸남의 연락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한 시간에 한 번 꼴로 사이트에 들어가 업데이트 내역이 있는지 확인했다. 대법원 나의사건검색 사이트는 대법원에서 운영하고 있는 사건 검색 사이트로, 사건번호와 당사자 이름을 입력하면 서류의 접수 및 송달상황, 다음 기일이 언제로 지정되었는지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재판부 실무관이 손으로 입력을 하기 때문에 입력시각을 예측할 수 없고 그래서 로펌에서는 담당비서가 매일 이 사이트를 확인하여 관여 변호사들에게 회람한다. 썸남의 연락처럼 재판 진행상황 업데이트도 내 맘처럼 되지 않았다.


결국 나는 절친한 사법연수원 동기를 변호인으로 선임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그 일에 매몰되어 도저히 내 생활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아직 금전적인 문제 등이 정리되지 않아서 그와 연락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는데, 그 때마다 정신적 데미지를 심하게 입게 되어서 나를 대신해 줄 제3자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변호인 선임계를 내고 전자소송으로 변환하여 진행하자 송달이 신속하게 이루어졌고, 빨리 종결해야만 하는 여러 가지 사정을 소명하면서 기일도 빨리 잡아 달라고 요청하였다. 결국 신혼집을 나온지 37일 만에 이혼조정이 성립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정말 진상 의뢰인이었다.

 "기일지정신청서 냈어? 근데 왜 판사가 기일을 빨리 안 잡는 걸까?"

"걔가 송달을 일부러 안 받는거 아닐까?"

"내 인생은 왜 이럴까. 난 정말 너무 억울해 ㅠㅠㅠ 나 앞으로 잘 살 수 있을까? 걱정이야 ㅠㅠ"

"걔가 조정기일에 안 나오면 어떡하지? 연락해서 꼭 나오라고 좀 말해주면 안돼?"

"조정기일에 그날로 끝날 수 있을까? 갑자기 이혼 안 해준다고 하면 어떡하지?"


매일 전화와 카카오톡으로 동기를 괴롭혔다. 시간은 중요치 않았다. 그때가 몇시인지, 지금 연락해도 되는 상황인건지 생각할 여유도, 이성도 없었다. 그나마 오랜 친구였기에 그도 참았을 것이다. 나도 아직까지 이 정도 급의 진상 의뢰인은 본 적이 없다(친구야 미안해...).




나는 직업상 언제나 치열한 분쟁의 소용돌이 그 한가운데 있어 왔다. 네가 죽지 않으면 내가 죽을 수밖에 없어서 죽기 살기로 싸우는 사람들. 그래서 웬만큼 충격적인 사안이 아니고서는 더 이상 놀랍지도 않았고 나 스스로도 이런 일에 점점 무뎌진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런 일을 겪는다면 너무나 차분하고도 이성적으로 깔끔하게 해결할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베테랑 변호사니까(아, 부끄럽다). 그런데 아니었다. 지금까지 나는 머리로 다툼을 이해하였을 뿐 마음으로 그 다툼의 의미를 헤아려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서면 밖에서, 법정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는 무관심했고 알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왜 항상 나는 경험하지 않고서는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 지금까지 나의 무관심에 상처받았을 그들에게 미안했다.


모든 일은 결국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힘든 일도 겪는 순간에는 나쁜 일이었지만 지나고 나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운명의 장난이란 항상 양면적이다. 나쁜 쪽으로 가다가도 금방 '아, 그것이 그렇게 나쁜 건 아니었군' 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좋은 일이 생긴다. 누구나 각자의 힘들었던 순간을 돌이켜보면 공감할 것이다. 나는 아직은 이혼이 계기가 되어 '좋은 일'이라고 명명할 만한 일까지는 생기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내 인생에서 손꼽을 그 사건을 통해 나를 돌아보았고 아마도 평생을 할 내 직업과 고객들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이젠 나도 불안 초조 분노에 휩싸인 의뢰인들의 손을 잡고 진심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얼마나 답답하고 괴로우세요. 저도 직접 해보니까 알겠더라구요. 소송 그거 사람 할 짓이 못되더이다." 진심은 통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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