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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삼숙 Dec 24. 2022

소시오패스 남친은 처음이라

“우리 이제 결혼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하지 않아? 나도 그렇지만 오빠도 나이도 많잖아“


나는 몇 달간 고민하고 망설이다 어렵게 말을 꺼냈다. 그는 나이 많다는 말에 불쾌해하며 (44살 미혼이 그럼 어린건지) 생각해 보겠다고 하였고, “어휴 잔소리”라고 혼잣말을 하면서 일어섰다.


예상과 다른 반응에 나는 마음이 편치 않았고, 다음날부터 갑자기 그에게 연락이 잘 되지 않기 시작하면서 하루에 오만번씩 휴대폰을 확인하고 오만가지 상상을 하게 되는 대환장각 지옥의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일주일 후 그는 비혼주의를 선언하며 내가 부담스러워더 이상 함께 하고 싶지 않고 각자의 길을 가는게 맞다고 놀라울 정도로 차분하게 말했다(남 얘기 하는 줄). 할말을 마친 그는 일어섰고, 붙잡는 나에게 시계를 보더니 지금 약속이 있어서 가야한다고 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시간을 때우고 자리를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는지 그는 지난 날에 대한 소회를 읊기 시작했다.


“사실 동종업계 선호하지 않는데 너 정도면 괜찮았어. 불만 없었어“ (어따 대고 평가질이세요)

“결국 포르쉐는 못받았네” (그는 농담으로 항상 포르쉐를 사달라고 했었다)


그렇게 그는 떠났다. 이별의 마지막 순간에 들은 단어가 포르쉐라니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안 될 노릇이었다. 나는 너무 경황이 없어서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건지 혼란스러웠고, 곧바로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 차를 끌고 기름을 넣으러 근처 주유소로 갔다. 일단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날부터 난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하여 노력했다. 이미 결혼 적령기는 지났고 돈 잘 벌고 자유로운데 결혼 안하고 싶을 것 같긴 했다. 근데 왜 2년이나 지나서 말한건지, 왜 평소에 결혼을 전제한 이야기를 했던 건지. 일주일간 잠수 타면 내가 초죽음이 될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는지. 2년 된 여친에게 술 마시러 가다가 잠깐 들러 이별을 고한다는건 그에게 난 어떤 의미였다는 것인지. 룰루 랄라 놀러 가던 길에 잠시 들른 경유지였다는 것까지 굳이 알려 줄 필요가 있었는지. 마지막까지 소름끼치도록 냉정하고 차분했던 그의 태도는 그동안의 그의 무감정을 반증하는 것 아닌지. 생각할수록 혼란만 가중되었다.


본래 생각이란 하면 할수록 부정적인 방향으로 강화되는 법이다. 여러가지 의문들은 정리되지 않은 채 상대에 대한 분노로, 나 자신에 대한 자책으로 이어졌다.


주말 저녁 몇 시간 외에는 시간을 내지 않고(BTS보다 바쁘심), 친구나 동료를 보여준 적도 없으며, 과거 이야기를 극도로 꺼렸고(간첩이세요?) 그의 존재를 나의 지인이 알게 되자 피곤하게 남들에게 알려질 필요가 있냐며 헤어졌다고 말하고 오라던 사람(간첩 맞는듯).


오늘 약속은 누구냐는 질문에 “고객”, “지인” 이상의 정보는 공유하지 않았고(간첩 확실함), 나 걱정도 안되냐는 투정에 걱정할 거리를 만들어 놓고 걱정 안해준다는건 무슨 심보냐며 나 같은 답정너 스타일은 문제가 있다던 사람(프로 가스라이터).


노잼 범생이로 살아온 나에게 뭘 그렇게 안 해본게 많냐며 핀잔을 주곤 했고(돌이켜보니 잔잔하고 예상 가능한 내가 그는 지루했던 것 같다), 내가 연인으로서의 소소한 서운함을 토로하면 나처럼 연애를 적당히 해본 애들이 문제라고, 아예 안 해봤으면 다 이런 줄 알거고, 많이 해봤으면 경험이 많아서 그러려니 할텐데, 나처럼 적당히 해 본 애들은 자기의 과거 연애 경험만이 정상인 줄 알고 그걸 벗어나면 문제인줄 안다던 사람(여자 경험 많은게 자랑이다).


그동안의 싸했던 몇 장면들이 스쳐지나 가면서 (역시 싸함은 싸이언스) 바쁘니까, 무뚝뚝한 성격이라 그렇겠지, 중년의 아저씨들은 이렇게 연애하는 거겠지 애써 선해하고 합리화했던 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분노와 자책이 무한 반복되었다. 무슨 대단한 사랑을 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 힘들다는게 어이가 없었다. 단 1분도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도 있었고, 숨이 안 쉬어지기도, 머리에 열이 차오르기도, 식은땀이 나기도 했다. 친구들을 만나 부어라 마셔도 보고, 죽어라 달리기도 해보았지만 그때 뿐이었다. 생각할수록 별로인 그 때문에 고통받는다는게 믿을 수 없을 만큼 끔찍했고, 여전히 그에게 무가치한 에너지와 시간을 이렇게나 많이 쓰고 있는 나 자신이 한심했다. 결국 나는 붕괴되었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많이 아픈 상태였다.




상당 기간 앓다가 파김치가 된 상태로 찾아간 전문가 아저씨는 내 얘기를 듣고 말했다.


“상대에 대한 예의나 존중이 없는 이별이라 누구라도 기억에 각인되고 잔상이 오래 남아 곱씹을 만한 상황이었네요.“


내가 약해 빠진게 아니었구나. 누구라도 힘들 만한 상황이었구나. 전문가가 인증해주니 위로가 되었다. 뻔한 얘기지만 시간이 지나면 분명히 괜찮아진다는 말에 마음이 놓였다. 앞으로 나아질 일만 남았다.




소시오패스에 대한 글을 읽게 되었다. 헤어진 연인에 대한 뒷담화나 찌질한 정신승리로 보일 수 밖에 없다는 걸 알지만 책을 통해 그 사람이 소시오패스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정말이다. 심지어 그의 MBTI도 소시오패스의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는 ESTP였다(MBTI 과몰입러 인정합니다).


*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는 능력이 보통 사람에 비해 훨씬 뛰어나다. 매우 감정적인 사건을 맞닥뜨려도 흥분하지 않으며 냉정함과 차분함을 유지한다.


* 늘 자극을 추구하고 쉽게 지루함을 느끼기 때문에 새롭고 위험한 것에 흥미를 보인다.


* 아무리 감정에 호소해 봐야 이들은 실질적으로 취할 이득이 없다면 매우 차갑게 돌변한다.


* 잘못을 지적하면 반성하기보다 되레 변명하고 핑계 대며 때로는 지적하는 상대방을 비난한다.


* 자신이 어떻게 해야 매력적으로 보이는지 잘 알기 때문에 인기가 많은 사람일 수 있다.  


* 자신의 과거에 대해 거짓말을 했을 확률이 높기 때문에 과거와 연관된 사람을 전혀 보여 주지 않는다. 어린 시절 환경에 의해 소시오패스가 되는 만큼 부모, 형제와 극도로 사이가 나쁠 가능성이 높다.


* 타인에게 진심인 적이 없기 때문에 태도가 자주 돌변하고 짧은 시간 동안에는 타인에게 잘할 수 있겠지만 오랜 시간 그렇게 하지는 못한다.



흔들리지 않는 그의 강한 멘탈과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것, 그리고 워커홀릭 성향을 나는 어른스러운 매력으로 느꼈는데, 사실은 감정이 거세되고 돈과 성공만이 인생 최고의 가치인 괴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가 만나는 사람들은 고객, 잠재적 고객, 사내 네트워킹이 대부분이었고 모두 그의 이익에 부합하는 관계들이었다(그는 내가 친구들을 만날 때 쓸데없는 시간과 돈을 쓴다고 비난하곤 했다).


그에게 나란 존재는 남는 시간을 덜 지루하게 보낼 수 있다는 면에서 효용가치가 있었고, (구체적으로 말하긴 어렵지만) 시간과 비용적인 면에서 가성비가 좋았기 때문에 만남을 유지했다고 생각된다. 불만 없고 괜찮은 정도였을 뿐인데, 자기 인생에 좀더 깊이 들어오려고 하니 급 피곤해졌을 것이고, 쓸모를 다하였다고 판단했기에 곧바로 손절하지 않았을까 싶다.


내가 내일 죽는다고 해도 그는 내 장례식에도 오지 않을 것 같다고 사귀는 중에도 항상 생각했었다. 이미 죽었고, 앞으로는 볼일이 없기 때문에. 효율성은 그가 항상 입에 달고 사는 그의 인생 모토였다. 그에게서는 일정 수준 이상의 애착을 느끼기 힘들었다. 강인한 멘탈, 추진력, 남자다움, 외모와 능력 등 내가 씌워 놓은 이상형 프레임에 갇혀 있었던 나는 이상한 정황들을 느끼면서도 애써 외면했다.




그는 나에게 사랑과 결혼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음에도 자신의 쓸모를 위해 오랜시간 외면했고, 나의 고통 따윈 안중에도 없이 내팽개치고 간, 인격에 반사회성 장애가 있는 병자였다.


그도 나름의 사정이 있었겠지, 이제라도 놓아준게 어디야 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고,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그의 말과 행동들을 이해해 보고자 노력하느라 몇 달간 병이 들어 버렸다. 그는 그냥 소시오패스 개새끼였던 것인데. 사정을 헤아려주는 것도 그에게는 사치였다. 배려도 받을 자격이 있는 자에게 해야 한다.


그의 정체를 온전히 이해하고 나니 지금까지의 모든 의문점들이 말끔하게 해소가 되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경험 이상의 것을 이해하기는 어려운바, 정상인이 병증의 발현을 이해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잠시나마 결혼을 상상했고, 끝끝내 헤어질 결심을 하지 못하고 이별을 당하였다는게 부끄러웠다. 이별이 처음은 아니지만 소시오패스 남친은 처음이라 호되게 아팠나보다.


나의 사랑과 연애는 대체 언제쯤 안정을 찾을 수 있는 것인지, 운명은 존재하긴 하는 것인지 참 답답하고 속상하다. 하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좋은 사람을 보는 눈이 탑재됐다면(부디 그래야 할텐데 나 자신아) 의미가 있는 좋은 경험이었고, 술과 담배에 쩔은 늙은 놈 병수발 하다가 과부될 팔자를 면했으니 이번에도 종국적으로는 나는 운이 좋았음이 분명하다.


안타깝게도 난 마음의 크기가 태평양 보다는 간장 종지에 더 가깝다. 그래서 한동안 나의 일상을 테러했던 전 연인에게 쿨하고 멋진 굿바이는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다. 그러한 연유로 현대 의학으로 절대 복구 불가능한 수준으로 조만간 그의 머리숱이 절반 이하로 줄기를(이미 시작되긴 하였지만 좀더 가속화 되기를), 불현듯 자신이 장가 못간 별 볼일 없는 늙은 노친네에 불과하다는 주제 파악을 하고 인생 마지막 로또를 놓쳤다는 걸 깨닫고 불행해지기를, 성에 차는 여자는 앞으로 다시는 만날 수 없기를 간절히 기원해본다. 폼생폼사인 그는 아마 죽는게 나을 것이다. 그 모습을 잠시 상상해 보았는데, 오늘부터는 두 다리 쭉 뻗고 마음 편히 잘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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