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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삼숙 Apr 04. 2020

언니가 이혼해서 미안해

지금까지 살면서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건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감사한 건 내동생을 내동생으로 낳아 준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이런 마음이었던 건 아니었다.


나는 사촌들과 터울이 최소 10살 이상 될 정도로 양가에서 오랜만에 태어난 아이였고, 그 덕분에 온 집안 사람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그런데 4살 무렵 예상치 못한 경쟁자가 등장했다. 팬들이 모두 새로운 스타에 열광하자 속이 상했던 나는 몹시도 동생을 괴롭혔다. 유치원 때 엄마는 여자애니까 제발 얼굴은 할퀴지 말라고 부탁을 했다. 3년간 외동딸로 자라 질투심을 컨트롤 할 수 없었던 나는 동생에게 온갖 신경질과 화를 자주 내곤 했는데, 이상하게도 동생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나에게 반격을 한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맨날 분풀이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동생 돌보기는 소꿉놀이 느낌이라 내 취미생활이 되었다. 부모님이 집을 비우시면 나는 엄마로 빙의하여 동생에게 아침을 먹이고 수건을 티셔츠 목 부분에 끼운 후 세수를 시켜줬다. 마지막에 코에 손을 대고 "코 흥 해"라고 해서 코를 풀리는 것이 우리의 루틴이었다. 옷을 입히고 머리를 빗어준 다음 손을 잡고 집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유치원에 데려다 주고 뿌듯하게 집으로 돌아올 때면 나는 내가 이미 어른이 된 것만 같았다. 가끔씩 수영장에 놀러가면 나는 동생을 안고 물 안에서 걸어 다니곤 했는데(부력 덕분에 할 만하다), 위험한 물 안에서 이 아이를 내가 보호해주고 있다는 느낌, 그 보호자의 느낌이 난 참 좋았다. 넌 언니 없었으면 이 험한 세상을 어찌 살 뻔 했니.


3살 차이인 우리는 초등학교 외에는 같이 학교를 다닌 적이 없었다. 어릴 땐 1살 차이도 엄청 나게 크게 느껴지는데, 3살 차이, 그러니까 초등학생과 중학생은 거의 겸상도 못할 수준이었다. 나는 동생을 그저 어린애 보듯 하며 자랐다. 그러다가 내가 고등학생 때, 동생이 중학생 때 우연히 밤늦게까지 대화를 하게 되었는데 그 때 그 꼬맹이와 말이 너무나 잘 통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 후 나는 겸상을 허락하였고 우린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나는 한 부모에게서 태어나 경험할 수 있는 우애 중에서 '자매애'가 단연 최고라고 생각한다. 오빠나 남동생이 없지만 단언할 수 있다. 자매로 살아볼 수 있다는 건 한마디로 특권이다. 자매는 핏줄로 이어진 절친이고, 일순위 여행 메이트이며, 망설임 없이 각종 셔틀을 시킬 수 있는 구매대행이자 필터링 없는 수다 상대이다. 그리고 어떠한 상황이 와도 영원할 내편이다.


어릴 때 그만 좀 괴롭히라고 혼을 내던 엄마는 언젠가부터는 둘다 그만 수다 떨고 자라고 잔소리를 하게 되었다. 우리는 재수 없는 친구에 대한 욕, 남자친구 얘기, 다이어트 꿀팁, 과에서 훈훈한 오빠들 사진, 숱한 가십들, 가끔은 부모님 흉보기(죄송합니다), 진로 고민 등 각자의 삶의 거의 모든 부분을 공유하면서 살아 왔다. 서로의 옷과 신발도 마찬가지였다.


우린 같은 엄마 밥을 먹고 자라서 그런가 식성도 비슷한데, 특히 늦은 밤 밥 숟가락으로 퍼 먹던 베스킨라빈스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우리 말고는 아직까지 앉은 자리에서 밥 숟가락으로 한 통을 다 클리어 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였다. 이 말은 우리가 느꼈던 그 급의 행복감을 그 어떤 베스킨라빈스를 통해서도 다시 느낄 수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함께 먹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무엇을 먹느냐 보다 중요하다.


슬플 때 위로해줄 수 있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다. 사촌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픈데, 친구가 좋은 일이 있을 때 내 일처럼 기뻐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우리는 기쁜 일이건 슬픈 일이건 자신의 일처럼 함께 했다. 내가 시험이 끝난 후 동생은 나와 여행을 다니다가 들른 프랑스의 한 성당에서 “우리 언니 꼭 사법시험 붙게 해주세요” 라고 방명록을 쓰고 촛불을 켰고, 내가 합격했을 때 자기 일처럼 자랑스러워 했다.


내가 결혼을 고민할 때 자기가 결혼하는 것처럼 같이 고민했고(돌이켜보면 본인의 결혼보다 더 고민해 준 것도 같다), 내가 결혼을 할 때에는 드디어 우리 언니가 길었던 고민과 방황을 끝내고 안정을 찾는다며 뛸듯이 기뻐했다.


나쁜 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구남친이랑 헤어지고 사경을 헤맬 때 그 새끼 어디선가 만나면 잡아 족친다, 언젠가 복수한다고 이를 갈았고 그가 고자가 되기를 간절히 기원했다(우리의 기도가 실현 되었는지 이따금씩 궁금하다). 또한 내가 이혼했을 때 그 애가 느끼는 분노와 안타까움은 태평양 건너 이곳에서까지 온전히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우리는 잠시 함께 열폭했지만 심도 깊은 논의 끝에 저주를 퍼부을 가치 조차 없다고 결론 내렸다.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내가 기뻐해주고 슬퍼해준 것보다 동생이 해준 것이 훨씬 많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동생은 어릴 때부터 무던한 애였고, 감정이 널을 뛰고 징징대는건 주로 나였다. 어쩌면 어릴 때부터 내가 동생을 돌본 것이 아니라 동생이 나를 돌본 건지도 모르겠다.


내가 밥 먹이고 세수 시켜서 데려다 주고 의기양양하게 돌아온 유치원에서 알고보니 내동생은 기도(문지기)였다. 그 유치원에서 가장 핫한 장난감들이 몰려 있는 구역을 점거하고 맘에 드는 애들만 선별적으로 입장시켜 주는... 유치원 일진이라고나 할까. 같은 반 아이 엄마가 우리 엄마한테 항의를 하여 알게 되었다.


내가 보호한다고 안고 다녔던 수영장에서 그애는 결국 월등한 수영실력을 자랑하며 가장 높은 선수반까지 수강하였다. 사실 물에 빠지면 동생이 나를 구해야 할 판이었다.


어릴 때부터 숫기 없는 나를 대신해서 내동생은 참 많은 걸 대신 해주었다. 슈퍼에서 뭐 있냐고 물어봐주고, 여행지에서 길을 물어봐주고. 예전부터 이렇게 우리의 역할은 바뀌어 있었다. 어쩌면 원래 언니는 너였는데 삼신 할머니가 순번을 착각 하였는지, 급한 내 성질 때문인지 내가 먼저 잘못 나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짐을 싸서 집으로 돌아온 날은 내동생의 결혼식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때였다. 그 정신 없는 와중에도 엄마는 나에게 신신 당부했다.


 “네 동생 결혼식까지는 너 입 다물고 가만히 있어. 너 언니로서 그 정도는 니가 해줘야 하는거야. 무슨 말인지 알지?”


엄마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나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좋은 소식을 전하면서 나쁜 소식까지 전할 수는 없었다. 결혼식의 주인공은 내동생이어야 했다.


그리고 내동생의 예비 시댁에서 예비 며느리의 언니가 이혼한 것을 가지고 흠을 잡으면 어떡하지 걱정도 되었다. 내동생은 정말 일등 신부감인데. 착하고 올바르고 씩씩하고 배려심 있고. 그런 애가 나 때문에 흠을 잡힌다고 생각하니 참담했다.


동생은 일 때문에 미국에 살고 있었고, 결혼식만 한국에 잠깐 들어와서 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내가 돌아온 걸 보지 못했다. 하지만 나와 엄마는 그리 능숙한 거짓말쟁이가 못 되었고, 내동생은 뭔가 이상하다는 걸 직감했지만 우리가 말할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일주일 정도 지나 주말에 연락을 했다.


“내가 너무 미안해. 니 결혼식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니 시댁에서 이상하게 생각할까봐 걱정도 되고.”

“아니야 언니. 내가 오히려 같이 못 있어줘서 미안해. 엄마가 해주지 못하는 그런 것들이 있을텐데. 그리고 시댁은 신경쓰지마. 이 일로 나를 이상하게 보는 사람들이라면 나도 결혼하고 싶지 않아.”


2주 후 동생은 결혼식을 위해 귀국했다. 우리는 밤늦게까지 못다한 얘기를 했다.


“언니, (인스타 사진을 보여주며) 내 친구 얘도 이혼했는데 지금 연애도 잘하고 엄청 잘 살아. 지금 남친이 결혼하자고 난리야. 아, 그리고 또 다른 내친구 언니도 언니랑 비슷한 이유로 이혼했는데 지금 진짜 잘 산대.”


쪼끄만게 자기가 수집할 수 있는 최대한의 성공적인 이혼 사례를 이것 저것 열거하면서 언니도 금방 괜찮아 질거라고 나를 위로했다. 결혼준비도 바빴을 텐데 언제 저런 리서치까지 해 온 것일까.


결혼준비로 한창 들떠 있어야 할 우리집 분위기는 나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나마 내가 야근이 많아 집에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 한 달이 나는 정말 너무 힘들었다. 나는 항상 자랑하고 싶은 딸이자 언니였는데 이렇게 애써 숨기고픈 딸이 되는 경험은, 그리고 민폐 끼치는 언니가 되는 경험은 생애 처음이었다.


그런데 또 지금와서 다시 생각해보면 이혼 직후의 가장 힘들었던 시기를 나는 동생의 결혼이라는 행사를 겪으며 정신없이 흘려 보낼 수 있었던 것도 같다. 나는 참 운이 좋았다.


그 주 화요일에 이혼조정이 성립되어 나는 행정적으로도 다시 싱글이 되었고, 내동생은 그주 토요일에 결혼식을 올렸다. 한주에 딸 하나가 이혼해서 돌아오고, 딸 하나는 시집을 보내야 하는 부모님의 심정이란 어떤 것일까. 나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날 사무실에서 동생한테 편지를 썼다. 축복만 받아도 모자랄 이 시간에 나 때문에 마음껏 기뻐하지도 못하고 너무 미안하다고. 내가 내 남자 보는 눈은 없지만 남의 남자는 잘 보는데(이건 진짜임) 제부는 좋은 사람인 것 같으니 너는 분명히 행복할 거라고. 질질 짜며 쓴 그 편지를 결혼식 전날 동생의 트렁크에 넣어 두었다.


그리고 또 그날 나는 동생을 회사 근처 네일샵으로 불러서 웨딩 네일을 해주고, 좋은 레스토랑에서 밥을 사주었다(웨딩 다이어트 때문에 샐러드가 다였지만). 그게 염치 없게 이 타이밍에 이혼한 언니가 결혼을 앞둔 동생에게 해 줄 수 있는 전부였다.


결혼식 날 엄마와 나 그리고 신랑 어머니가 한 곳에서 헤어, 메이크업을 받게 되었다. 그곳에서 처음 만난 신랑 어머니는 나에게 웃으며 아들이 내동생이 그렇게 착하다고 하던데 정말 그러냐고 물으셨다. 근데 정말 뜬금없이 갑자기 울컥하면서 나는 목이 메었고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무슨 이런 경우 없는 애가 있나 싶으셨을 것이다.


‘맞아요, 그렇게 착한 애. 저랑은 전혀 달라요. 그러니까 제가 이혼했다고 해서 제 동생도 이상한게 절대 아니에요.’


나는 이 말이 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갑자기 눈물이 차올라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당시에 나는 종종 그랬다. 갑자기 뜬금포로 울컥 울컥. 대체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결혼식 당일에도 난관이 많았다. 남편은 어디 갔니? 왜 혼자 있니? 너 왜 이렇게 살이 빠졌니? 아줌마들은 왜 이렇게 호기심이 많은 걸까. 쏟아지는 질문공세를 피해 나는 주구장창 신부대기실에 죽치고 앉아 있었다.


결혼식 중에 신랑 신부가 부모님한테 인사를 하는데 나는 또 터졌다. 이걸 우려한 동생이 전날 울지 말라고 신신 당부했는데. 역시 넌 날 너무 잘 알아.


내 결혼식 날이 겹쳐졌다. 그날도 난 폭풍 눈물을 흘렸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그냥 부모님께 죄송했다. 이런 사태를 예견했던 것일까. 인간의 직감은 생각보다 정확하다.


내동생은 나와 달리 빵끗빵끗 웃으며 씩씩하게 인사를 마쳤다. 우는 나를 사촌언니가 토닥여 주었다. ‘아 이런, 그만 울어야 하는데. 무슨 사연 있는 여자처럼 보일거 아냐’ 싶다가도, ‘아참 나 사연있지. 그럼 뭐 괜찮아’ 싶었다.


가족사진을 찍는데, 그래도 다행이다 싶었다. 이혼이 조금만 늦어졌다면 내동생 결혼사진에서 한 사람 얼굴을 도려내야 할 뻔했다. 민폐를 이 정도 선에서 막아서 다행이었다.


나한테 또 근황을 물어볼까봐 결혼식이 끝나고 하객들을 다 보낼 때까지 난 고모들, 사촌들, 부모님 친구들을 최대한 피해다녔다. 난 거짓말에 젬병이니까.


그렇게 어찌어찌해서 결혼식을 마치고 동생은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부모님에게도, 동생한테도, 제부에게도 그렇게 모두에게 미안했던 시간이 지나가고, 우리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여전히 카톡과 보이스톡으로 고민과 수다를 나누고 있다.


코로나 사태가 터지기 전에 7월 비행기표를 사 놓았는데,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가게 된다면 오랜만에 아이스크림 한 통을 사서 밥숟가락으로 같이 퍼 먹도록 하자. 제부에게 우리 자매의 전투적인 이 전통을 보여주도록 하자. 그날이 나는 몹시도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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