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일하는 동료들에게는 꽤 미안한 일이지만, 나는 요즘 업무가 없다. 얼마전 큰 프로젝트를 마친 뒤로 일과중 할 일이 많이 줄었다. 보통 이런 시기를 맞을 때마다 나는 업무 역량을 키우기 위한 공부에 몰입해왔지만, 올해 만큼은 어쩐지 그럴 의욕이 들지 않는다. (그건 아마도 지금 내가 타고 있는 배가 그 정도의 높은 역량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동안 아무리 발버둥쳐도 달라지지 않는 현실을 너무 자주 목도해 온 탓일지도 모르겠다.)
회사에서 8시간을 허공에 흘려보낸 뒤 집으로 돌아가는 건 꽤 괴로운 일이다. 이 감각은 신입사원 시절, 첫 출근 날 느꼈던 어색함과도 비슷하다. '뭐라도 시켜만 주십시오!'라는 마음이 자꾸만 올라온다. 그래서 요즘 나는 회사에서 자주 우울해진다. 바쁘지 않아서 우울하다니, 바쁘던 시절의 내가 듣는다면 분명 기가 막힐 노릇일 것이다.
이 불편한 감정의 뿌리는 결국 ‘시간 낭비’에 있다. 생산적인 무언가를 하지 못하고 그저 시간을 죽이는 데서 오는 스트레스는 의외로 크다. 차라리 그 시간에 제대로 놀 수 있다면 덜 답답할 텐데, 동료들이 일하는데 혼자 즐기는 것도 죄책감이 따른다. 게다가 회사에서 즐길만한 놀이거리도 딱히 없다.
선배들은 일이 없을 때는 편히 자기 할 일을 하라며, 그 시간을 즐기라고 조언한다. 하지만 막상 자리에서 책을 읽거나 무언가를 하다 보면 그들 스스로도 불편해한다. 예전에 누군가 책을 읽다 핀잔을 들었던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다. 말과 태도가 따로 노는 순간을 지켜보는 건 늘 씁쓸하다.
그래서 나는 눈에 거슬리지 않도록 조심스레 딴짓을 하며 8시간을 버텨야 한다. 하지만 뚜렷하게 할 만한 게 없어 결국 우울해진다. 내 사업를 하거나 취미에 몰두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멍하니 앉아 있을 수도 없다.
그러다 보니 나는 괜히 동료와의 관계 탓으로 눈을 돌린다. 한가한 시간을 함께 나눌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원망하고, 그 이유를 나이나 성별, 직군 차이 같은 엉뚱한 곳에서 찾으려 든다. 사실 그건 다 근거 없는 핑계에 불과하다는 걸 안다. 불편한 마음을 잠시라도 달래려는 자기 위안일 뿐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불편한 위안에 더는 기대지 않으려 한다. 이대로라면 오래 버티지 못하고 결국 회사를 떠나고 싶어질 것 같기 때문이다. 출근길마다 죄책감과 무력감을 짊어지고 가는 일을 이제는 멈추고 싶다.
이번 주말과 다음 주 연차가 이어지는 연휴 동안, 회사에서 몰래 집중할 수 있는 나만의 프로그램을 짜보겠다. 동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래야 이 회사를 조금 더 오래 다닐 수 있을 것 같다. 만약 누군가 그런 내 모습을 보고 불편해하거나 비난한다면, 그 또한 감내할 준비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