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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egang Jul 22. 2023

나의 시편

2023. 7. 21.





 일찍 자려고 누웠다가 세탁기 안에 빨래가 있다는 걸 기억했다. 너무나 피곤하고 졸린데 기어이 일어난다. 졸림을 참아내고 해야만 하는 일이었기에. 내일로 미루면 빨래는 여름열기에 곰팡내가 날 것이기에. 빨래를 널고 물 한 잔을 마시고 나니 내 안에 가라앉은 기운이 눈곱만큼 깨어나 나는 다시 책상에 앉을 수 있었다. 이까짓 게 뭐라고, 뭔가 끼적이는 것으로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매일 무언가를 쓴다는 것에 목숨(?)을 거는 것인지.


 매일 습관처럼 새벽예배에 간다. 알람이 울리면 끌어당기는 침대를 뿌리치고 기어이 일어나 현관문을 나선다. 몸이 수천 미터 수렁으로 가라앉을 것만 같은 날에도 차키를 들고 나서면 지금 내가 이 책상에 앉은 기운만큼이나 힘이 생긴다. 그 작은 겨자씨만 한 기운으로 버티면 또 조금씩 힘이 더해지고 나는 새벽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 시간이 7시쯤 된다. 어느 날엔 앉아있는 것조차 힘이 들어 그대로 옆으로 누워버린 적도 있다. 그래, 내 중심을 아시니까. 내가 기어이 이 예배당에 나와 앉았다는 게 어디냐고.


 어디에도 어떤 곳에서도 주

 내 중심을 이미 아시니

 내가 있는 이 새벽 바다 끝에

 주도 계신 줄 압니다

 나의 마음과 묵상들을 아시니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어디에도 그 어떤 곳에서도

 주 같은 위로는 없네

 시간이 나를 여기쯤

 새벽 바다 끝으로

 고단한 날갯짓으로 세운

 그 밤을 주었지만

 잠잠히 생각해 보면

 주가 함께 계심을 알기에

 난 오늘도 이 바다를

 노래할 수 있어요  


 나의 시편, 이라는 복음송 가사이다. 종일 이 노래를 읊조린다. 시간이 나를 여기쯤 데려다 놓을 때까지 나는 무엇이었는지, 맑은 어항 속에도 조금씩 물때가 끼어 부유물이 생기는 것처럼 내 안에도 얼마나 많은 부유물이 가라앉았을까. 어항을 흔들듯 나를 흔들어 깨우면 그 부유물들은 바닥에서 일어나 둥둥 뜨겠지. 수많은 스쳐간 것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을 테니, 그 결정체가 모여 여기 작은 나는 서 있는 거구나, 그것들을 낱낱이 들여다볼 수 있는 순간들이 오면 한 사람의 생은 이토록 아름다운 것이구나 싶은 것이다. 삶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내가 여기까지 온 시간이 그렇다는 거다.


 오랜 시간 밀폐되었던 병의 뚜껑을 비틀어 열면 훅 냄새가 끼치는 것처럼 그 시절 그 공간에 밴 공기가 훅 들이치는 순간이 있다. 내가 이랬구나, 그런 적도 있었구나 싶은 것. 절벽 같은 세상에 비집고 서서 나는 무얼 기대하며 파란 같은 날들을 건너 여기까지 온 것인지. 아내가 되었고, 엄마가 되었고, 아직 오지 않은 나를 할머니라 부를 그 아이들…. 그런 일들에 대해 요즘 자주 생각한다.

 “과거가 지나가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차오르고 새어나오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살면서 나를 지나간 사람, 내가 경험한 시간, 감내한 감정들이 지금 내 눈빛에 관여하고 인상에 참여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표정의 양식으로, 분위기의 형태로 남아 내장 깊숙한 곳에서 공기처럼 배어 나왔다.”(김애란, 바깥은 여름) 익숙하고도 낯선 감각으로. 그러니 과거는 현재에 있고 오지 않은 이토록 평범한 미래에 있는 것.  


 “자려고 누워서 생각의 꼬리를 물다가 문득 생각 든 게 어릴 때부터 항상 존재만으로도 든든하고 자랑스럽고 힘이 됐던 엄마아빠, 엄마아빠가 늘 건강하고 행복만 했음 좋겠어 힘든 일 힘든 생각 없이. 사랑해요 언제나 늘 평생”


 엄마의 그 무엇과 맞닿았던 걸까. 그 밤에 툭 올라온 문자메시지의 주인은 큰딸이었다. 남편은 퇴직 1년 6개월을 앞둔 1월에 돌연 이직을 했다. 개혼인 딸 혼사를 앞두고 이직이라! 아이러니하게도 그리됐다. 다행인지 하필 인지 그쯤 타 회사에서의 제안을 받아들여 응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전 회사에는 청첩을 내지 않았다. 참 바보 같은 인생을 사는 것 같지만, 그것도 그가 사는 방식이고 또 내가 사는 방식인 것. 아이가 보낸 문자의 행간을 읽어내자니 가슴이 아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힘든 일 힘든 생각 없이 행복하기만 했으면 좋겠다는 딸의 마음이 이백 배 읽혔으니 가만히 나를 가다듬을 수밖에.


 요즘 나는 혼자다. 아이들은 독립했고, 주말부부가 되었다. 누군가 그랬다. 5-60대는 20대와 닮아 있다고. 그 말뜻은 자유롭게 꿈꾸며 살아가라는 의미겠지. 좀 더 나은, 내가 되는 꿈을 꿀 수 있는 절호의 기회. 그러나 늦은 밤 혼자 누울 때면 문득문득 낯선 공허가 비집고 들어선다. 어느새 시간은 나를 여기에 데려다 놓았구나 싶은 것. 남은 은 어떻게 살아야 하지. 자식에게 폐 끼치는 노인은 되지 말아야지. 이러한 생각들이 안개처럼 습도처럼 몸 구석구석을 점령한다. 여전히 젊은채로 '늙음'을 맞닥뜨린 초보 노인인 나는 기어이 새벽예배에 나가는 수밖에. 주님의 깊은 호흡으로 호흡하고 주님의 말씀으로 나를 관찰하고 주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주님의 마음으로 시대를 읽는 새로운 존재적 시간을 갖고 싶은 것. 그러다 보면 주님의 말씀에 힘입어 나를 정립하고 나를 확장하고 성숙의 과정으로 나아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생기는 것이다. 나를 위한 기도보다 누군가를 위한 기도에 더 마음을 빼앗겨도 좋을 그런 때. 지금 내가 되는 꿈은 바로 그런 것들. 그리고 에세이 2집을 내어놓는 일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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